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한마디가 만든 지금의 나

네 행동을 한번 돌아보는 게 좋겠다

by 빛담

“빛담, 친구들이 너를 왕따 시키고 있어. 네 행동을 한번 돌아보는 게 좋겠다.”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알게 된 친구 J. 첫인상은 말 그대로 ‘도련님’이었다. 수려한 외모, 타고난 운동신경, 게다가 공부까지 잘하는, 전형적인 ‘엄마 친구 아들’이었다.


그 시절 우리 학교는 급식이 없어 도시락을 싸와야 했다.

부모님 두분께서 모두 일을 나가시느라, 언제나 내 도시락은 늘 김치 반찬이 전부였고, 어떤 날은 반찬통 뚜껑이 덜 닫혀 책가방 속 책들이 김치색으로 물든 적도 있었다.

반면 J의 도시락은 정갈했다. 메인 반찬은 물론 메론, 방울토마토, 키위 같은 디저트까지 있었다. 딱 봐도 그의 집안사정은 매우 넉넉해 보였고, 그는 나와는 ‘계급’이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였을까. 그 당시 나는 J와의 인연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이가 될 거라 생각했다.


그 무렵의 나는 불안정했다.

아침마다 수없이 생겨 나는 여드름과 점점 더 길쭉해지는 내 얼굴을 보며 화가 났다. 왜 나는 다른 아이들처럼 피부도 좋고 둥근 호감형 얼굴이 아니었을까? 사춘기 특유의 예민함과 외모 콤플렉스는 분노로 번졌다. 장난을 치거나 시비를 거는 아이가 있으면, 싸움에 약한 몸으로도 먼저 주먹을 휘둘렀다. 그런 나를, 학우들이 좋게 봐줄리가 없었다. 나는 점점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배제되어만 갔다. 그러던 어느 날, J가 쉬는 시간에 다가와 낮고 단호하게 말했다.


“반 친구들이 너를 따돌리고 있어. 네 행동을 좀 돌아보면 좋겠다.” 그는 말만 남기고 운동장으로 향했다.

나는 그말을 듣자마자 '뭐야? 자기가 뭔데 나한테 훈계야?' 하는 짜증이 났다.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하교 후 이불 속에서 곱씹어 보니 내 행동이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사실 친구들의 대부분은 그냥 장난을 친 것뿐이었다. 적대심이 없었는데도, 나는 불안과 콤플렉스를 이유로 분노를 잘못된 방향으로 쏟아낸 것이었다.


그날 이후 다짐했다. 무조건 한 번, 두 번, 세 번까지는 참겠다고. 짜증도, 화도, 주먹도 꾹 참아보기로 했다.
그 변화는 곧 나타났다. 나를 피하던 친구들이 점점 다가왔고, 인간관계를 대하는 내 태도도 성숙해졌다. 자연스럽게 J와도 같은 무리에 속하게 됐다.


중학교 2학년을 마친 J는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이후로도 방학 때마다 귀국해 모임을 이어갔고, 그는 언제나 우리 모임의 리더였다.

J의 시간도 흐르듯, 나의 시간도 흐르고 있었다. 나는 대학 졸업, 군 복무, 취업, 결혼, 출산 등 삶의 굵직한 일들을 지나며 모임 참석이 뜸해졌다. 그러다 보니 그와의 연락은 인스타 그램등 SNS와 단톡방으로만 이어지기 일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사내 메신저로 J가 말을 걸어왔다. 같은 계열사에서 근무 중이라니, 놀라웠다. 미국에서 연구를 계속하는 줄만 알았는데, 2년 전 반도체 핵심 인력으로 ‘모셔져’ 왔다고 했다.
중학교 시절 겸상조차 어려울 것 같았던 그와, 이렇게 다시 같은 직장 울타리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게 신기했다.

그는 그러면서 미국에서 만난 여자친구와 현재 한국에서 살고 있다며, 그녀에게 나를 소개시켜 주고 싶다고 했다며 함께 식사자리를 조만간 만들어 보겠다고 이야기 했다.

며칠 뒤, 우리는 그의 여자친구, 그리고 중학교 시절 가장 친했던 친구까지 넷이서 식사 자리를 가졌다.

그의 여자친구는 자신을 ‘카리나’라고 소개했고, 나는 자동반사적으로 “에스파!”라고 반색하며 내가 아는 영어 이름중 하나라고 웃으며 이야기했다. 그녀는 내 농담에 웃으며, 원래 자신이 먼저 쓰던 이름이라고 능청스럽게 답했다. 그렇게 이번 모임 분위기는 그녀 덕분에 내내 유쾌했다.


식사가 무르익었을 즈음, 나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괜찮다면 너희 커플 야외 스냅이랑 본식 사진을 내가 찍어줄수도 있을거 같아.”


J는 내 사진 실력을 알고 있었지만, 내가 3년간 수많은 웨딩홀을 돌며 촬영해 온 건 몰랐다.

그는 내가 크게 부담되지 않고 괜찮다면, 흔쾌히 맡기고 싶다며 반갑게 화답해줬다. 하객규모가 작은 소규모 하우스 웨딩을 준비 중인 그들은 과한 포즈 없이 담백하게 기록을 남기고 싶어 했다. 나로선 J에게 진 마음속 빚을 갚을 좋은 기회였다.


중학교 시절, 내 인생의 방향을 바꾸어 준 사람은 바로 J였다. 그가 아니었다면 지금과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마음속에 빚처럼 남았던 그 은혜를,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방식으로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게 된 듯해 기분이 가벼워졌다.

그날 우리는 4시간 넘게 과거, 현재, 미래를 이야기했다. 식당 앞에서 헤어질 때, 왠지 더 함께 있고 싶었다. 집에 가기를 늘 서두르던 내가, 오랜만에 느끼는 기분이었다.


이제는 예전처럼 인연을 흘려보내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내 곁에 남은 사람들은 이제 최정예다. 그들과 현재를 넘어 미래를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관계로, 내 주변을 다시 채워 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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