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지가 아닌 즐거움

40대, 취미로 시작해서 진심이 된 일본어

by 빛담

"그저 취미로 시작했지만, 이번엔 꽤나 진심이었다" 브런치 스토리에서 이미 언급했듯, 지난 7월 일본어 능력시험 2급에 응시한 뒤 두 달여 동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원인은 하나, 불확실성. 가답안을 채점했을 땐 실낱같은 희망이 보였지만, 혹시라도 불합격이라면 후폭풍처럼 아쉬움이 밀려올 것 같아 두려웠다.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늘 마음을 다잡으려 애쓰면서도, 문득 숨죽이며 결과만 기다리곤 했다.
“빛담님, 통과한다고 뭐 크게 달라질 것도 없는 시험인데 왜 그렇게 결과가 궁금하세요?” 누군가 농담처럼 건넨 말에 나는 그저 웃어넘겼다. 딱히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년 12월 치렀던 3급 시험은 달랐다. 떨어진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었다. 물론 3급조차 쉽지 않았다. 일본어 공부를 할 때 자주 들르는 ‘일공사’ 네이버 카페에는 “등급이 한 단계 오를 때마다 외워야 할 한자가 두 배 늘어난다”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을 듣고 무릎을 탁 쳤던 기억이 난다. 실제로 4급에서 3급으로 올라올 때도 벅찼는데, 2급 준비는 그보다 훨씬 가파른 언덕이었다. 두 배로 늘어난 한자 어휘, 끝없이 이어지는 관용구, 길어진 독해 지문, 도무지 잡히지 않던 청해까지. 회사에서는 짬날 때마다 단어를 외우고, 야후 재팬에서 기사를 읽었으며, 막판에는 듣기 교재 mp3를 반복해서 들으며 귀를 뚫으려 애썼다. 그 과정에서 문득 떠오른 말이 있다.
“하고자 하면 방법을 찾고, 피하려 하면 핑계를 찾는다.”
돌이켜보면 이 말만큼 내 일본어 공부 여정을 설명하는 문장이 또 없었다.

마흔이 된 지금, 예전처럼 기억력이 반짝이지는 않는다. 가끔은 했던 말을 또 하고, 작은 것들을 잊기도 한다. 회사 일은 점점 많아지고 책임도 무거워진다. 개인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게 현실이다. 그럼에도 출퇴근길, 짧은 휴식 시간, 주말 카페에서의 몇 시간… 나는 틈틈이 시간을 모아 공부했다. 결국 2급을 준비하는 시간은, 억지로가 아니라 스스로 하고자 하여 방법을 찾았던 시간들이었다.


시험을 치른 지 두 달 가까이 지난 어느 월요일, 마침 우리 가족의 이사 날이었다. 아침부터 이삿짐센터 직원과 이야기를 하고, 폐기물 처리와 잔금 정산까지 정신없이 뛰어다니다 보니 정오를 훌쩍 넘겼다. 그제야 생각났다. ‘오늘 결과 발표구나.’
편의점에 들러 아내와 음료를 마시며 휴대폰으로 확인한 결과는, 합격. 고득점은 아니었지만, 그동안 몰래몰래 쌓아온 시간들이 헛되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이삿날 특유의 피곤함과 푹푹 찌는 날씨 때문에 짜증도 났지만, 그 순간만큼은 활짝 웃으며 아내에게 합격 자랑을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합격 발표가 있은 지 사흘, ‘일공사’ 카페에는 합격 후기들이 줄줄이 올라왔다. 대부분 워킹홀리데이를 준비하는 대학생들이었지만, 가끔은 나와 비슷한 40대, 혹은 그 이상의 연령대도 있었다. 그들 또한 나처럼 당장 일본에 취업하려는 것도, 그렇다고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재미 삼아, 스스로 도전하며 공부하는 것이다. 나는 이 지점이 참 행복하다.


십대에는 대학을 위해, 이십대에는 취업을 위해, 삼십대에는 가정을 위해… 늘 ‘억지로’ 해야 하는 공부만 있었다. 마흔이 되어서야 비로소 하고 싶은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던 셈이다.

돌아보면 나는 지금까지 내가 원해서 해본 공부가 거의 없었다. 누군가 필요하다고 하니까, 일이 된다니까, 억지로 해야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난 2년여간 일본어 공부는 달랐다. 즐거웠다. 부담이 없었다. 이제 남은 건 마지막, 1급만을 남겨두고 있다.

비록 남들은 2급의 두 배 반은 더 힘들 거라고들 하지만, 이번만큼은 가벼운 마음으로 즐겨 보려 한다. 일본어 능력시험 1급은 내겐 도전이라 부를 만한 단계이기 때문이다. 내년 하반기까지 세 번의 기회가 남아 있으니, 끝까지 부딪혀 보고 아니라면 깔끔히 내려놓으려 한다.

그래도 평생 한 번쯤, 한 언어의 최고 등급 단계를 끝까지 밟아 보고 싶은 욕심이 있다. 사실 영어는 그렇지 못했다. 중학교 때부터 수많은 시간을 쏟았지만, 즐거움이 없었다. 반대로 일본어는 다르다. 이번에는 내가 원해서, 내가 즐기며 해 나가고 있다.

일본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石の上にも三年」(いしのうえにもさんねん / 돌 위에도 3년)

차갑고 단단한 돌 위에 3년을 앉아 있으면 따뜻해진다는 뜻, 곧 끈기와 인내 끝에 결실이 온다는 말이다.

나의 일본어 공부도 결국 그 돌 위에 앉아 있는 시간과 같을지 모른다.

지난 2년여의 공부에 내년까지의 시간을 더해, 총 3년. 나는 이제 남은 이 여정을 즐기며 좋은 결실을 기대해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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