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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프리 yefree Jun 11. 2022

12,800원어치 욕이 배달되었다

친오빠가 영문모를 택배를 받는 이유


밤 11시, 그때의 나는 돌돌이를 동서남북으로 굴려가며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청소하고 있었다. 누가 아래에서부터 계단을 따라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발걸음이 멈추더니 상자가 바닥을 따라 ‘스르르’ 미끄러져 우리 집 현관문에 ‘탁’ 부딪히는 둔탁음이 났다. ‘택배가 왔구나!’ 종종 택배기사님들은 계단을 다 올라오지 않은 채 택배 상자를 문쪽으로 밀어 문 앞에 배달해주신다.


곧바로 그 택배기사분은 계단을 내려가며 한 마디를 뱉었는데, 그 한 마디가 몸안의 모든 세포들까지 얼어붙게 만들었다.


… 이 씨X년 !!!!


이 건물의 특성상, 현관문은 문 밖의 소음을 그대로 흡수하는 창호지와 비슷하다. 그럼에도 설마 나에게 욕한 건가 싶어 내 귀의 청력을 의심하고 있던 찰나, 휴대폰에 알림이 짧게 울렸다. ‘띠링, 택배 문 앞(으)로 배송했습니다.’ 욕의 수신인이 내가 아니길 바랬는데, 이를 가볍게 무시하듯 알림은 정확히 나에게 날아와 꽂혔다.


온갖 생각이 뒤죽박죽 동시에 터져 나왔다. ‘내가 못 들을 거라고 생각했나? 계단을 올라오느라 많이 힘들었나?’ 우리 집은 엘리베이터가 없다. 이미 익숙해진 내 몸도 가끔씩은 5층까지 올라오는 일이 힘에 부칠 때가 있다. 그날 기분 나쁜 일이 있었거나 5층까지 올라오느라 힘들어 욕이 목까지 차올랐다고 해도 그 심정을 이해했을 거다. 하지만 욕을 속으로 생각하는 것과 입 밖으로 내뱉는 건 천지차이다. 안 그랬더라면 이미 이 세상 모든 직장인들은 최소 한 번씩 상사와 막장극을 찍었을 것이다.


욕이 나올 만큼 무거운 물건을 시켰나 싶어, 아무 소리가 안 들릴 때까지 숨죽이고 기다렸다가 한참 뒤에 문을 열어 택배를 확인했다. ‘강아지 해충 방지 용품’. 1ml 제품 5개가 나란히 들어있는 제품이었다. 가끔 오른쪽 손목에 손목터널 증후군을 느끼는 나도 한 손으로 들고 있어도 거뜬할 것 같은 그런 한없이 가벼운 무게.


상자의 내용물은 내가 어떤 성별의 사람인지 전혀 단서를 남기지 않았다.  그대로 강아지 용품은 남녀노소, 연령불문 구매할  있는 거니까. 그보단 ‘여성임을 알려주는  이름을 보고선 그에 걸맞는 단어를 선택했을 것이다.


국어사전에 ‘년’의 뜻을 검색하니 이렇게 나왔다


만약 택배 겉면에 ‘곽두팔, 마동석, 강형욱’과 같은 이름이 적혀있었어도 똑같이 욕할 수 있었을까? 꼭 강인한 인상을 떠올리게 하는 이름이 아닌 ‘이서준, 강현진, 김진수’와 같은 평범한 남성의 이름이었어도 결과는 똑같을 거라 생각한다. ‘곽두팔’은 너무 장난스러운 것 같아, 택배 수령인을 친오빠 이름으로 바꿔놓았다. 실제로 이게 효과가 있었는진 알 수 없으나, 그 사건 이후 같은 일을 겪진 않았다.


종종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 때문에 피해를 입을 때면 무력감에 휩싸인다. 지구에 올 때 내 ‘인종’을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인종차별을 당해야만 했을 때. 이분의 일 확률로 선택된 내 ‘성별’로 인해 쉽게 공격에 노출될 때. 이건 마치 암탉에게 왜 네모난 알이 아닌 동그란 달걀을 낳느냐고 타박하는 것과 같다 해야 하나. 아,  나보고 뭐 어쩌란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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