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난 40대 후반의 내가 불쌍하다
내 직업은 교사다. 교직경력이 20년이나 되었으니 그동안 많은 학생과 학부모를 만나왔고 내가 퇴임을 하는 순간까지 앞으로도 많은 학생과 학부모를 만날 계획이다. 오랜 시간 교사로 지내며 요즘 아이들을 보면 아이들이 지금 태어난 것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부럽기도 하다.
중학교에 들어간 딸아이가 중간고사가 끝나고 며칠 후 성적표를 당당하게 내게 들이밀었다. 그렇게 당당하면 안 되는 성적인 것 같은데 딸아이는 내 생각과는 다른 모양이었다.
"이 정도면 괜찮지 않아? 기말고사 기다려~~ 내가 아주 끝장을 낼테니까."
그러면서 딸아이가 친구의 sns를 보여주었는데 나는 그곳에 올라온 영상을 보고 재미와 함께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영상에는 두 명의 학생이 나오는데 첫 번째 화면에서 "수학 몇 점?"하고 외친 후 다음 화면에서 자신의 시험지를 들고 "으아아아악!"하며 비명을 지르는 장면으로 편집이 되어 있었다. 아이들의 연기와 표정이 실감나고 재미있었는데 놀랍게도 아이들이 들고 있는 시험지에 적힌 점수가 48점, 45점이었다. 모두가 보는 sns에 당당하게 자신의 점수를 공개하며 웃음을 주는, 그것이 요즘 아이들의 클라스다. 내가 중학교에 다니던 때라면 어땠을까? 누군가 내 점수를 볼까봐 뒤로 감추고 얼굴 붉히지 않았을까?
나는 학교에서 한 단원이 끝나면 학생들이 얼마나 잘 이해했는지를 파악하려고 단원평가를 본다. 재미있는 것은 시험지를 채점하고 점수를 알려줄 때 조심하며 보안에 철저한 것은 나뿐이라는 점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시험지를 나누어줄 때 다른 학생이 볼까봐 서류 파일로 사방을 가리고 극비리에 시험지를 나누어 주는데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악! 나 55점이야!"
친구들 모두가 들을 수 있는 큰 목소리로 자신의 점수를 외치고 시험지를 들고 가는 요즘 아이들을 보며 예전과는 달라진 아이들의 생각과 태도를 느낀다.
뭐 사람마다 다를 수는 있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공부를 못하면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 떨어진 점수만큼 선생님에게 손바닥을 맞았고 집에 와서는 부모님에게는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니? 사람 구실은 할 수 있겠니?"라는 인격모독성 말을 들었다. 선생님이 시험지를 나누어 주면 점수를 가리기에 급급했고 성적표가 집으로 올 때 쯤이면 우체통 앞에서 전전긍긍했다. 지금에서야 고백하지만 나는 요즘 교대를 졸업하는 젊은 교사들처럼 공부를 엄청 잘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려 공부를 해서 어렵게 교대를 가고 교사가 되었지만 그만큼 더 힘들기도 했다. 학창시절 내 친구들은 하필이면 모두 공부를 잘하는 학생 뿐이어서 친구와 비교 당하고 자존감이 바닥으로 쳐박히던 때도 많았다. 그러는 동안 공부는 내 인생의 최대 컴플렉스가 되었다.
나는 요즘 아이들이 부럽다.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상관없이 당당한 모습, 주위의 시선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모습, 공부가 아니어도 다른 방면에 재능이 있으면 인정 받을 수 있는 요즘의 아이들이 부럽다. 시대를 잘 태어나야 한다는데 나 때는 공부 잘하는 것 외에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 10대, 20대가 불쌍하다. 공부에 재능이 없는 내가 이만큼 해내기 위해 발버둥 쳐야 했던 것이 안쓰럽다.
비록 나를 비롯한 예전의 사람들은 그렇게 살았지만, 우리의 아이들은 지금처럼 자신의 성적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당당하게 살아가기를 바란다. 시대는 이미 변했고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다양하며 성공의 정의도 개인마다 다르다. 어느 누가 내 인생에 대해 마음대로 말할 수 있을까? 우리 모두가 알고 있겠지만 수학 시험 점수 높다고 행복한 것도, 낮다고 불행한 것도 아니더라. 결국 모든 것은 자신의 마음에 달렸으며 행복과 만족도 남이 아닌 내가 느끼는 것이다. 왜 예전 사람들은 그렇게 중요치도 않은 수치화된 점수에 연연하며 살았을까? 45점의 점수도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요즘의 아이들처럼 나도 내 인생을 당당하게 살고 싶다. 난 요즘의 아이들에게 인생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