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분을 토하는 글임에 주의할 것
학교, 그곳은 문자학습의 집결지
문자를 익히는 것이 느린 아이도, 말귀를 알아듣는 것이 더딘 아이도 모든 아이들은 8세가 되면 학교에 입학하라는 입학 통지서를 받는다. 아이들이 똑같은 나이에 학교에 입학해야 하는 것이 뭔가 불합리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이것이 진리나 법칙도 아닌데 사람들은 순하게 이 방침을 따르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다. 나도 둘째를 8세에 학교에 보냈고 이제는 그것이 얼마나 불합리 한 지 안다.
학교는 문자로 하는 모든 활동의 집결지이다. 교과서를 읽어야 하고 써야 하고 시험을 치러야 한다. 모두 문자로 하는 활동이다. 학교의 선생님들은 치열한 문자학습의 전쟁을 뚫고 승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높은 수능점수를 받고 커트라인이 높은 학교에 입학한다. 4년 내내 교육과 관련된 전공을 이수하고 임용고시라는 또 한 번의 시험을 치른다. 선생님들은 이 모든 관문을 통과한 사람들이다. 아이들의 인성과 지성을 담당해야 하는 선생님들이라 이런 관문을 거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
문제는 그들이 문자학습에 너무나 능해서 문자학습이 느린 아이들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거다.
(물론 모든 선생님들이 다 그렇지는 않다.)
또한 학급당 인원수가 많다 보니 적절하게 과제를 수행하고 다음으로 이동해야 하는 과정에서 행동이 굼뜨거나 이해력이 떨어져 단체로 움직임에 따라가지 못하는 아이들이 생기기 마련인데 그럴 때면 선생님들은 좀 곤란해진다. 혼자서 많은 아이들을 학습시키고 관리해야 하니 당연한 상황이다. 이 부분은 선생님의 탓이 아님은 명백하지만 그렇다고 느리고 어리버리한 아이들의 탓도 아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늘 아이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 문제다. 아이들이 태어나서 처음 만나는 공식적인 사회인 학교에서 느린 학습자들이 처하는 이런 상황에 대해 누구도 주목하지 않고 그것이 모두 개별적인 책임(학생과 부모)으로 돌아가는 것이 마땅한가?
초등 입학하고 두 달 만에 학교에서 등짝을 맞고 온 아이
나의 둘째는 즐겁고 행복한 아이였다. 물론 학습이 느린 아이였지만 그것이 아이의 행복을 뺏지는 못했다.
둘째는 입학 전에 늘 동네 친구와 함께 아파트 근처 풀밭이나 오래된 나무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하늘소와 온갖 풍뎅이들, 쌍살벌과 꽃무지들 매미들, 콩벌레와 송충이들을 보며 신기해했다. 근처의 야트막한 산에서 애사슴벌레를 만나며 행복해했고 작고 연두색 귀여운 산개구리가 신기하고 멋졌다. 모든 곤충들의 짝짓기가 끝나고 들판에 여름이 끝나면 사마귀의 알집을 가져와서 베란다 화분에 꽂아두곤 했다. 이듬해 봄, 베란다를 청소하다가 나는 연두색 작은 사마귀 벌레 한 무더기를 보고 기함했었다. 이런 둘째는 학교 가는 날을 고대했다. 학교는 신나고 설레고 재미있는 곳이었는데 입학한 지 두 달이 채 지나기 전에 아이는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하루는 몹시 억울하고 화가 나서 집에 왔다. 이유를 물으니 선생님이 자기 등짝을 때렸다는 것이다. 나는 내 귀를 의심하며 이유를 물었다. 자기가 알림장을 빨리 쓰지 못해서라고 했다. 다른 아이들은 칠판의 알림장의 내용을 다 쓰고 하교했는데 우리 아이만 버벅버벅 못쓰고 어물어물했고 선생님은 빨리 쓰고 가라고 등짝을 친 것이다. 그날 맞은 등짝이 벌써 두 번째란 얘기를 듣고 나는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분노가 일었다. 난생처음 풀 수 없는 큰 문제에 봉착한 것 같았다. 나는 아이에게 왜 알림장을 빨리 쓰지 못했는지 물었다. 그날 나는 아이와의 대화를 통해서 둘째가 아직 한글을 제대로 읽지 못했고 읽지 못하니 쓰기도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학교 입학하기 전에 그런 것을 살피지 않은 나를 자책하며 죄책감에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세상에 이런 무딘 엄마가 어디 있는가? 아이가 아직 제대로 한글을 읽지 못한다는 것을 엄마가 몰랐다니 나는 엄마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찌 됐건 이 일을 해결해야 했다.
밤새 이슬에 젖은 "하늘소" 책
이상했다. 아이는 분명 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책을 들고 들판을 쏘다녔는데 글을 읽지 못했다니.
유치원을 다니던 일곱 살, 어느 날 아침 아이를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길에 플라타너스 나무 밑에 놓여있는 " 하늘소 " 책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 그 책은 분명 둘째의 책이었다. 그 며칠 동안을 둘째는 친구랑 같이 하늘소 책을 들고 다니며 아파트 뒤편의 한갓진 오솔길에서 알락하늘소를 잡았다. 그전날도 하늘소를 들여다보며 놀다가 책을 그냥 두고 온 모양이었다. 밤새 밖에서 이슬을 맞아서 울룩불룩한 책을 내가 들고 들어왔다. 글자를 못 읽는 아이가 책은 왜 들고 다녔을까? 아이를 앉혀놓고 책을 읽혀보고 이야기를 나눠보니 둘째는 받침이 복잡한 한글은 아직 잘 읽지 못했다. 다만 숫자는 능해서 하늘소 책에 있는 다양한 하늘소의 사진과 그 길이를 나타내는 숫자들을 읽으며 장수하늘소부터 온갖 하늘소의 길이와 크기를 비교하며 신기해했다. 책의 내용을 읽기보다는 숫자나 그림 사진에 더 집중했다. 글자를 완벽하게 읽지 못했지만 세상의 온갖 하늘소를 이해하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읽기도 느리고 쓰기는 더욱더 느려도 이런 행복감을 누리는 둘째였다. 이런 아이에게 빨리 알림장을 쓰지 못한다는 이유로 등짝을 때린 그 선생님이 정말 미웠다. 물론 지금은 선생님의 입장을 이해한다.
나는 아이의 정확한 상태를 알기 위해서 학습과 심리 상담을 병행하는 곳에서 검사를 받게 했다.
학습 능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서적인 문제
검사 결과를 듣고 나는 안심했다. 상담 선생님의 총평은 이랬다. 둘째는 문자 인지 능력이 또래보다 느렸고 8세에 알아야 하는 어휘력도 좀 부족한 편이지만 다른 영역에서는 전혀 부족한 부분이 없었다. 흔히 문자를 이해하는 능력이 느려서 학습이 느린 아이들은 혼나거나 무시당하고 이해받지 못하기 때문에 정서적으로 위축되고 자존감이 낮아진다. 그리고 이것은 또 학습적인 부분의 능력을 떨어뜨리고 이게 또 정서적인 부분과 연결돼서 자신감을 떨어뜨리는 빈곤의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게 된다. 다행하게도 둘째는 정서적인 부분에서 전혀 문제가 없었다. 상담 선생님은 주 1회 상담과 놀이치료를 권했다. 정서적으로 위축되지 않아서 예후가 아주 좋을 거라며 밝게 웃었다. 나는 그 웃음에 힘을 얻었다. 둘째는 3년 정도를 상담받고 놀이치료를 했다. 그리고 한글을 제대로 읽어 내는 훈련은 나와 같이 했다. 어려서부터 해 왔던 잠들기 전 동화책 읽어주기를 계속했고 교과서를 같이 읽었다. 둘째의 읽기는 조금씩 나아졌다. 학교에서 치르는 받아쓰기는 60점을 넘지 못했지만 나는 문제 삼지 않았다. 둘째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노라면 둘째의 눈은 늘 그림에 머물러 있었다. 글을 읽는 아이라면 그 눈이 그림 밑에 있는 글자로 내려와 있을 텐데 둘째는 글이 아닌 그림에 눈이 가있었다. 이아이는 아직 충분히 읽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억지로 그 눈을 글자로 내려오게 할 수는 있었지만 뭐하러 그럴 건가? 물론 둘째가 학교에서 혼이 나거나 선생님들이 답답해하는 것을 생각하면 속이 많이 상했다. 하지만 아이가 풀이 죽고 자존감이 떨어지기를 원치 않았다. 당시 아들 관련 책을 여러 권 읽었는데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중에 한 사람은 여학생과 남학생의 입학시기를 달리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도 있었다. 나는 문자 읽기에 능했다. 아주 일찍 한글을 깨쳤고 딸도 만 세돌이 되기도 전에 한글을 혼자 읽었다. 아들이 8세가 되도록 한글을 완벽하게 읽지 못한다는 이사실이 처음에는 낯설고 이해가 안 갔다. 받아들이기도 힘들었지만 그건 현실이었다. 그냥 문자 읽는 것이 좀 느릴 뿐이었고 지금은 그것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둘째가 학교에서 선생님한테 혼이 나서 억울해하면 나는 슬며시 베개를 하나 내어 주고는 화가 풀릴 때까지 베개를 두드리라고 했다. 어른들이 항상 옳지는 않다. 어른들이 옳지 않은 처신을 했을 때 아이들이 무조건 참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아이는 억울했고 그 억울함을 어떻게든 풀어주고 싶었다. 베개를 두드리는 행위는 화를 풀고 억울함을 풀게 해주는 의식 같은 거였다.
시간이 좀 더 필요했을 뿐 결국 남자아이들도 다 읽는다. 영원히 한글을 못 읽는 아이는 없다. 중요한 것은 결국은 다 읽을 건데 못 읽는 동안 아이를 문제아 취급하는 태도다. 그런 태도로 인해 아이의 정서에 문제가 생기고 자존감이 떨어지면 그건 정말 심각하다. 읽기는 결국 읽겠지만 떨어진 자존감을 회복하는 데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글 읽는 능력이 느리다고 책이 주는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문자를 빨리 깨쳐도 책이 주는 즐거움과 행복을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 둘째에게 모비딕을 읽어 주었을 때 아이가 그 이야기에 심취해서 눈을 반짝이며 듣고 있던 그 얼굴이 지금도 생각난다.
거북이들의 영어 관련한 얘기들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전에 이렇게 길게 한글이 늦었던 둘째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영어를 읽는 것은 한글을 읽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한글이 느린 아이는 우리 둘째만이 아니다. 세상의 남자아이들의 절반 이상이 문자깨치기가 느리다. 문자가 느린 아이들이 영어학습에 있어서 얼마나 왜곡되고 소외당하는지 그 이야기를 하려다 보니 먼저 장황하게 한글 관련 이야기를 했다. 한글이 느린 거북이들의 영어 이야기, 다음장에서 계속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