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 전업주부의 말할 수 없는 우울

by 도로도로

나는 일을 왜 좋아했을까.


워커홀릭이라고 일을 매일 하하호호 하면서 하진 않는다. 화도 나고 짜증도 났지만 그래도 일하는 걸 즐겼던 이유는 성공적으로 이번 프로젝트가 마무리되었다는 짜릿함. 그리고 프로젝트를 하며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는 동료와 상사들이 있었기 때문 아니었을까. 누군가 너무 화나는 일이 있을 때 또 좋은 프로젝트가 수주되었을 때.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을 때 함께 기울이는 맥주는 그 모든 짜증을 잊게 해 주었다.


그러나 육아는 다르다. 행복은 분명 만 배가 넘는다. 큰 사업이 수주되어서도 아니고 내 연봉이 크게 인상되는 것도 아닌 아이의 미소 하나로 얻는 행복은 정말 무엇에 비할 수가 없다. 그러나 아이가 주는 행복과 별개로 나의 일상에서의 우울 또한 온다. 그리고 이 우울은 누구에게 나눌 수가 없다.


우울의 주된 이유는 이런 희로애락을 함께 백 퍼센트 공감하고 나눌 사람이 없어서다. 일은 같이 하기에 오늘의 나의 감정을 같이 일하는 다른 사람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안다. 그러나 육아는 주양육자가 나 혼자뿐이다. 부양육자인 남편은 하루에 육아에 쏟는 시간이 나에 비하면 적고 그래서 오늘 내 육아에서 일어난 일을 백 퍼센트 이해하지 못한다. 또한 나에게 오늘 아이가 깔깔댔을 때의 감정과 부양육자에게 그 감정은 너무나 다르다. 부양육자가 이 정도이다 보니 다른 사람은 말할 것도 없다. 아직 말하지 못하는 아이와 함께 이 감정을 나눌 수도 없으니 희로애락은 온전히 나의 것이다.


그리고 나의 세상이 점차 좁아짐을 느껴 우울해진다. 나의 24시간은 이제 육아다. 점차 일에 대한 감각도 없어져가고 연구에 대한 감각은 이미 거의 실종되다시피 했다. 그래도 나름 비즈니스캐주얼을 잊고 멋있게 강연했던 나의 몸뚱이는 아직도 임신 시기의 살을 빼지 못한 상태로 허리와 손목 통증만 달고 있고 스타벅스 커피와 함께 회사 사람들과 수다 떨던 나는 이제 아이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있다. 남편하고 대화할 때에도 남편은 다채로운 대화 소재가 나오지만 나는 육아 소재밖에 나오지 않고 친한 친구들이 놀러 와도 이제 나는 이야기를 듣는 쪽이 되었다. 이것저것 토크하는 것을 좋아하던 나는 점차 육아 소재로만 무궁무진해지고 있다. 아직 많은 친구들이 육아를 하고 있지는 않기에 이 소재를 꺼낼 친구들은 극소수이고 나의 세상은 좁아진다.


그러나 우울하다고 어디에 말할 수 있을까. 정말 친한 친구들은 아직 육아를 하고 있지 않거나 일부 소수 친구들은 워킹맘으로서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살고 있기에 우울을 논할 수 없다. 남편도 이제는 혼자 가정을 위해 열심히 돈을 벌며 틈나는 시간에 육아도 하려니 힘들 텐데 거기에 내가 우울하다고 말해봤자지. 친정부모님에게 우울하다고 말하는 건 친정부모님의 걱정거리만 쌓는다. 그리고 아이를 키우느라 우울해하면 시터를 써보는 게 어때 라는 반응이 대부분일 텐데 답정너로 아직 시터를 쓰고 싶진 않고. 또 이 시기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아이를 키우는 게 우울하구나라고 이분법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 같아 아이를 키우면서 우울하다고 투덜거리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도 않으니 조용히 브런치에만 털어놓을 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엄마에겐 아플 자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