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오빠가 영문모를 택배를 받는 이유
밤 11시, 그때의 나는 돌돌이를 동서남북으로 굴려가며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청소하고 있었다. 누가 아래에서부터 계단을 따라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발걸음이 멈추더니 상자가 바닥을 따라 ‘스르르’ 미끄러져 우리 집 현관문에 ‘탁’ 부딪히는 둔탁음이 났다. ‘택배가 왔구나!’ 종종 택배기사님들은 계단을 다 올라오지 않은 채 택배 상자를 문쪽으로 밀어 문 앞에 배달해주신다.
곧바로 그 택배기사분은 계단을 내려가며 한 마디를 뱉었는데, 그 한 마디가 몸안의 모든 세포들까지 얼어붙게 만들었다.
… 이 씨X년 !!!!
이 건물의 특성상, 현관문은 문 밖의 소음을 그대로 흡수하는 창호지와 비슷하다. 그럼에도 설마 나에게 욕한 건가 싶어 내 귀의 청력을 의심하고 있던 찰나, 휴대폰에 알림이 짧게 울렸다. ‘띠링, 택배 문 앞(으)로 배송했습니다.’ 욕의 수신인이 내가 아니길 바랬는데, 이를 가볍게 무시하듯 알림은 정확히 나에게 날아와 꽂혔다.
온갖 생각이 뒤죽박죽 동시에 터져 나왔다. ‘내가 못 들을 거라고 생각했나? 계단을 올라오느라 많이 힘들었나?’ 우리 집은 엘리베이터가 없다. 이미 익숙해진 내 몸도 가끔씩은 5층까지 올라오는 일이 힘에 부칠 때가 있다. 그날 기분 나쁜 일이 있었거나 5층까지 올라오느라 힘들어 욕이 목까지 차올랐다고 해도 그 심정을 이해했을 거다. 하지만 욕을 속으로 생각하는 것과 입 밖으로 내뱉는 건 천지차이다. 안 그랬더라면 이미 이 세상 모든 직장인들은 최소 한 번씩 상사와 막장극을 찍었을 것이다.
욕이 나올 만큼 무거운 물건을 시켰나 싶어, 아무 소리가 안 들릴 때까지 숨죽이고 기다렸다가 한참 뒤에 문을 열어 택배를 확인했다. ‘강아지 해충 방지 용품’. 1ml 제품 5개가 나란히 들어있는 제품이었다. 가끔 오른쪽 손목에 손목터널 증후군을 느끼는 나도 한 손으로 들고 있어도 거뜬할 것 같은 그런 한없이 가벼운 무게.
상자의 내용물은 내가 어떤 성별의 사람인지 전혀 단서를 남기지 않았다. 말 그대로 강아지 용품은 남녀노소, 연령불문 구매할 수 있는 거니까. 그보단 ‘여성’ 임을 알려주는 내 이름을 보고선 그에 걸맞는 단어를 선택했을 것이다.
만약 택배 겉면에 ‘곽두팔, 마동석, 강형욱’과 같은 이름이 적혀있었어도 똑같이 욕할 수 있었을까? 꼭 강인한 인상을 떠올리게 하는 이름이 아닌 ‘이서준, 강현진, 김진수’와 같은 평범한 남성의 이름이었어도 결과는 똑같을 거라 생각한다. ‘곽두팔’은 너무 장난스러운 것 같아, 택배 수령인을 친오빠 이름으로 바꿔놓았다. 실제로 이게 효과가 있었는진 알 수 없으나, 그 사건 이후 같은 일을 겪진 않았다.
종종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 때문에 피해를 입을 때면 무력감에 휩싸인다. 지구에 올 때 내 ‘인종’을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인종차별을 당해야만 했을 때. 이분의 일 확률로 선택된 내 ‘성별’로 인해 쉽게 공격에 노출될 때. 이건 마치 암탉에게 왜 네모난 알이 아닌 동그란 달걀을 낳느냐고 타박하는 것과 같다 해야 하나. 아, 나보고 뭐 어쩌란 말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