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오카야마라는 곳을 가보기로 했다.
오카야마는 교토에서 약 200km 떨어진 도시다. 이쯤 되면 교토 외곽이라 부르기엔 다소 멀지 않나 싶은데, 그래도 내가 구매한 JR 간사이 와이드 패스로 추가 교통비 부담 없이 갈 만한 곳이라 생각했다. 사실 목적지는 오카야마 자체가 아니라, 거기서 한 번 더 갈아타 20분쯤 가면 만날 수 있는 구라시키 미관지구였다.
교토역에서 오카야마까지 가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신칸센 표를 따로 사는 것이지만, 일본의 교통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비싸다. 일본에 사는 친구도 “너무 비싸서 심야버스를 이용한 적 있다”고 할 정도였다. 다행히 JR 간사이 와이드 패스를 쓰면 교토에서 신오사카까지는 신쾌속이나 하루카로 이동하고, 신오사카에서 오카야마까지는 미리 예약한 신칸센 지정석으로 편히 갈 수 있다. 그렇게 나는 이른 아침부터 구라시키 미관지구로 향했다.
3년 전 오사카에 왔을 때는 신쾌속을 자주 이용했다. 코로나 종식 직후, 연말연초 시기였는데 늘 앉아갈 수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오늘 신오사카행 신쾌속은 빈자리 하나 없이 가득 차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짐가방을 앞으로 멘 채, 객실 구석에 서서 태연한 척 버텼다.
일본 열차를 탈 때마다 놀라는 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객실 안이 놀라울 정도로 조용하다는 것, 또 하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방을 ‘앞으로’ 멘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지하철 캠페인 덕에 앞메기가 많이 자리잡았지만, 일본은 거의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하고 있었다. 좁은 공간을 배려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정말 대화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한국에서도 점차 좋아지고는 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도 했다. 일본 사회가 이렇게 ‘내 공간’과 ‘타인의 공간’을 엄격히 구분해 지탱된다면, 누군가 그 경계를 침범했을 때 더 크게 분노하지 않을까? 억울하다는 감정이 더 클 수도 있겠다는, 그런 짧은 상상 말이다.
다행히 신오사카에서 미리 예매해둔 신칸센 지정석에 앉을 수 있었다. 앞 구간에서 사람들 틈에 끼어 서 있느라 힘들었기에, 편히 앉아 갈 수 있다는 게 무척 반가웠다. 오카야마까지는 약 40분. 역시 신칸센답게 빠른 속도였다.
여행 전 참고했던 블로그와 에세이에서는 신칸센 안에서 ‘에키벤’을 먹는 이야기가 자주 등장했다.
사실 평소 나는 맛집 탐방에 큰 관심이 없는 편이다. 좋은 사진을 남기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날만큼은 달랐다. 전날 밤, 숙소에 늦게 도착해 편의점 돈까스와 오니기리로 허기를 달랜 게 전부였으니, 당연히 배가 고팠다.
플랫폼 위층에는 에키벤 가게들이 줄지어 있었고, 사람들은 하나씩 사서 열차에 오르고 있었다. 나도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에키벤을 집어 들었다. 옆자리 승객에게 가볍게 목례로 양해를 구한 뒤, 허겁지겁 도시락을 비웠다. 겉보기엔 평범했지만, 밥알의 점성과 반찬의 조화가 훌륭했다.
식사를 마치고 20여 분쯤 달리자 오카야마에 도착했다. 신칸센의 느낌은 한국 KTX와 비슷했지만, 두 배가 넘는 요금을 생각하면 일본에서 살 때는 쉽게 탈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로컬선을 타고 20여 분 더 달려 구라시키에 닿았다.
구라시키. 일본어로는 자연스러운데, 한국어 발음으로 하면 ‘구라’와 ‘시키’가 묘하게 섞여 조금 웃긴다. 결석(겟세키), 유적(이세키) 같은 발음이 한국인에겐 살짝 민망하게 다가오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역에서 내려 도보 10분. 드디어 블로그에서 보았던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구라시키 미관지구를 한 줄로 요약하면 ‘작은 운하가 있는 교토’라고 할까. 옛 건축물이 잘 보존된 거리에 운하가 흐르고, 주변에는 상점들이 늘어서 있었다. 건축가 유현준 교수가 말한 “걷고 싶은 거리”의 조건, 골목마다 “무엇이 나타날까?”라는 호기심을 자극해야 한다에 딱 들어맞는 곳이었다.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골목을 거닐었고, 나 또한 카메라 셔터를 쉴 새 없이 눌러대고 있었다.
그런데, 하늘이 날 돕지 않았다. 사실 큰일이 생긴 건 아니고, 하늘에서 비가 끊임없이 내렸기 때문이다.
스마트폰보다 크고 무거운 카메라를 한 손에 쥐고, 다른 손에는 우산을 들고 사진을 찍는다는 건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힐끗 오카야마 날씨를 검색해봤다. 예보는 ‘흐림’, 비 소식은 없었다. 무슨 자신감인지, 나는 그 사이트의 예보를 전적으로 믿어보기로 했다. 결국 숙소에서 챙기지 않았던 우산은, 실제 구라시키에 도착해서야 그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비가 세차게 쏟아진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우산을 쓰지 않기엔 어딘가 좀 어색했다. 미관지구로 가는 길에 500엔짜리 저렴한 우산이 눈에 띄었지만, 괜히 스킵했다가 정작 미관지구에 도착하니 빗방울이 더 굵어져,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500엔보다 더 비싼돈을 주고서라도 우산을 살 수밖에 없었다. 안 쓰고 버틸 거였으면 끝까지 버텼어야 하고, 쓸 거였다면 숙소에서 가져왔어야 했는데… 이보다 더 어정쩡할 수는 없었다. 결국 왼손에 우산을 든 채 카메라를 다루려니, 촬영이 이만저만 불편한 게 아니었다.
비가 오다 안오다를 반복하는 사이, 나는 유유히 주변을 둘러보며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구라시키 미관지구를 가로지르는 작은 운하 주변은 그중에서도 가장 예뻤다. 뱃사공과 함께 유유히 뱃놀이를 즐기는 관광객들의 표정에서, 왜 이곳 이름에 ‘미관지구’가 붙었는지 금세 알 수 있었다. 운하 양옆으로 길게 뻗은 가로수, 대나무 장대를 이용해 배를 천천히 움직이는 뱃사공의 모습은 말 그대로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운하만 예쁜 것도 아니었다. 골목 곳곳이 관광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큼 다채로운 매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치 내가 직접 경험해본 적은 없지만, 1800년대 에도 시대로 돌아간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이렇게 우산과 카메라를 함께 양손에 들고 걷다 보니 금방 지치는 거 같아 잠시 쉴 겸 어느 찻집에 들렀다.
사실 나는 커피만 주문하려 했지만, 점원이 권한 지역 명물 ‘무라스지메 세트’를 시켰다. 커피는 서울에서 마시던 것과 다른, 달콤하면서도 쌉싸래한 맛이었다. 함께 나온 무라스지메는 겉은 카스타드 과자 같고, 속은 팥이 가득했다. 솔직히 ‘명물’이라 하기엔 아쉬웠지만 맛은 충분히 괜찮았다.
그렇게 킷사텐에서 잠시 쉬고 힘을 내어, 다시 오카야마로 돌아가기로 했다.
교토로 곧장 가도 되지만, 시간이 남아 오카야마에서 한 곳 더 들러보기로 했다. 선택한 곳은 ‘키비츠 신사’. 오카야마역에서 20분쯤 가야 하는 소도시에 자리한 신사다. 무료 입장이 가능한 데다 규모가 제법 크다고 해서 정했다. 일본 3대 정원 중 하나인 고라쿠엔을 갈까도 고민했지만, 비가 부슬부슬 내려서 감흥이 덜할 것 같았다.
키비츠 신사에서 가장 가까운, 키비츠 역은 무인 간이역이었다. 개찰구도 매우 단출했다. 잠시 ‘무임승차도 가능하겠네?’라는 위험한 생각이 스쳤지만, 결국 큰 역에서 걸릴 테니 별 의미 없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역에서 신사까지는 도보 10분 남짓. 신사로 향하는 길가에는 벼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는 문득 일본 뉴스에서 쌀값 폭등 이야기를 들은 게 떠올랐다. 일본인은 늘 최상의 쌀만 먹는다고 들었는데, 그 벼들도 그런 품질일까 싶었다. 한국 쌀도 충분히 맛있다고 생각하는 내게는 조금 의아한 부분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신사에 도착했다.
키비츠 신사는 30분이면 충분히 둘러볼 만한 규모였다. 신사문화의 유래를 적은 안내문에는 일본 토속 신앙의 대한 설명이 상세히 담겨 있었다. 나는 가족과 나의 안녕을 빌고, 세수대에서 손을 씻었다. 또한 본의아니게 내가 피해를 준 이들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경건히 손을 닦고, 합장 후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또 올게요’라는 말을 남기고 나왔다. 그렇게, 나는 짧은 오카야마 여행을 마치고 숙소로 향하게 되었다.
숙소로 돌아와 글을 쓰던 중, 회사 선배들이 있는 단톡방에서 메시지가 왔다.
“빛담, 일본 가서 사진만 찍는 거 아니고 맛집도 가냐?”
잠시 멈칫했다. 사실 이번 여행 버킷리스트 중 하나가 ‘현지 맛집에서 혼자 주문하고 먹어보기’였는데, 아직 실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요, 점심은 도시락 먹고 저녁은 맥도날드에서 혼자 먹었어요.”
그게 전부였다. 이후 대화방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채워졌다.
문득 깨달았다. 내가 하고 싶었던 게 참 많았구나. 카모강에서 연인들 데이트하는 모습 지켜보기, 멍하니 사람 바라보기…. 이번엔 쫓기듯 다니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결국 또 내가 짜둔 무리한 일정에 맞춰 움직이고 있었다. 교통패스를 아깝게 만들지 않으려는 내 습관 탓이리라.
그래도 괜찮다. 그게 나니까. 이제는 이런 나도 스스로 좋아하기로 했다. 내가 나를 인정해야, 남도 나를 좋아해 줄 테니까. 그렇게 나의 교토 여행기의 콘텐츠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それでも、私は私でいたい。"그래도, 나는 나로 있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