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다리 ; 내가 달리는 이유

학교 과제였던 나의 첫 엽편소설

by 에이첼

12월 31일 금요일, 한 해의 마지막 날이 금요일이라니. 낭만적인 날이다.

나는 올해를 아주 충실히 살아냈으니까, 황홀한 낭만은 그것을 증명해 준다.

오늘이 목요일이 아닌 것이 정말 다행이다.

목요일이었다면 나의 퇴근 루틴인 달리기를 하지 못했을 테니까.

달리기로 마무리하는 한 해는 얼마나 아름다울까.

아침에 눈을 뜬 이후로 퇴근 후 달릴 생각에 흥분이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이따가 눈이라도 내리면 좋겠다.

하얀 눈으로 덮인 아스팔트 위를 달리면 조금 미끄럽겠지만 무슨 상관인가.

다른 세상에서 달리는 기분일 텐데.

넘어져서 피가 날 수도 있지만 하얀 눈 위에 선홍색 피조차도 황홀하지 않을까?

그래도 넘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넘어지면 아프니까.


“초원이 다리는 100만 불짜리 다리!”라고 했던 영화 말아톤은 내가 사랑하는 영화다.

내용은 기억이 안 나는데 이 대사가 나를 위로해 주는 것 같았다. ‘내 다리는 100만 불짜리 다리!’


몇 년 전 교통사고로 오른쪽 다리를 다쳐 장애까지는 아니지만

똑바로는 걸을 수 없는 내 100만 불짜리 다리. 내가 좋아하던 달리기를 영원히 할 수 없을까 봐 겁이 나

혹독한 재활훈련과 나의 엄청난 노력으로 보통 사람들만큼 달릴 수 있게 되었다.

걸을 땐 여전히 절뚝이긴 하지만 달릴 때는 달랐다. 이때만큼 내 다리는 진짜 100만 불짜리 다리이다.


루틴이 된 퇴근 후 달리기만이 나를 숨 쉬게 만들고 심장을 뛰게 만든다.

회사에서의 나는 엑스트라지만 달릴 때의 나는 주인공이다.

오늘도 주인공이 될 시간을 기다리는 중이다. 회사에서 내가 하는 일은 보통 간단한 업무보조이다.

간혹 직원들의 발에 걸려 넘어져 비웃음을 살 때도 있고 다리를 절뚝이기에 보조가 늦어져서 많이 눈치를 보지만 간단한 일이라도 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하려고 노력 중이다.

노력이란 그런 것 같다. 인내심의 끝에 기어코 닿는 일.


보통 월, 수, 금 퇴근 후에 달리기를 한다.

생각 같아서는 매일 뛰고 싶지만 한번 뛰고 나면 다리에 무리가 가서 쉬지 않으면

그나마 월, 수, 금도 뛸 수가 없다. 달릴 수 없는 나는 상상하고 싶지 않다.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이 가득할 때가 달릴 때니까.

특히 내가 정한 피니시라인을 지나면 희열감이 온몸에 퍼져 파닥파닥 뛰는 생선처럼 심장이 팔딱팔딱 뛴다.

시계는 오후 4시 14분을 조금 넘기고 있다.

아마 오늘은 회사에서 일찍 퇴근할 것 같다.

종무식을 따로 하지 않지만 올해의 일은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바다 씨. 바다 씨는 오늘 퇴근하면 뭐해요?” 내 옆자리 수진 씨가 물었다.

“오늘 금요일이라 달리기 하러 미종천에 갑니다.

올해의 마지막 날에 달리기를 하기 위해 트레이닝복과 러닝화도 구입했습니다.

트레이닝복은 상의는 파란색, 하의는 검은색이고 러닝화도 올 블랙입니다.

바람막이도 구입했는데 올 블랙이라 러닝화와 아주 잘 어울립니다.”

신이 나서 이야기하다 보니 오늘 입을 트레이닝복까지 자랑을 했다.

그리고 수진 씨를 쳐다보았다. 수진 씨의 얼굴이 약간 일그러진 것 같았다.

“아……. 네……. 달리기 잘하세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서둘러 겉옷과 가방을 챙겨 달아나듯 나가는 수진 씨의 뒷모습을 보니

불쾌했지만 뭐 신경 쓰지 않겠다.

오늘 나의 기분을 망칠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으니까.


회사 건물을 빠져나와 길거리에 들어서니 여기저기 오가는 사람이 많다.

자리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니 회색 구름이 잔뜩 몰려와있다.

정말 눈이라도 올려나.

조금 쌀쌀하지만 달리면 온몸이 온천에 앉아 있는 것처럼 따뜻하게 데워질 것이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날씨다.

지금부터 달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참을 것이다.

참다가 참다가 미종천에 들어서면 미친 듯이 달릴 것이다.

기분이 너무 좋아 머리가 폭발해 버릴 정도의 느낌을 받고 싶다.


많은 사람들을 태운 지하철이 역 안으로 들어왔다.

나의 몸이 구깃해지는 느낌이었지만 어쩔 수가 없다.

사람들과의 많은 부딪힘은 나를 정말 힘들게 한다.

특히 내 오른발이 자꾸 밟힐 땐 참을 수 없이 화가 나

누구라도 붙잡고 해코지하려고 할 때쯤 미종천에 가까운 역에 도착한다.

후. 조금만 더 멀었더라면 정말 죽였을지도 몰라.

나의 달리기 장소는 나의 기분을 다독여줄 수 있는 적당한 거리에 있어서 정말 좋다.


지하철에서 내려 계단을 올라가 카드를 찍었다.

역을 빠져나가 100m쯤 직진하면 공공주차장이 나온다.

집 주변 골목에는 주차할 곳이 없기도 하고 달리기를 할 때 옷을 갈아입으면

소지품을 둘 곳도 마땅치 않아서 공공주차장에 월주차를 한다.

마침 내일 교외로 드라이브를 할 일정도 있어서 차에 소지품을 두고

달리기를 마치고 집까지 뛰어갈 생각이다.


주차장 옆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차에 소지품을 두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차 안에 둔 검은색 모자와 장갑을 끼면 준비가 끝난다.

차문을 잠그고 바람막이 주머니에 핸드폰과 차키를 넣고 지퍼를 올린다.

그리고 가볍게 목부터 다리까지 스트레칭을 해준다.

좌우로 목을 스트레칭을 하며 주위를 둘러본다.

날씨는 흐리지만 춥지 않아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미종천 주변에서 러닝을 한다.

귀여운 강아지들도 따뜻한 옷을 입고 산책을 한다.

주변 구경을 하며 스트레칭을 하면 어느새 몸은 가볍게 달아올라 달리기 좋은 컨디션이 된다.

나는 그때부터 주차장 옆 미종천 러닝코스로 가는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출발선에 서서 호흡을 한번 후, 내쉰 후 달리기를 시작한다.

달리면서 페이스를 보기 위해 워치를 켜는 것도 필수다.

미종천을 따라 왼쪽에는 얕게 천이 흐르고

오른쪽에는 가로수들과 가로등이 교차하며 키 재기를 하고 있다.

달리다 보면 점점 호흡이 차올라 하얀 입김이 눈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데

그때는 마치 판타지 세계로 들어온 기분이 들어 설렘을 느낀다.

오늘따라 러닝코스의 바닥이 적당히 단단해 달리기에 편안함을 느낀다. 점점 기분이 좋아진다.


오늘의 목표는 미종천 10km를 달리고 집 근처 650m까지 가서 피니시라인을 통과하는 것이다.

내가 달리는 코스의 출발선에는 달리는 사람도 많고 가로등이 많아서 밝다.

2km쯤 지나다 보면 내가 달리기를 할 때마다 보이는 할머니와

갈색의 모자가 달린 옷을 입은 푸들이 느릿한 걸음으로 산책을 한다.

푸들의 털 색깔도 갈색인데 옷까지 갈색이라 귀여움이 두 배가 되는 모습을 보면 나까지 기분이 좋아진다.

그래서 내가 달리는 구간 중에 2km 지점을 힐링 구간이라고 이름 지었다.

5km가 얼마 남지 않았다. 이때는 불쾌한 기분이 들 때가 있는 곳이다.

벤치에 앉아 핸드폰을 보며 담배를 피우는 인간들이 모여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담배연기를 입으로 뿜어내는 모습을 보면 미종천의 얼음장 같은 물을 그 인간들에게 끼얹고 싶지만

이 날씨에 반바지를 입고 나온 그들의 다리에는 문신이 가득하게 있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기에 모른 채 지나친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8km가 가까워져 오면 미종천 러닝코스가 제법 어두워진다.

가로등도 드문드문 있는 데다가 여기까지 러닝 하는 사람들도 적어지기 때문이다.

뒤에서 나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치는 저 사람. 그 바람에 살짝 삐끗해서 균형을 잃을 뻔했다.

아무것도 나의 기분을 망칠 수 없는데.

내 어깨를 친 줄도 모르고 오직 달리기 삼매경에 빠진 저 사람이 오늘의 목표다.

오늘 같은 날 저 사람을 제낀다면 이 더러웠던 기분이 째지겠지.

잠시 멈춰 다리 상태를 체크한 찰나에 그 사람이 사라졌다. 허무했다. 목표물을 놓치다니.

이번 해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싶었는데. 갑자기 힘이 쭈욱 빠져버린다.

10km가 끝나는 곳까지 달렸지만 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10km가 끝난 미종천에서 집 방향으로 빠져나갈 때쯤 하늘에서 하얀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조금 허무했던 기분도 잠시, 눈이 내리니 내가 생각한 대로 되는 것 같아서 내가 신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느낌 정말 좋다. 반드시 피니시라인은 놓치지 않을 것이다.

500m쯤 달리다 보면 편의점이 보이는데 거기에서 마침내 목표물이 나타났다.

역시, 오늘은 완전 러키인 나의 날이다.

집에 가기 전에 피니시라인 통과하면서 저 사람을 제끼면 오늘의 목표는 완벽하게 성공한다.

기쁜 마음으로 서서히 속도를 내며 달린다.

100m를 지나고 목표가 손에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 저 사람이 있다.

심장이 점점 쿵쿵거리며 뛰는데 그 소리가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들을 것만 같다.

20m쯤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가는 사람을 따라 나도 골목 방향으로 향한다.

골목을 도니 우리 집이 보인다. 그리고 저 사람도 보인다. 제칠 수 있다.

그 순간 나의 다리에는 우사인 볼트가 빙의했다. 이제 10m, 5m, 2m, 바로 지금.


이 사람과 나는 어느새 뒤엉켜있다.

나는 재빨리 목표물 위에 앉아 나의 피니시라인인 이 사람의 목을 꽉 옥죄기 시작했다.

이 사람의 손이 나의 손을 붙잡고는 힘을 내어 떼어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센 힘에 내 손의 힘이 조금씩 빠졌다. 하지만 이 순간을 놓칠 수 없다.

오늘은 12월 31일 금요일이고 너는 내 목표물이고.


다리가 이런 덕분에 나의 팔 힘은 누구보다 세졌다.

자세를 제대로 잡고 나의 온 무게로 목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으.. 흑.. 악.. 억..” 눈이 터져 나올 것 같은 목표물의 얼굴이 점점 빨개지면서 이내 움직임이 점점 사그라들었다. 이 때다. 나는 주머니에 가지고 있던 칼로 목표물의 목에 피니시라인을 그었다.

잠깐 내린 눈이 쌓여 길거리는 하얗고 이 사람의 목에서는 선홍색의 피가 흐른다. 황홀하구나.

나는 칼에 묻은 피를 옷에 쓰윽 닦고는 내가 온 방향으로 다시 달린다.

눈 때문에 내 발자국이 나를 따라왔기 때문이다. 골목골목을 왔다 갔다 하며 달렸다.

큰 거리로 나오니 공공주차장이 보인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발자국에 내 발자국을 숨기며 차로 향해 다시 옷과 신발을 갈아 신었다.

트레이닝복과 신발은 손에 들고 걷는다.

편의점에 들어가 맥주와 간단한 주전부리, 간식들을 챙겨서 나온다.

비닐봉지 안에 트레이닝 복과 신발을 함께 넣고 아까와는 다른 골목으로 우리 집을 향한다.

올해의 마지막 날, 나의 목표를 이루고 끝낸 날. 나만을 위한 메달이 밤하늘에 떠 있었다.

오늘 밤 주인공은 나였다. 내년에도 나는 목표를 이룰 것이다. 그렇기에 달리기를 계속할 수밖에 없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에 도착했다.


띠-띠띠-띠-띠-띠띠. 휘리릭. 바보야, 오빠 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