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신체적으로 아직 늙지 않았다. 내가 서울에서 근무할 때, 우리 학교는 매주 금요일마다 남교사들이 모여 직원체육을 했는데 주로 배구나 배드민턴을 했다. 그때 배구든, 배드민턴이든 가장 노련하게 잘하는 연령대는 사십 대였다. 이삼십 대는 힘과 열정만 있지 사십 대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때 나는 배드민턴에 빠져있었는데 매주 레슨을 받고, 게임을 하고, 고가의 장비와 운동복까지 갖추었지만 사십 대를 이기기 힘들었다. 물론 배드민턴이나 배구는 구력이 중요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삼십대와 겨루어도 체력적으로나 기술적으로 사십 대가 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배들과 게임을 할 때, 이길 듯 이기지 못해 약이 올라
"선배님, 한 판 더 해요."
라고 하면 사십 대 선배들은 귀엽다는 듯이
"그래."
하며 아무렇지 않게 받아 주었다. 체력은 삼십 대인 내가 앞설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내가 먼저 지쳤다.
지금 나는 사십 대다. 나이는 40을 이미 넘어섰는데 체력적으로 글쎄? 나이가 더 든 것인지 모르겠다. 오히려 운동을 더 많이 해서 건강도, 체력도 삼십 대에 비하여 좋아진 것 같다. 가끔 학교에서 탁구나 배드민턴을 치는데 그렇게 지치지 않는다. 미세한 차이는 있을지 모르겠으나 체감상 달라진 것이 없다. 과연 39살과 40살은 다른 것일까? 39살은 삼십 대고, 40살은 사십 대인데 물리적인 차이가 있는 것일까? 나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항상 마음속으로 이렇게 주장한다.
'사십 대도 아직은 청년층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만 문제는 사회다. 내가 나이가 들었다고, 사십 대라고 느끼는 것은 직장이다. 일단 젊은 선생님들이 나를 어려워 한다. 직장에서 별로 말을 하며 지내는 성격이 아니어서 그런지, 서로간의 거리감이 강하게 느껴진다. 그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나는 운동을 좋아해서 삼십 대의 젊은 남자 선생님들과는 운동을 하며 적당히 잘 지내지만, 여자 선생님과는 아예 말조차 섞지 않는다. 괜히 친한 척 했다가 가벼운 농담이나 흘리고 다니는 사십 대 아저씨로 보일까 걱정되기 때문이다. 내가 이삼십 대 때, 직장에서 선배라고 여자 후배에게 실없는 농담이나 하는 남교사들을 극혐하는 성격이었기에 아예 말을 섞지 않는 것이다. 아니, 아예 시선조차 주지 않는다. 괜한 오해를 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지내다 보니 항상 내 나이에 대하여 인식을 할 수 밖에 없다.
대체 나잇값의 기준이 무엇일까? 참... 어렵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 중에
"나잇값 좀 하고 살아라."
라는 말이 있다.나는 요즘 이 말의 모순에 대하여 자주 생각한다. 사십 대가 이삼십 대처럼 젊게 살다가
"가볍다. 나잇값 못한다."
라는 말을 듣기 쉽고, 또 사십 대에 꼭 맞게 사고하고 행동하면
"꼰대같다."
라는 말을 듣기 쉽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이, 그것이 사십 대다. 그래서 내가 택한 것은 침묵이다. 박경철 작가의 <자기혁명>에 보면 '침묵은 가장 능동적인 대화다.'라는 문장이 있다. 이 문구를 삼십 대 후반에 보았는데, 나는 40이 되기 전에 이 문구를 본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다. 나는 직장에서 침묵을 철저하게 실천하고 있다.
박경철의 <자기혁명> 중에서...
사실 내가 그리 과묵한 사람은 아니다. 나는 원래 사람을 좋아하고, 대화하고 토론하는 것을 좋아한다. 주말마다 이웃과 저녁식사를 하거나, 술자리를 할 때 내가 주로 대화를 주도한다. 얼마 전, 옆집 강남 부부의 남편이 나에게 한 말 때문에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배를 잡고 웃었다.
"형님, 직장에서 말 좀 해요. 여기서 풀려고 하지 말고. 말 할 시간을 안 주네?"
확실하다. 세상 모든 일에는 '총량의 법칙'이 있다. 직장에서 채우지 못한 대화의 시간을 이웃과 채우려했던 모양이다.
이미 40초중반의 나이지만 나는 아직 삼십 대와 달라진 점을 잘 모르겠다.
오히려 모든 것이 미숙하고 부족했던 삼십 대보다 제법 성숙한 지금의 나이가 더 좋다.
단지 나는 사십 대라고 우리의 머릿속에 흔하게 인식된전형적인 사십 대의 그 모습처럼 살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