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나이든 집과의 이별

1403호, 고마웠어

by 빛담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일찍 퇴근해 집에 있었다.

아내는 늘 바쁘다. 주 5일도 모자라 주 7일 단기 근로를 하고, 평일에는 아이들이 학교를 마치면 아이들 일정을 챙기고, 저녁에는 홀로 계신 친정아버지를 돌본다.
내가 오늘 일찍 퇴근한 이유는, 집 매수자가 잔금을 치른 뒤 인테리어 실측을 위해 집 치수를 재야 한다며 양해를 구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간단히 인사한 뒤 “실례하겠습니다.”라며 집안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치수를 쟀다. 10분도 채 되지 않아 돌아갔다.

기분이 묘했다. 이 집을 샀을 때는 장모님 댁에서 더부살이하던 때였다. 아무것도 없는 빈집에 들어와, 앞으로 어떻게 꾸밀지 기대와 희망으로 그림을 그렸던 기억이 난다. 그게 벌써 9년 전이다. 이제는 우리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이 집에 들어와, 그때의 나처럼 새로운 기대를 품고 살아가겠지.

다음 날, 출근길 엘리베이터에 붙은 공고문이 눈에 띄었다.

“8/26~9/16 1403호 인테리어 예정. 큰 소음이 발생할 수 있으니 양해 바랍니다.”

또 다른 묘한 기분이 들었다. 도배야 당연히 해야겠지만, 화장실·부엌·조명까지 전부 손봐야 할 정도였나?

‘그렇게 낡았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곧 생각을 바꿨다. 아이 둘이 갓난아기 때부터 자라온 집이다. 벽에는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그려온 낙서가 많았고, 화장실 바닥과 벽면 줄눈은 점점 해져가고 있었다. 욕실엔 쉽게 지워지지 않는 물때가 남았고, 부엌은 겉으론 멀쩡하지만 문을 열면 미세한 나무 먼지가 바닥에 쌓였다.

“그랬구나. 우리도 나이 먹는 만큼, 너도 늙어가고 있었구나.”

우리가 사는 공간도 함께 나이를 먹어간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이사 전 마지막 금요일. 큰 의미를 두진 않았지만,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출퇴근한 평일이었다.

집에 돌아오니 이사는 어느 정도 준비되어 있었고, 그 모습이 낯설었다. 어수선하게 널려 있어야 할 물건들이 제자리를 찾고 있었다.

기분이 묘했다. 이제 이곳에서 더는 “아빠 다녀올게.”라는 말을 하지 않게 된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그런 기분을 뒤로하고 카메라를 들고 한강공원으로 나섰다. 아파트 후문을 나와 횡단보도 하나만 건너면 바로 만날 수 있던 곳. 아마 이사 가면 지금처럼 자주 오긴 힘들 거다. 새로운 집에서는 한강까지 걸어가는 게 조금 더 불편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소중한 공간을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고 싶었다.

이 집에 들어오기 전, 아내와 큰애를 데리고 처음 찾았던 한강공원 농구코트. 당시 내 유일한 취미가 농구였고, 그 때문에 이 집을 사고 싶다는 마음을 굳혔다.


농구코트를 지나 조금만 걸으면 아이들과 달리던 운동장이 나온다. 어르신들은 여전히 땀을 흘리며 운동 중이었고, 그곳에서 잠시 아이들과 함께 달리던 어느 여름밤이 떠올랐다.

생전에 장모님과 마주쳤던 기억도 떠올랐다. 아이들을 봐주시고, 늦은 밤 고운 모랫길을 맨발로 걸으시던 모습. 장모님은 살아 생전 본인도 무척 힘드셨을 텐데도 내색한 적이 없으셨다. 아마 이곳에서 홀로 걸으시며 나처럼 삶의 고달픔과 힘듦을 모랫길에 쏟아내셨겠지.

마지막으로 힘들 때마다 언제나 내 얘기를 말없이 들어주던 광진교에도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자주는 못 와. 조금 멀어져. 그래도 내가 힘들 때 또 와도 되지?”

광진교는 언제나 늘 그렇듯, 대답이 없었다.

IMG_2930.JPG 평소 장모님께서 좋아 하시던 고운 모랫길, 장모님 이야기 들어줘서 너무 고맙다 모랫길아.


비록 네 식구가 살기엔 좁아 어쩔 수 없이 떠나지만, 이 집에 고마운 게 많다. 살아가면서 흔히 겪는 누수도 없었고, 층간소음도 없었다. 습기도 적어 곰팡이 없이 쾌적했고, 하수구 막힘 같은 불편도 없이 참 건강한 집이었다.

그런 이 집도 몇 년 후면 지은 지 30년이 된다. 그럼에도 새로운 주인과 함께, 우리 가족에게 해줬던 것처럼 건강하게 누군가의 쉼터가 되길 바란다.


1403호, 정말 고마웠어. 덕분에 잘 쉬었다. 너도 오래오래 건강하길.

이제는 다른 누군가의 1403호가 되겠지만, 우리에겐 언제까지나 ‘우리의 집’으로 남아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