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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향 Jul 18. 2024

열네 살 적

언니가 보내 준 #왕신 "개교기념 시"를 읽는다.

작은언니는 고 3, 나는 중 2 였다.

동진강을 옆구리에 끼고 새로 지어 눈부신 여자 중고등학교 교정이 거기 있었다.

학교 뒤 탱자 울타리를 지나 나지막한 황톳길 고개 너머 청 대문 집 작은 방에서 언니랑 자취를 했다.


선생님이 가정방문을 오기로 한 날, 언니는 앉은뱅이 둥근 밥상 위에 새하얀 테이블보를 씌우고 자취방을 오래 쓸고 닦았다.

민들레 두어 송이 꺾어다 우유병에 꽂아서 읽고 있던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테이블보로 가린 밥상 위에 올려놓았다.

뒤안으로 돌아앉은 작고 외진 그 방이 새하얀 테이블보와 꽃병과 펼쳐진 두꺼운 책에 봄날처럼 금세 화사해졌다.


그 봄, 동진강변에 햇쑥이 지천으로 돋아나 바구니를 들고 쑥을 캐러 갔다.

쑥을 캐 온 저물녘 언니는 쑥 한 줌을 씻어 냄비에 쑥밥을 지었다.

얼마나 맛있던지 봄이면 봄마다 그 쑥 향기와 쌉싸레한 풍미가 못 견디게 그리웠다.

올 삼월에도 나는 생협에서 쑥을 사다 쑥밥을 지어먹었다.

그런데 아무리 천천히 음미하며 씹어보아도 열네 살 적 그 맛이 아니었다. 어쩐지 그저 밋밋하고 헛헛했다.


춥고 배고프던 어린 시절의 입맛과 온갖 먹거리를 섭렵해 온 시든 노인의 입맛이 어찌 같을 수가 있겠는가.


분식이래야 찐빵과 만두가 전부였던 그 시절의 학교 앞다리 건너 천변의 그 쓰러질 듯 허름한 가게들도 스치듯 생각이 난다.


언니의 시를 읽으며 동진강 가의 붉은 일몰과 태인 가는 신작로 길, 민들레꽃 제비꽃 삐비꽃들이 지천으로 피어 살랑대던 둑길 노랑나비 흰나비 호랑나비 흐드러지게 날아오르던 열네 살 적 그 봄날의 풍경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그해 초여름 나는 집 가까이 있는 막내 숙부가 교장인 작은 학교로 전학을 했다.

한창 자랄 나이에 연탄불이 시들면 밥을 지을 수가 없었다. 아침도 거르고 도시락도 없이 등교하던 그때는 라면조차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시절이라 너무 배가 고팠다.

그때 내가 무작정 새로 지은 신생 학교라 최고의 선생님들을 모신 그 학교를 떠나지 않았더라면 내 삶은 달라졌을까? 가끔씩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어차피 지금의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의 삶의 길이라는 게 한 방향을 향해 흘러가는 운명의 관성 때문에 결국은 지금의 이 자리에 당도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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