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예프리 yefree Jun 05. 2022

친구 유튜브를 보다 껐다

익명이 또 다른 위로가 될 때


납덩이처럼 무거운 마우스 커서를 끌어다 일시정지 버튼을 눌렀다. 이윽고 노트북 화면은 어두워졌고 텅 빈 화면과 같은 공허한 내 얼굴만이 보였다.


친구는 영상에서 거의 울음을 참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자신의 속마음을 힘겹게 말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 앞에 서는 게 힘들고 때로는 그 상황이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했다. 그런 스스로를 극복하고자 독일로 교환학생까지 왔지만, 발전하기는 커녕 되려 퇴보하는 것 같다며 그 사실을 견디기 힘들다고 했다.


전혀 몰랐다. 바로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만나서 맛있는 요리를 해 수다를 떨고 보드게임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내던 친구였다. 친구가 평소에 올리던 영상들은 소소한 일상을 담은 브이로그와 같은 것들이었지, 이렇게 깊은 속마음을 드러내는 영상은 단 한 개도 없었다. 그 친구를 항상 잘 웃고 밝은 아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때의 심정은 마치 잘 풀리던 실타래가 갑자기 꼬여 걷잡을 수 없이 얽히고 설키어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알 수 없는 마음이었다. 친구의 아픔에 공감하고 슬퍼하기보다, 먼저 든 감정은 이기적이게도 ‘당황스러움’이었다. ‘왜 옆에 있는 친구한테 말하지 않고 인터넷에선 털어놓지?’


곧이어 찾아온 두 번째 감정은 서운함이었다. 우리가 꽤 친하다 생각했는데, 친구는 이런 아픔을 나에게 털어놓을 만큼 친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구나. 내가 과연 이 서운함을 온전히 누려도 될만한 친구인지조차 확신이 들지 않았다. 나의 서운함은 자신감을 잃어버렸다.


누군가와 친밀해지고 싶을 때, 나는 그 사람의 ‘슬픔’이 궁금해진다. 기쁨은 남과 쉽게 나눌 수 있지만, 슬픔은 공유하기에는 더 조심스럽고 개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군가 그의 슬픔을 나에게 털어놓는다면, 기꺼이 ‘내 영역에 한 발짝 더 다가와도 돼’라는 말로 받아들일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간접적으로 알게 되는 건 반갑지 않았다. 이후에도 친구를 몇 번 더 만났지만 아무 말하지 않았다. 모를 낯섦을 느꼈고 우린 딱 이 정도까지의 친구란 생각에 스스로 선을 긋고 그 아이에게 더 이상 다가가지 않았다.




시간이 꽤 흐른 지금은 어렴풋이 그 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익명이 때로는 더 큰 위로가 될 수 있음을 이제는 안다. 이렇게 글로 솔직한 생각과 감정을 털어놓을 수 있는 것도 어쩌면 익명이 잠시 빌려준 용기 때문일지 모른다. 서로에게 위로를 해줄 ‘의무’가 전혀 없는 누군가가 수고스럽게 나를 걱정하고 격려해주었다. 이름조차 모르는 타인의 위로가 때론 지인의 위로보다 더 크게 다가왔다.


이 사실을 조금만 일찍 알았더라면 그 친구로부터 큰 서운함과 박탈감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친구의 낯선 모습에 지레 겁을 먹고 물러서는 게 아니라 그 애에게 부담이 가지 않는 선에서 위로를 해주었을 텐데.


영상을 보고 저도 공감가는 부분이 많았어요. 그래도 이렇게 자신의 아픔을 공개적인 곳에 노출한다는 건 꽤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인데, 대단한 것 같아요. 슬픔을 딛고 앞으로 잘 헤쳐나갈 것 같습니다.


라고 익명의 댓글이라도 남겨놓을 걸. 아무 말도 건네주지 못한 그때가 못내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작가의 이전글 엄마는 카페 메뉴판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