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이유가 아니라, 변명하는 나 자신이 더 싫었다.
사람은 종종, 일어나지도 않은 재판을 먼저 준비한다.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변론을 써두고, 판결이 내려지기 전인데도 혼자 유죄를 인정한다. 나는 요즘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자주 확인한다.
『잠시만, 도쿄』를 준비하며 몇몇 동료에게만 조용히 말했다. 또 도쿄에 간다고, 이번에도 혼자 간다고.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내 안에서는 즉시 두 개의 질문이 따라붙었다. 왜 또 혼자인가. 왜 또 일본인가. 사실 질문을 던진 사람은 없었는데, 질문은 이미 내 마음속에 상주해 있었다.
이상한 건, 그 질문들이 “남이 나를 오해할까 봐” 힘든 게 아니었다는 점이다. 나를 아는 사람에게까지 내가 나를 설명해야 하는 그 구조가 싫었다. 좋아서 하는 일을 말하는데, 그 순간부터 설명이 시작되고, 설명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스스로 변호하고 있었다.
나는 ‘왜 또 혼자냐’에 대한 표면적인 답을 갖고 있다. 책을 쓰러 간다고. 혼자 있어야만 문장이 나오는 사람이 있고, 혼자 있어야만 사진이 정리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그럴듯한 답이 준비되어 있어도 마음이 가벼워지지 않을 때가 있다. 가정이 있는 사람이 무려 9일이나 자리를 비운다는 사실이, 내가 생각해도 어딘가 “과한 선택”처럼 느껴질 때가 있기 때문이다. 반면 “왜 또 일본이냐”는 질문은, 내게 그리 큰 무게로 다가오지 않는다.
바로 그 “과한 선택”처럼 느껴졌던 지점에서, 어젯밤 아내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당신은 가족에 대한 애착이 너무 없는 것 같아.” 그 말이 불편했던 건 비난처럼 들려서가 아니라, 묘하게 ‘맞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빛 좋은 오후, 산책을 하며 스스로와 대화를 나누어 보니 나는 함께 있을 때 소중함을 잘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가족이 내 옆에 있을 때는, 그 존재가 너무 익숙해서 배경이 된다. 배경이 된다는 건 무시한다는 뜻이 아니라, 눈이 익숙함을 정보로 처리해버린다는 뜻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떨어져 있을 때 가족이 더 선명해진다. 홀로 11일간 떠났던 교토 여행에서 그 선명함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이상하게도 혼자 여행을 가면 가족 단위 관광객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들을 제3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는 내가, 그제서야 문득 ‘나도 가정이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그때 알 수 없는 외로움이 올라온다. 그 외로움은 비참함이라기보다, 뒤늦게 도착한 현실감에 가깝다. 그래서 나는 전화를 한다. 영상통화를 한다. 멀어졌기 때문에 비로소 가까워지는 방식으로.
그걸 가족에 대한 애착이 없다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오늘 다른 이름을 붙이고 싶다. 나는 애착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애착이 ‘거리에서’ 활성화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가까울수록 둔해지고, 멀어질수록 선명해지는 방식. 누군가는 그것을 차갑다고 말할 수 있지만, 나의 연결은 대개 그렇게 작동해왔다.
생각해보면 이 리듬은 회사에서도 비슷했다. 일에는 애착이 있었지만, 조직에는 애착이 적었다. 업무는 책임지고 해결했지만, “함께 섞이는 의식”에는 큰 의미를 느끼지 못했다. 한국 사회는 특히 소속을 증명하는 장면에 민감하다. 같은 팀이면 같이 움직여야 하고, 같이 밥을 먹어야 하고, 같이 어울려야 한다는 기대가 있다. 그 기대에서 벗어나는 순간, 사람은 설명을 요구받는다. 문제는 그 설명이 밖에서만 시작되는 게 아니라, 결국 내 안에서 먼저 시작된다는 점이다.
오늘 내가 우울했던 건 ‘혼자 여행’ 자체가 아니라, 내가 그 선택을 변호하려는 마음이었다. 그 마음은 결국 내가 나를 의심하고 있다는 증거다. 가족을 사랑하는 방식도, 삶을 유지하는 방식도, 남들이 정한 표준에 대입했을 때 불안해지는 순간이 있다. 그래서 나는 질문을 받기 전에 이미 변론을 준비한다.
내가 도쿄에 ‘홀로’ 가는 이유를 누군가에게 다 설명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건, 내가 나에게만큼은 정직해지는 것이다. 나는 혼자여야 글이 나오고, 혼자여야 내가 보이고, 이상하게도 혼자일 때 가족이 더 또렷해진다.
그것이 나의 결이라면, 나는 그 결을 숨기기보다 지금으로서는 인정하는 편을 택하고 싶다. 아직은 답을 내릴 수 없더라도, 적어도 내 감정에 정확한 꼬리표를 붙이는 사람. 오늘의 산책은 그 연습을 조금 해본 오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