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cord of vanity
몇 달 전 보고서를 쓰기 위해 밤늦게까지 야근을 하던 날이었다. 뻑뻑한 눈을 잠시 깜박이는데, 문득 '누구를 위해 일을 하고 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반적으로 보고서 양식이나 내용은 보고를 받는 사람에게 맞춰져 있다. 그리고 동일한 보고서 양식을 쓴다 하더라고, 어떤 상사인지에 따라서 보고서를 채우는 내용의 양과 질도 달라진다. 나의 상사 A는 매우 좋은 사람이다. 하지만, 완벽주의 성향 때문에 누구보다 매우 빡빡하다. 최대한 여러 변수들을 생각해야 하며, 어떤 질문이 들어와도 방어할 수 있도록 모든 근거 내용이 보고서 어딘가에 담겨 있어야 한다.
입사 초기에는 직속 상사의 말이 곧 법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상사가 일하는 방법도 당연히 따르게 된다. 뿐만 아니라 문서를 작성하는 방식도 마치 '정답'이라 여기는데, 1년 차 때 이런 일이 있었다. 며칠 동안 열심히 작성한 보고서를 써서 넘겼는데, 나의 상사이자 사수였던 A는 조심스럽게 얘기했다.
"내가 모셨던 상사분이 '문자'랑 '기호(;)' 사이에 빈칸이 있으면 뭐라고 하던 게 너무 싫었는데, 이제는 내 눈에 그게 좀 밟히네"
말과는 다르게 아우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이 있다. 나도 그중 하나인데, 말은 괜찮다 하지만 아우라에서 이미 괜찮지 않음이 느껴진다. 상사 A는 정말 좋은 사람이고, 분명 어떤 의도 없이 본인의 경험담을 말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우라를 읽었고, 그 이후부터 '문자'와 '기호(;)' 사이에 빈칸을 두지 않는다. → 목표 ; (X) / 목표; (O)
가끔은 내가 회사에서 '일'을 배우는 것인지, '사수가 일하는 방법'을 습득하고 있는 것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그리고 업무에 대해 주체적으로 고민한다 하더라도, 결국 상사의 결정과 선택이 답이 되는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타인의 일을 대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쩌면 내가 주체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일에 대한 주도권이 빼앗기는 것 같은 이 상황에 대해 거부감이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다. '일' 자체에 대한 고민에 앞서 일을 마주하는 스스로에 대한 고민과 공부가 다시 필요한 타이밍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