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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씨 Mar 19. 2020

최고의 낭만이 나에게 왔다

최고의 낭만을 꽃피우는 건 결국 '나', 내 몫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최고의 낭만은 단순히 아름다운 도시와 유명한 랜드마크 따위가 아닌 결국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더 나아가서 운명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일일 테다



(낭만이 여행자의 일이라면) 중에서



어쩌면 나는 그 최고의 낭만을 이미 만났을지도 모른다.

만났다고 확신할 수 없는 이유는 내가 만든 이런저런 핑계들로 최고의 낭만이 꽃필 수 있는 제반 환경을 구축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보기 드문 행운이 나에게 왔지만  내 곁에 붙잡아 놓지 못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여행을 떠나면서 노트북을 장만했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내 여행의 순간순간을 기록하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더 큰  욕심 아니, 야망도 있었다. 어느 날, 문득 북소리를 듣고 여행을 떠나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인 상실의 시대를 탄생시킨 무라카미 하루키를 떠올리면서 말이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면 닮고 싶을 만큼 엄청 부러웠. 그렇게 나는 조금 거창한 포부와 기대를 안고 노트북과 함께 비행기에 올랐다.



매일 나는 노트북과 함께였다. 하루의 통과의례처럼  노트북 전원을 켜고, 메모장을 실행하고, 무언가를 입력하고  지우는 일을 반복했다. 마음 같아선 담담하게 물 흐르듯 그날의 일을 기록하고 싶었는데 현실은 현실이었다.  나의 현실은 이랬다. 노트북을 한참 동안 바라보는 , 마치 정지화면과 같은 장면이 꽤 오래 지속되는 이미지를 떠올리면 된다. 고뇌의 시간이었다 고급지게 포장본다.

그래도  나를 조금 칭찬하자면, 지속하는 힘, 포기하지 않는 근성이었다. 나는 매일 한 개의 포스팅을 꾸준히 블로그에 업로드했다.  내가 투입한 시간과 고민의 흔적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짧은, 너무나 가벼운 모양새였지만 나는 안다. 업로드 버튼을 클릭하기까지 얼마나 고심했는지와 얼마나 어렵게 마무리를 했는지를.  가끔 드물게 외양이 전부가 아닐 때도  있다는 것을 그 시간은 나에게 알려줬다.




글은 참 안 써졌다. 특히, 첫 문장을 쓰는 일이 어려웠다. 잘 쓰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모니터의 활자들은 영 내 성에 차지 않았다. 내 실력을 능가하는 글을 상상하는 나와 현실의 나, 그 간극만큼 불만족스러웠다. 그렇게 내 노트북의 사용 빈도수가 가장 높은 버튼은 백스페이스 됐다.  그래도 그 날의 일을 기록하지 않으면 기억에서 달아날까 봐 별도의 파일을 만들어 무언가를 작성하긴 했다. 즐거움이어야 할 글 쓰기가  나를 짓누르는 부담으로 바꿨. 완벽을 바랄수록 더더더 힘겨워졌다.

그리고 나는 그 스트레스를 외면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내 계획은 흐지부지가 돼 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을 먹기 위해 호스텔 직원이 추천해준 로컬 식당을 찾았다. 그리곤 별 고민 없이 시그니처 메뉴를 주문했다. 할 일이 딱히 없던 나는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바라봤다. 저녁 시간답게 맛집답게 적당히 북적북적한 가게였다. 그러다 내 시선을 붙잡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건 내 옆 자리에서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루틴, 대표 메뉴와 후에 Hue 맥주를 주문하곤 성스러운 의식 같이 정성스럽게  인증샷을 찍는 동양 여자 아이였다. 나는 좀 더 그녀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다 한글이 적힌 노트를 보게 됐다. 나는  말을 걸기로 했다.


"한국 분이시죠?"



그녀는 베트남 가이드북을 집필한 여행 작가였다.

여행책, 구체적으로 여행 에세이를 쓰고 싶어서 노트북까지 장만한 나인데, 여행하다 여행 작가를 만나다니 이거 이거 예사롭지 않네 하면서 아주 좋은 징조로 받아들였다. 어느 정도냐면 오랜만에 가슴에 몽글몽글 기분 좋은 설렘을 느낄 정도다. 궁금한 것도 산더미였다.  질문을 쏟아냈다. 어떤 계기로 여행 작가가 되었으며 여행 작가의 고충은 무엇이며, 지금은 어떤 취재차 왔는지, 베트남에서 꼭 봐야 할 것 경험해야 할 건 무엇인지... 내가 여행책을 쓰고 싶다는 말을 했을까. 안 했을까. 아마도  계획이 희미해지는 시점이어서 당당하게 밝히진 못했을 거 같은데 지금 다시 그 순간을 되돌아보니,  아쉬움이 다. 만약 내가 충분히 준비가 됐더라면 그녀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럼 그녀는 내가 원하는 것을 좀 더 가뿐하게 쟁취할 수 있게 도와줬을 수도 있었을 텐데 하고 말이다.




그렇게 레스토랑 옆자리 인연은 식사 후 칵테일 바 bar로 2차를 가는 사이로 발전했고, 더 나아가 다음날 취재 일정에 동행, 그녀가 귀국하기 전까지 함께 하는 사이가 됐다.





그녀는 며칠 후 한국으로 돌아갔다. 이별은 아쉬웠지만

그녀와의 만남은 꽤 건강한 자극제가 됐다. 왜냐면

희미해지고 있던 집필에 대한 욕구를 원상태로 제자리를 찾게 해 줬으니까. 나는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마음을 새롭게 다잡았다. 하지만 집필이니, 저자를 논하기엔 냉정하게 현실을 평가하면 나는 글 쓰는 일에 있어선  신생아 수준이었다. 근데 내 이상은 어른 수준이었다. 지루한 쳇바퀴가 돌고 또 돌았다. 그건 의욕은 넘치는데, 결과는 기대치에 못 미치고, 결과만 보면 포기해야 하는데, 포기하고 싶지는 않고, 그렇다면 지속하기엔 현실은 너무 차가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현실은 동화 속 해피엔딩과 달라서 나는 귀국 후에도 한참 동안 내 계획을 방치하며 지냈다.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고 해야 할까. 실업급여를 신청해야 했고, 구직도 해야 했고, 연애도 해야 했그렇게 일상을 살아가는 일에 내 꿈을 또다시 외면하게 됐다. 하지만 마음 한켠에는 부채처럼 꿈이 남아있었다.




어떤 계기였을까. 고등학교 졸업하고 선망하는 직장을 다니다 세계여행을 떠났다는 광고글을 보고 였을까. 아니면 노트북을 켤 때마다 마주하는 폴더 영향이었을까. 어쨌든 나는 다시 쓰기로 했다.  끝을 보자는 마음으로 완성도에 대한 집착을 비우고 성실 모드로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았다.

그리고 열심히 원고지를 채워나갔다. A4 60장 정도를 채웠을까. 마음에 안 들었다. 부끄러웠다. 인정하기 싫지만 도저히 누군가 앞에 내놓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나는 그 시간에 대한  미련을 과감히 뿌리치고, 그 활자들을 포기했다.




시간은 성실하게 흘렀다. 1년, 2년 그리고 4년이 경과했다.

나는 여전히 4년 전 다짐을 다짐으로 남겨둔 채, 다짐을 현실로 만들지 못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으면 기회의 문은 언제든 열린다고 믿었고 지금도 그렇다고 믿는다. 그래서 다시 마지막으로 노트북을 마주하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진짜 마지막이라며 이 순간에도 무언가를  적어나가는 일을 하고 있다.


시간은 느리지만 결국 잎을 키우고 꽃을 피우고 나무를 자라게 한다는 말이 있다. 주근깨 빼빼 마른 심지어 빨간 머리에 고아인 빨간 머리 앤이 한 말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 희망의 메시지를 붙잡고,

나에게 온 소중한 기회인 최고의 낭만을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순전히 내 노력으로   잎을 키우고 꽃을 피우고 나무를 자라게 하려고 하고 있다.





오늘은 여기서 끝!

제 다짐을 응원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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