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눈이 그치고
저녁연기 어슬렁 고샅을 돌던 저물 무렵
뒤주 속 겨울 양식마저 자자에 낸 어머니는
기장밥을 지으셨다
짓무른 상심 벌겋게 물들이며
풀무질 왕겨 불로 저녁을 지으셨다
처음 본 노란 밥에
어린 동생들 좋아라 야단인데
말 수 적은 오빠 눈매에 노을이 내려
저녁 한 술 뜨지 않고 어디로 가고
모래알 세듯 밥알 흩던 작은 언니
불기 없는 구석방에 숨어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삽십촉 희미한 알전구 아래
헛디디는 바늘귀 간신히 틔워
어머니 누비옷을 누비시는데
암담한 세월 한 자락 잘라
성에 찬 한숨 넣어 늦도록
늦도록 누비시는데
대추나무 휘도록 눈은 퍼붓고
호젓한 재봉틀 소리
선잠 속 시린 바람벽을 흔들던
그 밤도 아버지 소식은
감감했다
-1995년 첫 시집 "겨울 삽화"에서
망설임 없이 단번에 주욱 써 내려간 이 시는 아홉 살 무렵 내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있는 어느 날의 풍경이다.
큰 오라버니는 대학생이었고 큰언니는 전주여고 졸업 무렵? 전주에 머물던 때인지 그날의 기억 속엔 없고 작은언니는 사춘기 중학생이었고 작은 오라버니는 열두 살이었다.
1월 말에서 2월 초 중순쯤이었지 싶다.
그즈음 가세가 많이 기울어 오라버니 등록금 준비에 비상이 걸려서였던지 커다란 뒤주 속의 쌀을 꺼내 자루에 담아 누군가에게 건네던 어머니의 쪽진 뒷모습이 떠오른다.
눈이 펑펑 쏟아져 내리던 겨울이었다.
풀무질로 저녁을 짓던 어머니의 쓸쓸한 모습도 처음 보는 노란 밥에 폴짝폴짝 좋아라 밥상 앞으로 달려들던 일곱 살 다섯 살 세 살 남동생들도 눈에 선하다.
한밤중 어머니의 삯바느질 재봉틀 소리도 삼십 촉 시린 알전구도 댓돌에 수북이 쌓이던 송이눈도 환하게 적막하게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