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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을 바꾼 두 번의 제주살이

방학 제주살이의 추억

by JJ teacher

"나 안 가. 왜 굳이 제주도에 가서 살아야 해? 그렇게 힘들면 휴직하면 되잖아."

내가 제주도에서 살고 싶다고 말할 때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 그렇게 싫으면 안 가도 돼. 그런데 나 죽어도 돼? 안 가면 나 죽어버릴 것만 같아."

이제는 4년 가까이 된 이야기이지만 첫 번째 제주살이를 하고 서울로 복귀하던 날 아내와 나눈 이야기이다.

결국 우리 가족은 다음해에 제주도로 내려왔다. 이런 이야기를 지인들에게 하면

"와~! 완전 협박이잖아요. 남편이 그런 소리하는데 누가 안 간다고 해요?"

라며 내가 마치 작전을 쓴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나는 그때 진심이었다. 정말로 죽을 것만 같았다.


2017년 여름, 우리 가족은 처음 제주살이를 경험했다. 근무하던 학교에서 1학기를 지옥처럼 보내며 내가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여름방학 때 제주살이를 한다는 사실 하나였다. 그리고 마침내 여름방학이 되어 제주도로 내려왔다.

우리가 제주살이를 했던 장소는 표선해수욕장 근처의 빌라였다. 그때는 제주이주 열풍이 정점을 찍던 시기여서 한달살이 집을 구하기가 정말 어려웠다. 가장 인기가 있었던 한달살이집은 제주돌집을 개조한 집들이었는데 그곳은 이미 몇 달 전부터 예약이 끝나 구할 수 없었다. '제주한달살이'카페에 가입을 하고 간신히 구한 곳은 평범한 빌라였다. 우리 가족은 14박을 예약했는데 20평 정도의 빌라를 2주 빌리는 가격이 98만원이었다.(그것도 2만원 깎은 가격이었다.) 제주도 가옥의 특징이 전혀 없는 현대식 빌라였지만 결과적으로는 만족스러웠다. 깔끔하고 편리한 것이 아파트에 사는 우리에게는 안성맞춤이었다.

보름 정도의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이곳에서 우리 가족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었다. 매일 야근하느라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거의 없었는데 눈뜨고 잠들 때까지 아이들과 뒹굴고 부딪치며 시간을 보냈다. 비가 오면 작은 우산 하나를 받쳐들고 편의점에 가서 간식을 사먹고, 날이 좋으면 튜브와 물놀이 도구를 챙겨 바다까지 걸어갔다. 해수욕장에서 피부가 빨갛게 익을 때까지 하루종일 물놀이를 했다. 빈둥대는 삶이 이토록 행복한지 처음 알았다. 한 달도 되지 않는 제주살이의 시간은 나의 가치관과 삶의 지향점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때부터 내 시간의 중심은 가족이 되었다.

여름 제주살이의 추억들

"생각해 보니 제주도에서 살아도 될 것 같아. 그래, 우리 가자."

제주도에 다녀오고 냉랭하게 지낸지 얼마 후, 아내가 말했다. 그 뒤로 2학기는 학교가 끝나자마자 무조건 일찍 퇴근했다. 그리고는 '제주오일장' 사이트에 들어가 내가 살 집만 검색했다.

겨울방학을 맞아 우리 가족은 다시 '제주살이'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20일 살이'로 한림읍 귀덕리쪽에 집을 얻었다. 제주에 내려오기 전에 제주살이를 하며 집을 구하기 위해 내려온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제주도에서는 보통 2~3주 전에 집을 계약한다. 길어봐야 한 달 전에 계약을 한다. 우리는 서울처럼 석 달 전에는 집을 구해야 하는 줄 알고 급하게 집을 구하러 다녔다. 그래서인지 좋은 집을 구하지는 못했지만(우리가 집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는 브런치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제주에 사는 그 시간만큼은 행복했다. 겨울에 제주살이를 했던 집은 제주로 이주한 부부가 별채로 지은 조립식 주택이었는데 12평 정도의 작은 규모로 복층 다락방이 아담하게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시간을 보냈다. 겨울 제주도는 오후 5시면 해가 지는데 낮에는 귤따기 체험을 하고, 보말을 잡고, 예쁜 카페를 다니며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에는 가족끼리 영화를 보고 짠~타임(잔을 부딪치며 "위하여"하는 시간)을 가지며 시간을 보냈다. 제주도에 정착한 후, 그 아담한 집이 생각나 다시 가보기도 했다.

겨울 제주살이의 추억들

두 번의 제주살이는 우리 가족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선물해 주었다.

나는 지금도 여름비가 매섭게 내리던 날, 아이들과 우산을 받쳐들고 편의점을 가던 시간을 잊을 수가 없다. 작은 우산 하나를 집주인에게 빌려 넷이 쓰고 갔으니 누구 하나 비에 젖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비를 쫄딱 맞으면서도 뭐가 그리 재미있었는지 깔깔대며 좋아하던 아내와 아이들의 모습이 영화처럼 선명하다. 아이들에게 간식을 사주고, 아내와 대낮부터 맥주를 마셨다. 취기가 약간 오르자 아이들을 양쪽 팔에 한 명씩 안고 얼굴을 비벼대며 원없이 놀아주었다. 아이들도 서울에서 보지 못했던 내 모습을 어색해 하면서도 좋아했다. 제주도에 오면 매일 이렇게 살 것만 같았다. 가족끼리 매일 웃으며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다행히 그때 나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서울에서보다 많이 웃고,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다.

이삼십대, 나는 유명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들이 나를 유능하게 보아야하고,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초등교사가 남들보다 유능해봐야 교감, 교장이라는 사실이 참으로 부질없다는 생각이 든다. 초과근무에, 휴일까지 출근을 하느니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몇 배 소중하다. 우리 아이들도 학교에서 일 잘하는 교사 아빠보다는 자기들과 잘 놀아주는 친구 아빠를 좋아한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

는 말이 있다. 난 이 속담이 생각날 때마다 가수 이효리가 방송에서 초등학생에게 한 말이 떠오른다.

"그냥 아무나 돼!"

참~~ 예전부터 우리는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어른들의 생각을 강요 받으며 살아왔다. 재미있는 것은 그런 말을 한 어른들도 잘 모른다는 것이다. 지금 나는 40대의 어른이지만 무엇이 옳은 것인지 잘 모르겠다. 사람으로 태어나 이름을 안남기고 죽으면 어떤가? 행복하게 살면 되는 것이지.

나는 단지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좋은 선생님', 아내에게 '좋은 남편', 자식들에게 '좋은 아빠'로 남고 싶다. 그것이 내가 죽어 사람들에게 남기고픈 기억이다. 그런 사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기억된다면 정말로 성공한 인생이라고 믿는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인지 아는가? 자기 가족에게 인정받는 일이다.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나는 다른 사람이 아닌 가족들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 싶다.


2017년 여름과 겨울 두 번의 제주살이는 나에게 좋은 선생님,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지금 나는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중이다.

그리고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겨울 제주살이를 했던 귀덕리의 조그만 다락방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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