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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씨 Jan 16. 2019

나홀로 첫 여행, 낯선 남자에게 쪽지 받다

굴욕도 건강하게 발전시킬 수 있다


"까르푸 가는 법을 알고 싶은데?"



리셉션 직원에게 물었다. 그녀는 잘 모르겠다며 옆에 있던 한 남자에게 질문을 토스했다. 노트북 작업을 하던 남자는 벽에 붙어 있는 지도를 가리키며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산을 넘어 강을 넘어 멀리 멀리 가는 여정이었다. '이건 아닌데......'라는 말을 속으로 삼킨 채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 했다. 십 여 분에 걸친 장황한 브리핑 끝에 그가 말했다. "혹시 아침 먹었니?" 나는 아직이라고 답했다. 그렇게 다소 급작스럽게 생면부지 여행자와 아침을 먹게 됐다.




레스토랑으로 이동하는 길, 대만에서 중국어를 배우기 위해  장기간 체류 중인 그가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의아했다. "이제 꽤 익숙해졌을텐데, 여전히 사진 찍을 게 있어?" 그가 대답했다.  "태풍이 온 건 처음 보거든 " 대답을 듣고 보니 비로소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뿌리를 드러낸 나무들이 거리에 어지럽게 누워 있었고, 가끔 오토바이, 자전거와 같은 탈 것들도 나약하게 쓰러져 있었다. 한 마디로 처참한 흔적이었다.  낯선 여행지에서 낯선 여행자와 드라마틱하게 아침을 먹으러 갈 생각에  다른 건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나 보다. 그제서야 나도 카메라를 꺼내 들곤 여행자모드로 돌입했다.  




아침을 먹으면서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다. 물론 짧은 영어 실력이었기 때문에 답답함을 느끼는 순간이 더 많았지만 여행지에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이 만남이 갑자기 받은 선물처럼 느껴졌기에 그냥 좋았다. 여행지에서 로망 같은 거라고 해야 할까. 그 때 먹었던  화덕에 구운 빵도 맛있었고, 두유도 따뜻했다. 음식들이 바닥을 드러낼 쯤 그가 말했다 "내일 아침도 같이 먹을래?" 나의 대답은 "공항 가기 전에 시간이 좀 있어. 좋아."였다.





다음날, 우린 좀 더 심도 깊은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다큐멘터리 감독 지망생인 그는 다큐멘터리 감독을 꿈꾸게 된 계기, 실제 만들었던 다큐멘터리, 그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겪었던 에피소드들을 풀어냈다. 감명 깊게 읽은 책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에 대해 진지한 리뷰도 있었고, 중국어를 배우기로 결심한 이유와 중국에 대한 묵직한 견해도 있었다. 그가 하는 말 전부를 제대로 이해하긴 어려워도 반짝이는 눈과 최선을 다해 말하는 태도에서 그가 참 대단해보였다. 그리고 그 감탄은 곧 나의 현주소에 대한 냉정한 평가로 이어졌다. 남들이 하니까 뒤처지지 않기 위해 적당히 하고, 남들이 가니까 미래에 대한 치열한 고민도 없이 그저 놓인 길에 접어들고, 또 남들이 좋게 생각하니까 묵묵히 참아내고.. 그 결과가 2년  넘게 다닌 회사를 유쾌하지 않게 떠나기로 결심한 것은 아닐까. 뭐 이런 자아비판이 곁들여졌다.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캐리어를 챙겼다. 대만에서의 마지막 날이 실감나기 시작했다.  로비에서 날 기다리던 그가 내 캐리어를 들어줬다. 호의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그게 낯설어서 받아들여야 할 지 말아야 할 지 빠른 시간 내 판단하기 어렵다. 또 호의를 있는 그대로 감사하게 받아들이지 못 한다. 그때의 내가 그랬다. 결국 여러 번의 사양 끝에 그가 지금 바쁘지 않다는 확인을 한 후에야 같이 공항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우린 그곳에서 포옹을 나누며 작별을 했다. 그 때 그가 나에게 작은 쪽지 하나를 내밀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쪽지를 펼쳐봤다. 종이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영어가 나열돼 있었다. s,x, sh, ch, z 그에 따르면 내가 발음을 제대로 못 해내는 것들이라고 했다.





여행지에서의 로맨스를 잠시나마 그렸던 나에게 현실은 로맨스와 거리가 먼 굴욕을 안겨주었다. 그래도 아주 치욕스럽지는 않았고 조금은 우스웠다. 시트콤 같다고나 할까.






 그로부터 시간이 꽤 흘렀다. 5년 전 창피함을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영어에 좀 더 관심 갖고, 시간을 투입했다. 반면, 단기간에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려는 욕심은 줄었다. 완만하더라도 꾸준히 상승 곡선을 그리는 게 내 바람이었다. 야구로 치면 홈런 보다 출루율을 높이기 위해 연습을 쉬지 않는 선수가 되고 싶다고나 할까.





지금, 나의 영어 실력은  원어민처럼 유창하진 않지만 그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향상되었다. 피하고 싶었고 그래서 멀리 하기만 했던 영어가 사랑스러워졌다. 쪽지 덕분이다.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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