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게도 수많은 정체성이 있는걸

by 도로도로

나의 정체성을 현재 크게 정의하면 박사과정 수료생으로서 논문을 준비하는 박사과정 수료생, 10년 가까이하던 일을 잠시 중지하고 4대 보험은 걸려있는 육아휴직자, 그리고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의 정체성이다. 물론 아내, 딸, 그리고 그냥 나 자신도 있겠지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저 세 가지의 정체성이다.


뭐 하나 쉬운 것이 없다. 박사학위논문을 쓰기 위해서는 온전히 집중해야 하는 시간이 있어야 하는데 집중은 아이가 잠잘 때만 가능하다. 새벽에 논문을 쓰면 다음 날 육아에 지장이 생기고 신경이 예민해진다.


휴직자가 쉬워 보이지만 요즘 모든 회사가 그렇듯 회사의 상황이 엄청 좋은 편은 아니고 같은 팀원과 동시에 육아휴직을 들어온 터라 회사에서는 슬슬 조기복직을 권유하는 말이 나오고 나도 내가 담당했던 프로젝트가 어그러지는 걸 보는 것도 괜스레 죄송하고 복직해서 프로젝트를 잘 마무리하고 싶기도 하다.


엄마. 엄마라는 정체성은 가장 행복하기도 하지만 가장 혼란스럽기도 하다. 이 세 가지의 정체성은 나의 자존감을 올려주기도 하고 힘들기도 하다. 육아 휴직자에서 복직자로 바뀌면 더 심하겠지.


그래서 장은영(2025)의 논문은 특별하게 다가왔다. '산후우울증을 경험한 초등학교 여교사의 교육학 박사학위 취득 여정에 대한 자전적 내러티브 탐구'라니. 산후우울증, 직업인, 교육학 박사학위 이 모든 것이 무서울 정도로 나와 일치하는 모습이라 안 볼 수가 없었다.


연구자는 둘째를 출산하고 나서부터 내러티브 탐구를 시작한다. 첫째의 요구를 충분히 수용하지 못하면서도 둘째 신생아 케어에서 오는 신체적, 정서적 소진. 연구자는 육아는 단순 돌봄 노동이 아니라 "시간의 반복적 순환 속의 자율성을 상실하는 과정"이라고 이야기했다. 오늘과 어제의 차이가 모호해지고, 같은 일상의 반복. 남편이 있지만 직장생활을 하는 남편으로 인해 육아의 전적인 책임을 짊어지고 있다는 부담감과 고립감. 극심한 피로와 정서적 소진으로 인해 절망감, 분노, 미안함, 죄책감이 오며 결국 의식을 잃은 연구자.


출산 전에 내가 이걸 읽었다면 이렇게 가슴 깊숙이까지 공감하지 못했을 거다. 나는 남편이 재택근무도 하고, 바쁘지만 육아에 시간을 쓰려고 하고, 더군다나 아이 하나를 키우고 있기에 연구자 정도의 피곤은 아니지만, '시간의 반복적 순환', '부담감과 고립감', '피곤'은 사실 육아휴직을 하고 있는 주양육자라면 누구나 겪는 일일 것이다. 특히 남편이 간혹 풀타임 출퇴근에 회식까지 연달아 있으면 이틀만 해도 나도 너무 피곤하고, 또 고립감을 느낀다. 그 고립감이란 그냥 단순히 혼자 있어서 심심하다가 아니라 어린아이와 어디 무인도에 있는 느낌이었다. 산후우울이 심할 땐 아이를 데리고 야생에 버려진 것 마냥 뭔가 할 줄 모르는데 위협으로부터 나 혼자 지켜야 하는 그런 완전한 고립감이 들었다.


연구자는 이를 "단순한 역할 수행의 변화가 아니라, 자아 정체성의 해체와 재구성의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이 구절이 나의 머리를 때리는 듯했다. 내가 지금 이렇게 혼란스러운 게 자아정체성이 해체되기 때문이었구나. 기업교육을 배울 때에도 새로운 걸 배우는 것보다 어려운 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지식을 깨는 것이며, 더 어려운 것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근간의 가치관을 깨는 것이라고 말한다. 내가 가지고 있던 가치관이 많이 깨지고 새로운 가치관이 자리 잡는 과정. 이렇게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지고 나라는 세계도 이렇게 성장해 가는 거라고 생각이 들었다.


박사과정은 나에게 또 다른 도전이었지만, 동시에 자신의 삶을 다시 설계하고 교사로서의 정체성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기회였다. 학업을 통해 나는 단순한 직업인으로서의 교사가 아닌, 학문적 연구자로서 자신의 경험을 분석하고 사회적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는 새로운 정체성의 확립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논문의 구절이 내가 학위를 시작했던 이유였다. 단순 직업인으로서가 아니라 나의 직업에서 배운 경험을 분석하고 연구적 맥락으로 보고 싶었다. 실제로 일을 할 때에는 이러한 동력이 있었는데 지금은 내가 그 필드에서 일을 멈추다 보니 이 동력이 떨어졌나 보다. 오히려 자꾸 원래 연구하려던 게 아닌 엄마, 육아하는 직장인 같은 인물에 포커싱이 된다. 하지만 복직하려면 오히려 필드를 연구하다가 복직하는 게 낫지 않을까. 다양한 생각이 드는 논문이었다.


오늘의 참고 논문: 장은영. (2025). 산후우울증을 경험한 초등학교 여교사의 교육학 박사학위 취득 여정에 대한 자전적 내러티브 탐구. 학습자중심교과교육연구, 25(13), 313–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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