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희미한 어릴 적 시절, 내 눈앞에는 항상 누군가의 뒷모습이 있었다. 당시의 그 뒷모습은 너무나 크고 포근해서 얼굴을 파묻고 편히 기대곤 했다. 그 뒷모습은 냉혹한 세상의 풍파와 한기를 모두 막아 나에게 따뜻한 온기만을 남겨주었다. 나에게 세상은 그의 뒷모습이 전부였고 그 뒷모습이 곧 나의 세상이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 뒷모습에 기대지 않아도 혼자서 일어서는 법을 배웠다. 홀로 일어서는 방법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그의 뒷모습에서 어깨너머로 보아온 그의 행동을 본보기로 삼아 적당히 따라 하기만 하면 되었으니까. 그렇게 나는 그 뒷모습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아니. 나란히 했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홀로 일어난 뒤로는 지독한 시련과 성장의 반복이었다. 세상을 살며 겪는 시련은 나를 끈질기게 괴롭혔고 한 가지 시련을 이겨내면 또 다른 시련이 찾아와 나를 괴롭혔다. 그때마다 그는 옆에서 시련의 극복방법을 찬찬히 알려주었다. 그렇게 반복되는 시련은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더 튼튼한 존재로 성장시켜 줬다.
이윽고 찾아온 인생의 전성기. 어느새 내 주변엔 친구, 동기, 선후배 등 살아가면서 만난 다양한 인간관계가 생겨났고, 항상 나의 옆에 있던 그는 여러 사람들에게 밀려나 멀찍이 떨어져서 느리게 따라왔다. 하지만 성큼성큼 걷는 나의 걸음걸이는 그가 따라오기엔 너무 빨라져 버렸다.
나는 그를 뒤로한 채 가까운 친구들만 데리고 앞만 보며 달렸다. 느려터진 그의 발걸음에 속도를 맞춰야 할 이유를 더 이상 느끼지 못했다. 멀어지는 그로부터 뭐라 소리치는 외침을 들었지만 더 이상 그로부터 배울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해 귀를 닫고 그저 앞만 보고 뛰었다.
달리는 것은 기분 좋았다. 나를 옭아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그저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자유를 만끽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않았다. 같이 달리던 사람들은 본인들의 갈길을 가겠다며 하나둘씩 떠나가 버렸고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나는 혼자서 달리고 있었다.
그러다 땅에 박혀있던 돌부리에 발이 걸려 크게 넘어지고 말았다. 속도가 빨랐던 만큼 한참을 굴렀고 너무나 큰 고통이 나를 덮쳤다. 온몸의 여기저기가 까지고 부러지며 피가 흘렀다. 다시 이전처럼 뛸 수 없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였지만 주변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삶이 바빠 내쪽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쓸쓸한 고독감이 느껴졌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상처가 나을 때까지 천천히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달릴 때에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풍경이었던 주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그들이 대부분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였다는 사실이었다. 그곳에는 어린아이를 등에 업고 가는 사람, 남녀가 나란히 서서 손을 마주 잡고 걷는 사람, 늙고 어린 여러 사람들이 무리 지어 가는 사람들 등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의 얼굴에는 항상 미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제야 내가 지금 혼자라는 것을 실감했다. 누군가의 따뜻한 손길이 그리웠다. 하지만 쉴 틈 없이 달려온 내 주변엔 나를 위해주는 내 편은 더 이상 아무도 없었다. 눈물이 흘렀다. 절망감에 더는 한 발자국도 내딛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그 자리에서 얼마나 울었을까. 쭈그리고 앉아 고개를 파묻고 울고 있는 내 등에 누군가가 살며시 손을 갖다 대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사람의 따뜻한 온기. 나는 화들짝 놀라 뒤돌아 보았다. 그곳에는 이전과 달리 머리는 하얗게 물들고 등은 구부정하게 굽어버린 그가 서있었다. 그의 다 찢어진 낡은 신발은 나를 따라잡기 위해 그동안의 여정이 얼마나 고단했는지 말해주었다. 그는 은은하게 웃으며 얘기했다.
"그러게 뛰지 말랬잖아. 다칠라."
나는 이전보다 작아진 그를 끌어안으며 펑펑 울었다. 내가 인생의 전성기에 취해 달리기 시작할 무렵, 뒤에서 소리치던 그의 말은 다름 아닌 내가 뛰어서 다칠까 봐 걱정한 염려의 목소리였다. 처음부터 나의 가장 가까운 사람은 곁에 있었다.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많은 시간을 보내버린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후회와 그 긴 시간을 함께하지 못한 아쉬움과 죄송스러움이 밀려왔다.
"정말 죄송해요."
그 말을 끝으로 그의 손을 잡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제는 다시 잡은 이 손을 놓지 않을 것이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기 전까지.
내 곁에 언제나 나의 편이 되어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든든하고 행복한 일입니다. 하지만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지 말자'는 말이 있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존재의 가치를 잊고 실수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죠.
이 글에서 나타낸 '그'는 누군가에게 '아버지'일 수도 '어머니'일 수도 또는 '배우자'일 수도 있습니다. 어버이날을 기념하며 묵묵히 내 곁을 지켜준 그 존재에게 고맙다고 감사하다고 마음을 전달하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