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와 바디프로필
따지고 보면 그때가 참 행복했다.
처음 제주에 내려오고 4년은 제주의 풍경에 빠지고 맥주에 취해 살았다.
특히 처음 2년을 살았던 성산읍 시골마을에서의 유일한 낙은 아내와 퇴근후 마시는 맥주였다. 정말 그때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일주일 중 6일 이상은 술을 마셨다. 그때 살았던 집은 2층 통창에서 우도와 성산일출봉이 그림처럼 보였는데 그 풍경을 보며 마시는 맥주는 기가 막혔다. 우리 가족은 주말이면 제주 동쪽의 바닷가를 자주 놀러갔는데 특히 우리 가족이 좋아했던 '월정리해변'의 백사장에 캠핑체어를 펴고 마시는 맥주는 내 몸속 깊은 곳에 있던 아드레날린을 마음껏 분출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다.
상상해 보았는가? 월정리 에메랄드빛의 바다를 바라보며 마시는 맥주! 말해 뭐해?
성산 생활 2년을 마치고 애월로 이사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필이면 가장 친한 타운하우스 이웃이 우리와 똑같이 서울에서 내려온 부부로 아이들 나이도 비슷했다. 아이들마저 사이좋게 지내니 매일이 파티! 거기에 더해 그 강남부부는 우리 부부가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 주당이었다. 그들은 맥주 따위는 술로 보지도 않았는데 금요일, 토요일 마시는 고량주를 비롯한 각종 독주는 그 다음날을 깨끗하게 지워주었다. 제주의 환경은 아름답지, 이웃과는 사이가 좋지.... 더 이상 바랄 것도 없는 행복한 나날! 그 긴 세월의 음주 기간은 아내와 나에게 행복한 시간을 주었지만 더불어 복부비만도 함께 선물해 주었다.
내가 이러한 환락의 시간을 청산하기로 한 것은 2년 전, 학교에 정장을 입고 출근을 하려는데 배 위에 벌어진 셔츠의 단추자락과 자켓을 입었는데 가슴보다 배가 더 나와 몸위에 붕 떠있는 자켓의 처참한 모습 때문이었다. 나름 몸매가 날씬해서 정장이 어울린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던 나였는데 정장을 입지 못할 지경이 되니 자존감이 바닥을 찍었다. 나는 그날 저녁 헬스장을 등록하고 pt를 400만원 70회 등록을 했다. 그리고 일주일에 4~5번 헬스장으로 출근을 했다.
운동을 시작하자 멀리해야 하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선은 더티한 음식(양념, 튀김, 국물을 트레이너들은 이렇게 표현합니다.)을 멀리하고 클린한 식사(고단백, 저칼로리, 무양념을 트레이너들은 이렇게 표현합니다.)를 해야했다. 나는 당장 학교에서 나오는 급식을 끊고 매일 아침 클린한 도시락을 싸서 출근을 했다. 다행히 내가 원래 식탐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식단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려운 것은 따로 있었는데 바로 술이었다.
일단 내가 운동을 하고 식단을 하자 이웃인 강남부부가 섭섭해 했다.
"형님, 그냥 살아요. 형이 술 안 마시면 재미가 없지."
나는 참 의지가 박약한 사람이다. 분위기 맞춘다고 한 잔 두 잔 하다보면 나중에는 결국
에라~~ 모르겠다. 마셔!
설상가상 직장의 상사가 바뀌었는데 새로 오신 교감님은 애주가셨다. (참고로 그 전의 교감님은 술을 한 잔도 안 하셨다.) 나는 새로 오신 교감님을 잘 따르고 좋아해서 자주 술을 마셨는데 몸관리 때문에 회식자리에 빠지려고 하면 교감님은 말씀하셨다.
"너 없으면 무슨 재미냐? 나도 안가!" (우리의 브로맨스!)
이렇게 회식자리에서 한 잔 두 잔 하다보면 나중에는 결국
에라~ 모르겠다. 마셔!!
나를 2년째 지도하던 트레이너는 한숨을 쉬며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회원님, 이렇게 하다가는 평생 바프 못 찍으세요. 회원님은 운동도 열심히 하시고, 식단도 잘 하시는데 잦은 회식과 음주가 문제예요."
결국 2년 동안 1,000만원의 돈을 pt로 쓰고 아직도 바프를 찍지 못했다.
사실 변명 같지만 나도 술을 마실 때 마음 편하게 마셨던 것만은 아니다. 술잔을 부딪힐 때마다
'이래도 되나?'
라는 생각이 한 번도 머릿속을 떠난 적이 없다. 내가 운동을 시작하기 전의 술자리는 정말 '유유자적, 안빈낙도'의 신선과 같은 기분이었는데 지금은 죄의식과 후회로 마음이 편치가 않다. 나도 일말의 양심은 있어서 완전히 끊지는 못했지만 예전에 비해 술자리를 줄이고 바다를 찾아가 캠핑체어를 펴놓고 맥주를 마시는 호사 따위는 누리지 않는다. 그리고 하루 두 시간씩 꼬박꼬박 웨이트와 유산소 운동을 하고 있다. 그 결과 셔츠 단추가 벌어지던 복부는 사라진 지 오래다. 그리고 드디어 8월에 바프를 찍는다.
요즘은 시간이 나면 헬스가방을 둘러메고 헬스장에 가지만 예전에는 캠핑체어를 둘러메고 바다로 향했다.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며 마셨던 맥주 한 잔! 세상 부러울 것이 하나 없었던 그 시간이 요즘은 참 그립다. 술을 줄이고 운동을 하며 건강한 몸을 얻었지만 제주살이의 낭만을 잃어버린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든다. 누군가 이 글을 읽고
'뭐야, 이 사람 알코올 중독자야 뭐야?'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제주도의 에메랄드 빛 바다를 바라보며 맥주를 마셔보지 않은 사람은 그 기분을 잘 알지 못한다. 정말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황홀한 기분! 지금은 시간이 지나 어렴풋한 기억이지만 삶이 팍팍하고 힘들 때면 그때가 생각난다. 분명 행복했다. 8월 바프를 찍으면 제일 먼저 캠핑체어를 둘러메고 월정리로 가야겠다. 그리고 예전처럼 바다를 바라보며 맥주 한잔을 해야겠다.
제주살이와 술과의 상관관계,
나에게 있어 이것은 분명히
정비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