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간 연락 없는 사람, 지워도 될까요

남아 있는 사람, 남지 못한 사람

by 빛담

"여보세요, 누구세요?"
"어, 성웅아 나야 빛담. 잘 지내지? 내가 전화를 잘못 걸었네."

아뿔사. 큰딸에게 전화를 건다는 게, 깜빡하고 대학교 때 친구에게 걸어버린 것이다.
우리 큰딸 이름의 초성 두 개가 그 친구와 같았던 탓에, 아무 생각 없이 눌렀던 번호였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연락처 앱을 열어 아래로 쭉 내리며 그간 저장되어 있던 이름들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연락처에는 ‘중2’, ‘중3’, ‘고1’, ‘학군단’, ‘99대대’, ‘회사동료’처럼 내가 알아볼 수 있는 준거집단을 표기해 둔 이름이 많았다.
심지어 회사 동료의 경우, 지금은 부장님이신 분이 처음엔 ‘김규동 선임님 회사동료’로 저장돼 있기도 했다.이미 퇴사하신 선배님들도 여전히 ‘OOO 책임님’으로 남아 있었다. 이 습관은 2010년 초반, IT 서비스 업계에 취직하고 나서 생겼다.

그 당시 연락처에는 400~500명 가까운 사람이 있었고, 동명이인도 많았다. 누가 언제, 어떤 자리에서 만난 사람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 경우가 잦았다. 그래서 이름 뒤에 카테고리를 붙여 ‘기억의 인덱스’를 만들어두었던 것이다.


하지만 마흔이 넘은 지금,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렇게 많은 연락처를 계속 저장해둘 필요가 있을까?”

가족과 친척을 제외하고, 지난 5년간 한 번이라도 전화를 건 사람이 몇이나 될까.

백번 양보해 카톡을 주고받았거나, 단체방에서 나에게 먼저 말을 건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손으로 꼽아보니, 이 기준을 통과한 사람은 고작 마흔 명 남짓. 많아야 쉰 명이었다.


그들과 나는 한때 정말 친했다.

학교를 함께 다니고, 그들과 함께 군대를 전역하고, 취업과 결혼을 축하해 주며 서로 도왔다.

그러나 지금은 연락할 이유도, 구실도 거의 없다. 괜히 먼저 연락했다간 “혹시 돈 빌리려나?” 하고 오해를 살지도 모른다. 그 생각이 드니 마음이 조금 무거워졌다.


그래도 마음을 다잡았다. 연락처에 저장된 대부분을 지우기로 말이다.
앞서 이야기 한 대로, ‘지난 5년간 개인적인 연락이 있었는가’를 기준으로 연락처를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과감하게, 깔끔하게 지워낼 수 있었다.


혹시라도 그들이 먼저 연락해 온다면, 준비해둔 멘트가 있다.

“나야 바쁘게 지냈지. 아, 혹시 연락처 좀 줄래? 아이폰으로 바꾸면서 연락처가 많이 날아갔거든.”

운영체제가 바뀌었다는 핑계가 제일 무난하다.

예전에 “번호 바뀌었어?” 하고 물었다가 “아니”라는 대답을 들으면 참 민망했던 경험이 몇 번 있어서다.


그렇게 나는 대부분의 옛 친구들과 오늘 ‘소프트하게’ 작별했다.

이제는 큰딸에게 전화를 건다면서, 성웅이라는 대학 친구에게 걸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돌아보면, 그들과 함께하던 시절이 있었다.

가진 건 젊음뿐이었만, 친구들끼리 서로의 현재를 걱정하고 미래를 기대하던 때. 그땐 친구들이 평생 옆에 있을 줄 알았다. 모든 인연에는 끝이 있다는 걸 몰랐던 시기였다. 이제는 그걸 배워가는 중이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친구를 만나는 일이 예전보다 어렵다는 것도 깨닫고 있다.

사진을 함께 찍을 사람을 찾고 싶어도, 출사 모임에 나간다고 꼭 마음 맞는 사람을 만나는 건 아니다.

나이, 자라온 환경, 관심사가 제각각이니, 서로 잘 맞는 친구를 찾는 건 쉽지 않다.

그래서 지금은 ‘현재의 인연’에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내 연락처에 남은 소수정예, 그들은 지금도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귀한 사람들이다. 다음 5년 뒤에도 이들이 내 연락처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나부터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조금씩, 새로운 사람들에게도 다가가 보려고 한다.


마지막으로, 최후의 정예들에게는 특별 대우를 하기로 했다. 이름 뒤에 붙였던 촘촘한 카테고리를 지우고, 그냥 ‘이름’만 남기는 것이다. 이제는 내 휴대폰속 연락처들 중에 동명이인도 없고, 그마저도 친구들로 부터 전화가 자주 오지도 않는 삶이니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당연한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