당연한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

내 생각의 당연함이 멈춘 날들

by 빛담

오랜만에, 변기 물 내림 레버를 마음 편히 누를 수 있었다.
그곳에는 평소 같으면 ‘그냥 당연하게 생각했을’ 물이 차오르고, 그 물을 적정량으로 유지해주던 밸브가 다시 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냉장고 문을 열어볼 수 있었다.
그 안에는 평소 같으면 아무렇지 않게 꺼내 마셨을 차가운 녹차가 있었다. 하나를 꺼내 손에 쥐었을 때 느껴지는 청량감과 약간의 서늘함.
언제나 내게는 그래야만 했던, 냉장고 속 녹차의 느낌은 이런 느낌이었다.


우리 가족은 곧 이사를 앞두고 있다.
4인 가족 기준으로 9년째 살아온 이십평대 복도식 아파트. 더 나은 생활환경을 위해 조금 더 넓은 집으로 옮기기로 결심했다.
이사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처음엔 큰 문제 없이 조용히 이 집에서의 마지막을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역시, 삶은 내 뜻대로 흘러주지 않는다는 걸 다시금 실감했다.


첫 번째 사건은, 9년간 아무 문제 없이 작동하던 변기 밸브 고장이었다.

그날은 유난히 피곤해서 일찍 퇴근한 날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집에서 가장 시원한 화장실 근처 거실에 앉아 휴대폰을 보던 중, 익숙하지 않은 물소리가 들렸다.
이상하다 싶어 화장실로 향했다. 물소리는 몇 분째 계속되고 있었다.

변기 상판을 조심스레 들어 평평한 곳에 내려놓고, 안쪽 부레를 만져보고 밸브를 살펴보았다.

알고 보니, 물이 일정량 차오르면 공급을 멈춰야 하는 밸브가 고장 나 계속해서 물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우선 급한 불부터 껐다. 변기와 연결된 수돗물 밸브를 잠그고, 인터넷을 뒤져 셀프로 교체하는 법을 찾아봤다. 하지만 적절한 도구도 없고, 작업에 자신도 없었다. 결국 언제나처럼 단지 내 철물점 아저씨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몇 시간이 흘러 아저씨께서 방문해주셨지만, 우리가 쓰는 브랜드 변기 부속품은 범용성이 떨어진다며 작업이 어렵다고 하셨다.
할 수 없이 그날은 허탕을 치고, 직접 부품을 찾아 구매하기로 했다. 쿠팡에 들어가 검색을 시작했지만, 옵션이 너무 다양해 도무지 선택이 어려웠다. 괜히 잘못 골라 또 아저씨께 헛걸음을 시킬까봐 망설여지기도 했다.


그렇게 부품을 겨우 구매했지만, 우리 가족은 주말 동안 변기 사용간 불편을 감수해야만 했다.
나는 아이들에게도 변기 사용 후 적당히 물이 찼는지 확인하고, 꼭 수도를 잠그도록 교육했다. 하지만 그들도, 나도, 가끔은 잊곤 했다. 전 사용자가 물을 적게 채운 채 밸브를 잠가서 다음 사람이 곤욕을 치르는 일도 있었다.


늘 당연히 잘 돌아가야 한다고 믿었던 작은 장치 하나의 고장은, 꽤나 큰 불편으로 이어졌다.


다행히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아침, 출근한 사이 철물점 아저씨께서 다시 방문해주셨고, 고장 난 부품을 교체해주셨다. 그토록 걱정하던 브랜드 호환 문제도 다행히 잘 맞아떨어졌고, 우리 집의 대소변 문제는 무사히 해결됐다.


그걸로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두 번째 사건이 발생했다. 이번엔 냉장고였다. 이사와 함께 들인 지 9년 된 우리집 냉장고.

어찌 보면 교체할 시점이라 볼 수도 있지만, 우리 가족 기준에서는 여전히 ‘쌩쌩한’ 기기였다. 냉장고가 고장난 뒤, 냉장실과 냉동실에 보관되어 있던 음식들이 빠르게 상하기 시작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탈취 기능까지 고장 나는 바람에 냉장고 문을 여는 순간, 역겨운 냄새가 집 안 가득 퍼지곤 했다.


가뜩이나 냉온정수기도 없는 집에서, 냉장고마저 고장 나자 여름 한복판에 시원한 물 한 잔 마시는 것조차 어려워졌다. 올여름이 특히 덥다던데, 돌이켜보고 곱씹어 볼 수록 참으로 최악의 타이밍이었다.


냉장고 없는 나날은 내 생각보다 고되게 느껴졌다.

점차 썩어가기 시작한 음식은 모두 버려야 했고, 어쩔수 없이 썩은 음식들을 보관 하게 된 냉장고 내부 부속물들도 하나하나 씻어야만 했다. 그것들이 풍기는 악취가 너무 심해서, AS 기사님이 오셔도 그대로 두기엔 민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 기사님이 방문해 냉장고 모터를 교체해주시고 나서야 이 고생도 끝을 맺을 수 있었다.


평소 같으면, 그저 당연히 작동했어야 할 냉장고였다.
평소 같으면, 그저 아무렇지 않게 물을 내려줘야 했던 변기 밸브였다.

그들은 언제나 내 옆에서, 묵묵히 제 역할을 해왔던 것들이다.


하지만 그런 당연함이 멈추는 순간, 불편은 내게 돌아왔다. 작은 부품 하나가 전체 시스템에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매우 크다는 것을 몸소 체감하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 또 하나를 배운다.
우리 주변의 사물과 사람은 ‘필요’에 의해 존재한다는 것.
그 존재들은 크고 작음을 떠나 모두 연결되어 있고, 어느 하나도 ‘그저 그런 존재’는 없다는 것.

하나의 부품이 멈추면 전체가 흔들리듯, 소소해 보이는 존재 하나가 사라졌을 때에야 비로소 그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그제야 알게 된다.

늘 곁에 있어서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사실은, 우리의 일상을 묵묵히 지탱해주는 가장 중요한 조각들이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