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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J teacher Jun 19. 2024

제주도에서 만난 인연

서귀포 수제 맥주 맛집 '제주약수터' 사장님

  나에게 있어 내 인생의 가장 암흑기는 제주이주 첫 2년간이었다. 성산읍의 산밑자락 집을 잘못 구한 탓에 제주살이의 쓴맛과 매운맛을 제대로 보았고, 건강이 안 좋으셨던 아버지는 제주이주 첫해에 돌아가셨다. 편찮으신 아버지를 뵈러 비행기를 타야할 때면 제주도에 내려온 것을 후회했다. 

  '지금 내가 여기서 뭐하고 있나...?'

  하지만 사람이 참 특이한 것이 그 당시에는 그렇게 힘들고 못 견딜 것만 같았는데, 시간이 지나면 그 힘들었던 시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우리 가족도 마찬가지여서 지금은 모든 생활이 안정되고 만족하며 살고 있지만 가끔 아내와 말하고는 한다.

  "그래도 그때 추억이 가장 많다. 그치?"


  제주 이주 첫해가 암흑으로 물들어갈 때 우리 가족은 서귀포 시내 아주 작은 가게에서 특별한 인연을 만났다. 그때 나는 육아휴직 중이었는데, 수입이 없다보니 괜히 어깨가 움츠려들었다. 그래도 여행은 하고 싶어 숙소를 잡아야 할 때면 항상 저렴한 호텔만 찾아다녔다. 당시 우리 가족이 서귀포로 놀러가면 종종 가던 가성비 좋은 호텔이 하나 있었는데 그 호텔 앞에 '제주약수터'라는 아주 작은 수제 맥주 가게가 있었다. 호기심에 들어간 가게, '올레길, 남쪽나라, 탐라밀맥주' 등 제주도를 테마로 이름을 붙여 맥주를 만들고 패트에 포장해서 팔았는데 가격은 꽤 나갔지만 새로운 맛과 제주스러움에 꼭 포장해서 숙소에 와서 아내와 함께 마셨다. 그덕에 서귀포를 여행할 때면 서귀포시 저렴한 호텔에 방을 잡고 '서귀포올레시장'에서 저녁을 먹고 '제주약수터'에서 맥주를 사서 호텔방에서 마시는 것이 하나의 루틴이 되었다. 

서귀포시에 있는 '제주약수터'

  서귀포를 여행할 때마다 그곳에 가다보니 자연스럽게 사장님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때부터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가게를 운영하기에는 너무도 앳되어 보이는 얼굴에 나이를 물어보니 이제 나이 30이 되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우리와 같은 서울에서 내려왔다는 사실에 놀라고, 가장 놀랐던 것은 내가 근무하던 서울의 학교에서 아침마다 공을 찼던 조기축구회 소속이었다는 사실에 전율이 느껴졌다. 내가 영혼없이 멱살잡혀 끌려다니며 출근하던 학교에서 아침마다 공을 찼다니, 누군가는 고통이었을 직장이 누군가에게는 땀과 열정의 장소였다는 사실에 상대성을 느꼈다. 그리고 분명 번쯤은 마주쳤을 것이라는 상상을 했다. 이러한 특별한 인연 때문인지 가게에 방문할 때면 오랜 지인처럼 반겨주고 반가워했다. 


  지난 주말, 우리 가족은 오랜만에 서귀포시로 여행을 갔다. 6년전에 묵었던 호텔에서 똑같이 묵고, 서귀포올레시장에서 맛있는 한치회를 맛보고 아내와 내가 가장 그리워하는 '제주약수터'로 향했다. 모든 여행 코스는 6년전의 그때와 똑같은데 달라진 것은 '제주약수터'였다. 분명 그 당시에는 포장만 가능한 아주 작은 가게였는데 점포를 확장해 커다란 홀이 생기고 손님이 바글바글 하고, 분점이 생기고, 막걸리 전문 가게, 햄버거 가게까지 사업이 확장되고 서귀포시에 오면 꼭 들려야 하는 명소가 되었다는 점이 달라진 점이었다. 

  "혹시 사장님 계세요? 제가 좀 아는 지인이라서요."

  워낙 바빠진 사장님 때문에 직원에게 조심스럽게 물어 보고 안 계신다는 사실에 술 한잔만 하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우리가 왔다는 사실을 알고 바로 달려오신 사장님, 오랜만에 만나 반갑게 회포를 풀 수 있었다.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사람 사는 정을 느낄 수가 있었다. 


  제주도에 내려온 첫해, 가장 힘들었던 그때! 

  '제주약수터' 사장님도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불안함,  

  '이 길이 맞나?'

하는 끊임없는 물음과 불확실성! 어쩌면 이렇게 오랜 인연을 이어나갈 수 있는 것도 같은 시기, 같은 처지, 같은 생각을 남모르게 공유했기 때문이 아닐까?

  '제주약수터' 사장님을 만날 때마다 우리 부부가 하는 말이 있다.

  "너무 기분이 좋아요. 우리와 같은 때에 서울에서 제주도로 내려오신 이주민이 이렇게 잘 되어서요."

  그럴 때마다 사장님은 손사래를 치지만 제주도에 내려와 우리 가족처럼 행복한 사람을 또 만날 수 있어 기분이 좋다.

  

  밤 늦은 시간,

  맥주 한잔을 하며 이 글을 쓰는 이 순간

  서귀포시 시내 한복판에 있는 '제주약수터'가 그립다. 

아내가 만든 인스타 영상, 이곳이 '제주약수터'입니다.

https://www.instagram.com/reel/C8RLByMRxvh/?igsh=c2tkOWRma3RqMGJ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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