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예프리 yefree Jan 21. 2023

통장에 수상한 돈 50만원이 입금되었다

돈과 욕을 동시에 얻는 방법


‘이게 뭐야 도대체…?’


1원

1원

1원

1원

1원


누군가 나의 계좌로 1원을 계속해서 보내왔고, 거기엔 메모도 같이 적혀있었다.





이게 다 무슨 상황인지 파악을 하는 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생각지도 못한 순간을 맞닥뜨렸을 때, 생각보다 나의 뇌가 처리속도가 빠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돈을 실수로 잘못 송금한 사람은 글자수 제한이 있는 메모를 이용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나에게 신호를 보내려 하고 있었다.

이 디지털 시대에 마치 한 자 한 자 소중히 전보를 치듯, 나에게 수신호를 보내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때 이 사람의 전화번호로 추정되는 메모를 하나 발견했다.

글자수 제한 때문에 마지막 한자리 수는 없는 상태로 찍혀있었다.


010 XXXX XXX


일단 이 사람에게 먼저 전화를 해야겠다는 생각부터 들어 마지막 숫자를 맞추기 위해 0부터 눌러보기 시작했다.


010 XXXX XXX0 - 뚜루루, 신호음은 가지만 전화를 받지 않는다

010 XXXX XXX1 - 한 여성분이 받았지만, 내가 찾는 사람은 아니었다.

010 XXXX XXX2 - 시끄러운 곳에 있는 듯한 아저씨께서 전화를 받으셨다. 죄송합니다, 제가 전화를 잘못 걸었나봐요.

010 XXXX XXX3 - 뚜루루 뚜루루 뚜루루 오랫동안 전화를 안 받길래, 끊으려 하는 순간


한 아주머니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혹시 OO 은행 OOO 분 맞으신가요?

(지금 보니 내 멘트가 더 보이스피싱스럽다.)


네, 그런데요.


아, 네 저는 음,, 어떻게 설명드려야 하지, OO은행 사용하고 있는 …


아~빛나리씨세요?


아! 네, 맞아요. 50만원 잘못 송금했다는 메모보고 연락드렸어요.


아, 네.


(뭐지, 이 놀랍도록 차분한 말투는? 그렇게 나에게 1원씩 보내던 사람이 맞나?)


이거 돈을 어떻게 되돌려 드리면 될까요?


그럼 제가 계좌번호 불러드릴 테니 이쪽으로 다시 보내주시겠어요?


네네, 불러주세요.

그런데 만약 제가 이 메모를 못 봤더라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셨어요?

(진심으로 궁금해서 질문했다. 돈이 잘못 입금된 건 1월 4일인데 그때까지 꿈에도 생각 못하고 있다가 약 1주일이 지나서야 확인을 했기 때문이다.)


아, 안 그래도 오늘 OO은행 홈페이지 챗봇에 문의 남겨놨어요.


아, 그러시구나. 무튼 제가 이쪽으로 송금하고 문자 넣어드릴 테니까

제 은행에서 또 번거롭게 전화 오는 일 없도록 상담 접수는 취소 부탁드릴게요.

제가 지금 일하고 있는 중이어서요.




평소에 나는 일이 생각나면 바로바로 처리하는 편이라, 전화를 끊자마자 은행 어플을 켰다.


계좌를 입력하고 보내려는데 <<계좌 잔액 부족>>이라는 문구가 뜨면서 실패했다.

(지금 생각하니 계좌에 돈이 없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던지!!!!)


그래서 다른 통장 어플에서 계좌를 입력하려는 순간,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쎄한 느낌이 들었다.


통화 중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의심이 대차게 고개를 내민 거였다.


이상하리만치 차분한 목소리를 가진 상대방이었다.

나였으면 그렇게 찾아 헤매던 통장 주인이랑 드. 디. 어 연락이 되었다면, 별 호들갑을 다 떨었을 것 같다.

아니면 최소한 왜 이제 연락을 했냐고 화를 낸다던지, 또는 드디어 돈을 받을 수 있다는 안도의 한숨이라던지 말이다.

그런 감정의 기복 하나 없이 마치 고요한 호수 같은 느낌을 받았기에, 영 찝찝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잠깐만, 이거 보이스피싱일 수도 있는 거 아냐? 무턱대고 돈을 보내줘도 되나?’


허구한 날 티비에선 보이스피싱 뉴스가 들려오고, 보이스피싱범들의 수법은 나날이 교묘해지는 요즘 아닌가.

당장 네이버에 ‘잘못 송금 사기’를 검색했다. 순간 나오는 결과를 보고 소름이 돋았다.




와, 나 하마터면 사기당할 뻔했구나.

정말 아무 의심도 안 하고 바로 돈 보내줄 뻔했는데, 그전에 검색을 해본 게 정말이지 천만다행이었다.


회사에서 다른 분들에게 이 사실을 말해주니 돈 바로 보내주면 큰일 난다고, 바로 112에 신고부터 하라고 했다.


뉴스에서나마 간접적으로 듣던 보이스피싱의 소용돌이에 내가 한 중간에 서있구나.


떨리는 마음으로 112를 누르자, 인자한 목소리의 경찰관이 받으신다.


“제 통장으로 누군가 돈을 잘못 송금하고, 이체를 해달라 하는데 아무리 봐도 영 의심스러워서요. 이거 보이스피싱일 수도 있을까요?”


“아이고, 그렇죠. 바로 보내시면 큰일 납니다. 요즘엔 워낙 보이스피싱 수법이 정교해져서요. 그런데 이 건은 해당 은행으로 전화하셔서 관련 가이드를 받으셔야 할 것 같네요.”


만능 슈퍼맨일 것 같았던 경찰에게서, 약간은 싱거운 대답을 들으니 김이 빠졌다.

결국 자신은 잘 모르겠으니 해당 은행에 전화를 하라는 대답이 공권력에 대한 나의 신뢰를 한풀 꺾이게 했다.


뭐, 경찰도 잘 모를 수 있지.

곧바로 은행 고객센터로 전화를 걸었다.


내 앞 대기인원 수만 자그마치 7명, 내 소중한 점심시간을 수화음만 듣고 날릴 수 없었다.

제발 빨리 받아주세요.


‘계속해서 기다리시겠습니까?’ 란 기계음을 열댓 번 듣고 나서야, 진짜 사람의 목소리가 나와서 얼마나 반가웠던지


그 상담원의 말씀으로는 보통 돈을 잘못 송금할 경우, 직접 본인이 해당 은행에 사고 송금 신고 접수를 하면, 두 은행이 중재를 서준다고 한다.

이렇게 개인 고객끼리 직접 거래를 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고 했다.


어찌 되었든 내가 할 일은 이제 하나였다.

그 사람에게 다시 연락을 해, 직접 은행에 사고 송금 접수를 하라고 얘기하는 것이었다.

어찌 되었든 그 사람도 애타게 50만원을 되돌려 받기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 말이다.


보이스피싱범일수도 있지만 나의 최소한적인 인류애를 발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때까진)

그래도 혹시 몰라 통화녹음 버튼을 누르는 치밀함도 잊지 않았다.





네 안녕하세요. 네 오전에 연락드렸었던 빛나리인데요.


여보세요, 네.


이거 확인을 해보니까 제가 직접적으로 은행 계좌로 입금을 하는 건 조금 리스크가 큰 것 같아서

직접 송금하셨던 은행에 송금 반환 절차 밟으셔서 은행 기관 통해서 중개하면 될 것 같습니다.


…….

(4초간 정적)


(다소 격앙된 말투로)

아니 잘못 송금한 거 뻔히 알고 통장 내역이 있는데 그게 무슨 문제가 된다고 절차를 복잡하게 하면서 그렇게 해요? 인생 참 어렵게 사네.


아니ㅇ


아니 무슨 리스크가 있어요.

50만 원 보낸 저기 뭐냐 숫자 하나 잘못해 갖고서는, 보낸 거 다 연락드리고서는 했는데

저기가 50만 원 받아놓고서는 안 받았다고 그럴까 봐 얘기하는 거예요 지금


(무슨 말을 거의 따발총 쏘듯이 쉴 새 없이 해서, 말할 틈도 찾기 어려웠다)


아니 저기요; 잘못 송금했다고 뉴스 조금만 쳐보셔도 보이스피싱 그런 수법 되게 많이 나와요;

그리고 그쪽이 저한테 잘못 보낸 걸 왜 제가 이렇게 귀찮은 일까지 도맡아서 해야 되는지 모르겠거든요?


어이가 없네



(아주머니, 맷돌 손잡이가 뭔지 알아요? 어이라고 해요. 맷돌을 돌리다가 손잡이가 빠져 그럼 일을 못하죠?

그걸 어이가 없어 해야 할 일을 못한다는 뜻으로 어이가 없다고 하는 거예요. 내가 지금 그래, 어이가 없네? 그건 내가 해야 할 소리라고요!!!)


아무튼 은행 쪽으로 전화하셔서 알아서 하세요.


어 알아서 할 건데, 왜냐하면 네가 줄 생각이 없어 보이거든


50만 원 갖고서는 잘못 보낸 거 뻔히 하는데 가만히 있고 문자를 그렇게 며칠간을 보내도 연락도 없고 하더니


내가 이제 저기 뭐냐 반환금 신청한다고 이렇게 얘기하니까는 그래서 연락을 주고서는


달라 한적 없지만, 어느새 나는 돈을 부당하게 취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아니, 저기요 아줌마

(무슨 나를 50만원 안 주려고 환장한 사람 취급하길래 얼탱이가 없었다. 진짜로 안 줄 사람이었으면 이렇게 전화를 했겠냐고요)


아줌마라고 하지 마

너 몇 살이야

50만 원 갖고서는 왜 그러는 거야

너 지금 그 며칠 (돈을) 더 쓰면은 좋니?


(아줌마라는 말에 단단히 빡치셨는지, 갑자기 이성의 끈을 놓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이거 녹음 다 되고 있고


내가 그렇게 얘기했는데

내가 며칠이나 너한테 1원짜리 보내면서 연락이 안 되니까 계속 보냈잖아

내가 일주일을 보내니까 이제야 마지못해 연락 준 거잖아!!!


(와, 오랜만에 말이 안 통하는 인간을 만나니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돈 50만원을 못 돌려받을 수 있다는 불안감에 이성이 잠식되어 버린 걸까?)


저기요, 카드 쓰면 앱에서 알림이 어차피 와서 저 평소에 통장 확인 잘 안하구요.

저한테 그렇게 반말 찍찍하지 마세요.


안 해도 이게 오잖아!!!!

문자로 저기 뭐 요즘에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어?


저한테 그렇게 반말 찍찍하지 마시고 다음부터 똑바로 숫자 확인하고 보내세요.


그래 너 참 똑똑해서 좋겠다


알아서 하세요 전 어차피 이미 경찰에 신고해 놨거든요.


수화기에 대고 온갖 저주를 퍼붓는 사람을 두고, 내 정신건강을 위해서 전화를 끊었다.

내가 왜 원치도 않은 50만원이랑 욕을 얻어먹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이상한 게 한둘이 아니었다.


네이버에 ‘잘못 송금’을 치기만 해도, 해당 은행에 바로 전화하면 돌려받을 수 있다는 친절한 지식인들의 가르침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런데 저 사람은 나에게 일주일 동안 계속해서 1원씩 보내면서, 제발 저 통장 주인이 메모만을 보기를 허송세월 기다리고 있었다는 거다.

그렇게 연락이 안 되고 돈을 빨리 받고 싶었으면, 누가 생각하더라도 본인의 은행에 바로 연락을 하는 게 가장 급선무 아닌가?


만약 우리 엄마가 실수로 남의 계좌에 돈을 잘못 보냈다면, 바로 경찰에 신고를 하거나 은행에 전화를 걸었을 것이다.

50대 중년의 여성이 1원씩 보내며 메모를 바꿔 송금할 줄 아는 수준이라면, 왜 진작에 은행에 신고를 하지 았는지 아직도 미지수다.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한 분이 있다면, 결국은 은행에서 전화가 와서 내 계좌에서 50만원이 자동으로 출금되었다.


아직까지도 이 사람이 보통의 시민이었는지, 뜻대로 되지 않자 발악하는 보이스피싱범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돈과 관련해서 또 조심 또 조심해선 절대 손해보는 일이 없다.


만약 수상한 돈이 입금되었다면 절대 개인 간 거래는 하지 말고, 당장 은행에 사고 신고 접수부터 하시길 바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