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것은 없다.

엽편소설인 듯, 대화극인 듯, 사실인 듯, 아닌 듯.

by 에이첼


- 당연하다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봤어.

- 뭔데?

- 이치로 보아 마땅히 그렇다는 뜻의 형용사래. 나는 동사인 줄 알았어. ~하다라서.

- 그런데 그게 뭐?

- 이치로 보아 마땅히 그렇다는 것은 뭐가 있을 것 같아?

-... 아, 몰라. 머리 복잡하게 그런 생각을 왜 해?

- 생각을 해야 할 일이 생겼거든.

- 무슨 생각할 일?


-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서로 아껴주고 서로 생각하고 서로 배려해 주는 사이야. 동의해?

- 당연하지! 아, 이게 이치로 보아 마땅히 그렇다는 거구나.

- 여기서 깨달음을 얻어서는 안 돼.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서로’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 서로?

- 지금 우리는 ‘서로’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사랑하고 아껴주고 생각하고 배려해 주는 사이야.

- 엥? 그게 뭔 말이야. 알아듣게 좀 설명할래? 너는 꼭 이러더라. 쉽게 말하면 될 것을 빙~빙~ 돌려 말해. 난 그게 정말 답답하고 싫어. 그러니까 지금도 앞으로도 직설적으로 말해.

- 알았어. 최대한 직설적이게 말할게. 당연하다는 것은 없다는 거야, 연인사이에는.

- 그러니까 그게 무슨 뜻...

- 최대한 직설적이게 길게 말할 거니까 중간에 끊지 말고 들어줘. 난 중간에 말 끊는 사람 싫어해. 그러니까 너도 말 끊지 마.

- 말꼬리 잡지 좀 마.


- 너는 나를 당연한 사람으로 취급해. 너도 나도 다 일하는 직장인인데 나만 시간 내서 주말에 너를 만나러 여기까지 와. 네가 토요일까지 일하니까 당연히 내가 와야 한다고 생각하겠지. 뭐 그래. 그 정도 사랑하는 사람 만나는데 뭐가 불만이겠어.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지. 서로 사랑하는데 왜 나만 당연히 너한테 와야 하는 거야? 그래서 나는 '서로'라는 말에 집중해 봤어. 그리고 결론이 났지. 우리 사이는 일방적인 사이라는 것.

- 아니, 그건 우리 사이의 거리도 멀고 나는 토요일까지 일하고 너는 금요일까지 일하니까 네가 와주는 게 더 합리적이니까.

- 그래서 지금까지 나만 왔잖아. 너를 보러. 네가 보고 싶어서, 너를 사랑하니까 여태껏 나만 왔지. 그런데 문득 '나만' 마음이 있구나, 싶더라. 1년을 만나면서 단 한 번도 날 보러 온단 말, 거짓말이라도 하지 않았어, 너. 말했다가 진짜 오라고 할까 봐 걱정됐을 테지.

- 아니, 그게 아니고 진짜 내가 시간낼 수 없다는 것 네가 더 잘 알잖아. 그래도 우리 만나서 데이트도 하고 그랬잖아. 항상 고맙게 생각해. 네가 나한테 와준 거. 그렇다고 매번 고맙다 말하는 것도 좀 그렇잖아.

- 매번 고맙다 하지도 않았잖아. 해보고 말하지 그랬어. 고마움이 있긴 했어? 아니 미안함이라도 있긴 있었어? 고맙단 말도 미안하단 말도 넌 하지 않았어.

- 그럼 말을 하지. 왜 고마워 안 하냐, 왜 미안해 안 하냐. 네가 말 안 해놓고 이제 와서 나한테 뭐라고 하는 게 맞아?

- 1년 동안 너에게 고마워, 미안해라는 말을 듣는 것이 내가 너를 보러 오는 이유가 아니었으니까. 1년 동안 몰랐던 거야. 그저 사랑하는 마음에 내가 널 보러 왔으니까.

- 그래. 사랑하는데 그런 것 따지는 게 좀 웃기지 않아? 사랑하면 당연한 거지.


- 사랑은 당연함이란 것이 없어. 서로 사랑하는데 어떻게 이치로 보아 마땅히 그럴 수 있는 일이 어딨어? 너에게 나의 사랑은 당연한 것이지만 나에게 너의 사랑은 없었어. 네가 바쁘고 쉬는 날 없어서 너를 만나려면 나는 최소 한 달에서 길게는 세 달을 기다렸다가 너 시간이 그나마 맞으면 내가 널 보러 여기까지 와야 했어. 아침에 출발하면 오후에 도착하고 너 퇴근하면 저녁에 만나 밥 잠깐 먹고 피곤하다고 너 바로 잤잖아. 그리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집에 일 있다고 나 혼자 두고 가버렸잖아. 내가 돌아가는 것 본 적도 없잖아. 그래서 우리 1년 동안 10번도 안 만났어. 같이 영화 두 편 봤어. 내 생일에 처음으로 네가 서울에 왔어. 지하철 타고 갈 수 있었는데 네가 먼 길 와서 힘들 것 같아 택시를 탔어. 그리고 택시비 내가 냈지. 내가 영화 보여주고 아웃백 가서 내가 계산하고 미리 준비도 안 한 꽃다발, 길거리 지나가다 보이는 곳에서 사자고 그랬지? 그때 개인카드 안 가져왔다며 어머님께 돈 받아서 나한테 계좌이체 해줬잖아. 그래서 꽃다발 내가 결제했었고. 그리고 제일 빠른 기차를 타고 너는 그렇게 떠났어. 미련도 없다는 듯이.


- 야, 오랜만에 만나서 이렇게 피곤하게 그래야겠냐? 안 그래도 일 많고 피곤한데 너까지 왜 그래. 너는 나 이해하잖아. 일부러 그런 거 아닌 거.

- 응. 지난 1년 동안 이해했고 지금부턴 이해 안 해. 그리고 더 이상 당연한 것도 없어.

- 그게 무슨 말이야?

- 헤어지잔 말이야.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