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해 선을 긋다
나는 오래도록 누군가의 기댈 곳이 되어왔다. 그들은 무언가가 무너질 듯 흔들릴 때, 어김없이 내게 와서 기대었다. 나는 괜찮다고 말해주었고, 다 들어줄 수 있다고 했다. 감정은 나눌수록 가벼워진다며, 그들의 무게를 대신 안았다. 처음엔 그것이 인간관계라는 이름의 온기인 줄 알았다. 서로 기대고, 서로 지지하는 일이 삶의 정석인 줄 알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되었다. 나에게 기대 오는 사람들이 내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나는 누군가의 어깨가 되어주었지만, 내 어깨를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나는, 일방적인 ‘기댐’의 구조 속에서 침묵과 피로와 고립만을 견디며 살아야 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관계를 ‘감정 노동’이라고 부른다. 타인의 감정을 다독이고 수용하면서, 자신의 감정은 억제해야만 하는 상태. 이는 직업적인 상황뿐 아니라 일상적인 인간관계에서도 충분히 발생한다. 우리는 누군가의 기댈 곳이 되어주며, 자연스럽게 자기감정을 거세당한다. 그 사람은 내게 모든 걸 털어놓지만, 나는 그 사람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못한다. 말하는 순간, 그 관계는 역전되고 불안정해진다. 나는 무너진 사람이 아니라, 무너지는 사람을 지탱하는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요구받는다. 그것이 '좋은 사람', '믿을 만한 사람', '의지가 되는 사람'의 사회적 역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나 버틸 수 있는 한계는 있다. 타인의 짐을 지는 동안, 나 자신의 감정은 방치되고, 그 방치가 반복되면 결국 무력감과 소진이 찾아온다. 나는 내가 감정적으로 마모되고 있다는 것을, 한참 뒤에야 깨달았다.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이란 “타인을 돌보되, 자기 자신을 돌보는 행위와 균형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행하는 사랑, 혹은 우정, 혹은 헌신은 대부분 일방향적이다. 특히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거나, 감정을 억제하는 방식으로 살아온 사람들은 ‘기댐’이라는 관계에서 언제나 받는 사람이 아니라 주는 사람이 되기를 강요받는다. 어릴 적부터 ‘착하다’는 말을 듣고 자란 아이들은 대개 그러하다. 그들은 거절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누군가의 눈치를 살피며 자신의 감정을 뒤로 미룬다. 그러다 어느 순간, 타인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어버린 자신을 발견한다. 그런 관계 안에서는 ‘진짜 나’는 사라지고, ‘기댈 곳 역할만 하는 나’가 남는다.
나는 점점 그런 나를 지우고 싶어졌다. 피곤했다.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을 경계하게 되었고, 누군가가 다정하게 말을 건네면 본능적으로 '이 사람도 곧 나에게 기댈 것이다'라는 피로감이 앞섰다. 사람들의 기대는 곧 책임이 되었고, 그 책임은 언제나 감정적으로 나를 잠식했다. 그들은 나를 의지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그들에게 기대본 적이 없다. 나는 늘 의연해야 했고, 침착해야 했고, 그들의 울음을 받아주며 울지 않아야 했다. 이 구조가 지속될수록 나는 점점 감정에 무감각해졌다. 기쁜 일도, 슬픈 일도 마음속에서 바닥을 치지 못하고 사라졌다. 사람의 마음은 기대어야 깊어진다고 하지만, 나는 그런 연결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더 이상 내 마음을 그런 식으로 내어주고 싶지 않았다.
한병철은 『투명사회』에서 관계의 과잉 노출과 투명함이 오히려 인간의 진정성을 해친다고 비판했다. 모든 것을 공유하고, 모든 것을 드러내는 관계가 오히려 사람들을 감정적으로 소모시키고 있다고. 나는 이 문장을 읽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댈 곳이 되어준다는 것은 때로 타인에게 나를 과잉 노출하는 일이었다. 나는 그들의 고통을 들어주는 동시에, 내 감정의 경계를 허물고 있었다. 그들에게 안전함을 주기 위해 나 스스로는 불안해졌다. 감정적으로 투명한 척하면서, 속으로는 점점 고립되어 갔다. 내 안의 말들이 쌓여만 갔고, 말할 곳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이제는, 기댈 곳이 되지 않기로.
이 결심은 다정함의 포기가 아니다. 오히려 진짜 다정해지고 싶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다. 나를 소진시키면서까지 누군가를 감싸는 일은 더 이상 ‘선함’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파괴의 한 형태일 수 있다. 나는 더 이상 타인의 감정을 대신 살아내고 싶지 않다. 누군가의 감정에 과잉 공감하고, 그 감정을 내 몸처럼 받아들이는 일에서 벗어나고 싶다. 나는 누군가의 ‘기능’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로 살아가고 싶다. 기댈 곳이라는 말이 주는 따뜻함은 이해하지만, 그 말이 암묵적으로 요구하는 돌봄과 책임의 무게를 더 이상 짊어지고 싶지 않다.
이제 나는 내가 먼저 나에게 기댄다. 내 감정이 올라올 때, 타인을 찾기보다 내 안에서 머물기로 한다. 외로움이 올 때, 누군가를 향해 팔을 뻗는 대신 조용히 앉아 그 감정을 지나가게 둔다. 나는 내 슬픔의 무게를 나 자신이 안아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것이 어쩌면 가장 건강한 ‘기댐’ 일 것이다. 심리학자 윈닉은 자기애적 상처를 극복하는 첫 단계는 ‘자기의 부모가 되는 것’이라 말했다. 나는 내가 미처 기대지 못했던 어른이 되어, 지금의 나를 돌보고 있다. 더 이상 누군가의 감정을 대신 살아내지 않고, 내 감정을 살 수 있는 삶을 선택하고 있다.
그러니 나는 이제 기댈 곳이 되지 않기로 했다. 그 말은 누군가에게 차갑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나 자신에게는 한없이 따뜻한 선언이다. 나는 이제 내 감정에 정직해지기로 했고, 내가 감당할 수 없는 타인의 무게에 대해서는 분명히 선을 긋기로 했다. 그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진짜 나와 타인의 사이에 건강한 거리를 만드는 일이다. 그 거리가 있어야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고, 그 거리 안에서 우리는 서로를 온전히 존재로 마주할 수 있다. 나는 타인의 기댈 곳이 되지 않음으로써, 비로소 인간다운 관계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기댈 곳이 되지 않기로 했다는 이 말은 결국, 내가 나로 살아가기 위한 선언이다. 감정의 쓰레기통도 아니고, 완벽한 조력자도 아닌, 그냥 나. 부족할 수도 있고, 무너질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의지할 수도 있는 사람. 이제 나는 그런 나를 받아들이기로 한다. 누군가가 기대고 싶어 한다면, 나는 내어줄 수 있는 만큼만 내어주고, 내 선 안에서는 거절하는 법도 배운다.
그 거절이 나쁘지 않다는 것, 오히려 관계를 더 단단하게 만든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더 이상 감정의 무게를 모두 짊어지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나의 중심을 잃지 않으면서, 함께 걷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기댈 곳이 아니라, 나란히 걷는 동료. 그것이 내가 지향하는 인간관계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