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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gette J Sep 27. 2022

후회

무더운 어느 여름날 비처럼 흐르는 땀이 눈 주변을 찌르고 흙먼지가 가득한 산길을 달렸다 훈련 중이었던 나의 바지춤 안에서 휴대폰 진동이 느껴졌다 평소 같은 상황이면 무시했을 텐데 그때는 왜인지 전화를 받고 싶어졌다 액정에 비치는 고향의 지역번호 스팸은 아니겠지 하면서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여기 xx 병원인데요. xxx 님 보호자 되시죠?”

“검사 결과 대장암용종이 발견되었어요. 언제 올 수 있으시죠?“

"오늘 저녁이나 내일까지 가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숨이 턱 막혀 버렸다. 땀인지 눈물인지 나도 모르게 뒤범벅이 되었지만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병원에서 전화 왔는데 어떻게 된 일이야?“

”사실 며칠 전 아버님이 영양실조로 쓰러지셔서 응급실에서 전화가 왔는데 마침 마지막 통화한 사람이 나라서 알게 되었어 그리고 통화하며 입원시키고 검사도 하고 했는데 검사 결과를 내 번호가 아니라 비상 연락망으로 알려준 것 같아“ 아내와 통화를 마치고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부모님에 대한 원망과 화가 솟구쳐 올라오기 시작한다


어머니는 40살에 나를 힘들게 낳으시고 반쪽 편마비로 불편한 삶을 살아오셨다 10년 뒤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다던 어머니는 그해 심장판막 수술을 하셨다 하지만 몇 년 뒤 다시 자궁경부암 수술까지 하시더니 아들이 성인이 되어서는 쇠약해지시더니 끝내 치매까지 오셨다 어머니 만으로 충분히 감당하기 너무 힘들었는데 이제 아버지까지 온전히 내 몫으로 느껴진 것 같았다


아픈 내 자식을 키우는 일은 엄청난 돈과 심리적 압박감으로 하루하루 너무 힘들고 지친다. 여태껏 아무것도 나한테 해준 거 없는 부모였어도 원망 한번 안 했는데 이제는 피할 수 없는 가혹한 시련을 선물해 준 아버지가 너무 미웠다. 또 그렇게 직장에서 죄인처럼 우리 가족의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연가를 받았다 다음날 병원에서 아버지를 만났다 하지만 짜증과 퉁명스러움은 제어가 되질 않아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괜찮은데 왜 왔어?“라고 말씀하셨지만 아들이 반가운 것 같은 눈치였다


영양실조로 쓰러지셨지만 혹시나 다른 병이 있을 수 있었다 그래서 여러 가지 검사를 진행하던 중에 암조직이 발견되었다 다행히 초기라 수술 한 번에 제거할 수 있다고 한다. 세상에!!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영양실조로 쓰러지셨을까? 혼자 밥도 못 챙겨 드시나? 시간이 갈수록 내가 처한 상황과 스스로를 돌보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화가 점점 많아졌다


수술은 다음날 바로 진행했고 잘 마쳤다 지루한 병원생활이 며칠간 지속되고 아버지는 답답한

병실보다 조금 넓은 휴게실에 자주 앉아 계셨다

”제재소 운전기사 일을 그만두어야겠어.“

”그럼 퇴원하시면 뭐 하고 싶으신 거 있으세요?“

”일단 울산에 있는 네 고모들을 찾아보고 싶다.“

”고모들 사는 곳이랑 연락처는 아세요?“

”연락 안 한 지 오래돼서 모르지. 그래도 그 동네 가보면 알아볼 수 있어“

”그런 게 어디 있어요? 헛걸음하시지 말고 먼저 그쪽 행정복지센터에 알아볼게요“

”정말 한번 가보고 싶구나.“

”알았어요.“

알았다고 대답을 하고 현실적인 마음의 외침이 나를 고뇌에 빠뜨렸다

"차도 없고 돈도 없는데 어떻게 하지?" "렌트해야 되나? 모르겠다"

그리고 평소 나에게 부탁이란 걸 하지 않았던 아버지가 또 다른 바램을 나에게 말했다

”아들 집에 한 번도 못 가봤는데, 한번 가보고 싶구나.“

”윤서는 아침 일찍 병원 가서 저녁에 오고 주말도 가서 시간이 없어요 그리고 저도 매일 출근하는데 아무도 없어서 안돼요.“

윤서를 돌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힘든 아내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 딱 잘라 거절했다.


어머니 나이 40세에 나를 낳으시고 온갖 굳은 일을 하시다 큰 사고까지 나셨던 아버지 얼굴이 다 망가졌어도 성형이란 걸 생각지도 못하고 험상궂은 얼굴로 하루하루 가족을 위해 살아오셨던 아버지 하지만 가끔 우리 부모님을 보고 ”할아버지 할머니 아니야?“라는 소리를 했던 친구들 사이에서 부모님을 부끄러워하며 나는 사춘기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어머니의 건강과 집안 경제사 정도 나아지나 싶더니 IMF로 우리 집은 정말 폭삭 망했다


그 이후 지금까지 암흑기를 벗어나지 못했던 부모님과 나는 능력도 돈도 아무것도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부끄러움과 남들처럼 평범하지 못했던 삶에 피해의식이 강했다. 반면 지금도 젊은 장모님과 친구처럼 지내며 화목한 가정에서 걱정 없이 자란 성장 배경의 간극은 나에게 늘 아킬레스건으로 다가왔다

별 볼일 없는 집안에 나 하나만 바라보고 23살에 고향 떠나 시골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한 아내와 그 결혼을 허락해 주신 장모님께 늘 감사하면서도 동시에 우리 가족 이야기에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바람을 단호하게 자르고 며칠이 지났다 그래도 아들이라 마음이 쓰였는지 저번에 직장 동료가 터키를 다녀온 이야기를 하신 게 생각났다 터키가 엄청 신기하고 재미있는 나라라고 말씀하셔서 퉁명스럽게 그럼 언제 한번 같이 가자는 제안에 본인은 그런 여행이 싫다고 하시며 반어법으로 말씀하셨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났다

살면서 비행기를 한 번도 타보시지 못했던 아버지께 효도해 드리고 싶은 마음에 여행을 제안하였다

”퇴원하면 제주도 여행 한번같이 다녀와요.“

”피곤해서 집에서 쉬고 싶다.“

”그래요.. 그럼.“

큰마음 먹고 차편도 비행기도 숙소도 알아보고 말씀드렸지만 세 마디로 부자의 대화는 끝이 났고 나는 더 이상 아버지를 붙잡지 않고 여행 계획은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몇 년이 지난 후 아버지는 이미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아내와 운전을 하고 있는 도중에 갑자기 예전 여행이야기를 하며 떠오른 감정이 큰 한숨과 탄식으로 내뱉어졌다

”오빠 무슨 일 있어?“

”아버지와 여행 한 번 못 간 거 그리고 집에 한번 모시지 못했던 일이 불쑥 생각나서..“

”어쩔 수 없지 뭐..“

그렇게 답답한 마음과 길고 긴 한숨은 차에서 내릴 때까지 지속되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굉장히 친절해서 우리 집에 손님이 놀러와 극진히 대접하고 주변 소개도 해준

즐거웠던 기억이 아버지의 말씀을 귀담아듣지 않고 무시했던 그때를 다시 되새김질할 때면

무거운 마음으로 내게 다가온다


”이번 한 번만 아버지와 여행 가자 주말에 우리 집에서 주무실 수 있게 모시자“라고 아내에게 했으면 반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 번쯤 아이 병원에 가지 않고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했으면 되었을 텐데 괜한 자격지심으로 아내 눈치만 보다 실행에 하나도 옮기지 못했다. 부모님의 품과 숨결을 기억할 수 있는 고향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자리 잡은지 10년이 지났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부모님과의 추억은 하나도 떠올릴 수 없다 부모님 두 분이 나를 떠나가고 하루하루 어떻게든 버티며 살아오고 있지만 문득 떠오르는 답답한 마음과 안타까운 기억이 후회라는 감정인 걸까?

다시 생각해 봐도 오늘도 내일도 나는 정말 나쁜 아들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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