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땡감이 영그는 시간

<연재소설> 땡감이 영그는 시간

by 헤모아

나는 앞 건물 2층 고객님의 주문을 이행하느라 하루하루 늙어가고 있다.


돈을 미리 받았으니 이제 무를 수도 없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스토리를 짜고 스케치하다 죄다 찢어버리기를 반복한다. 이렇게 작업에 진전이 없으니 시들지 않을 수가 없다.


에디의 스키 방학이 곧 시작되는데 걱정이다. 에디를 집에 방치한 채 작업에만 몰두할 수도 없고, 더 이상 작업을 미룰 수도 없다.


꽉 막혀버린 내 사정을 아는지 오랜만에 오드리가 집으로 찾아왔다. 작업 테이블 한가득 그리다 만 작품을 보던 그녀가 깔깔 웃기 시작했다.


“그림에 짜증이 막 묻어있네. 너무한 거 아냐?”


“귀신이네. 그게 보이니?”


“제대로 끝낸 그림이 하나도 없잖아. 시작해서 그리다 말고, 새것 그리고.”


그림을 다시 보니 역시나 맘에 안 든다. 오드리가 그림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다.


“너 이 일 하기 싫지?”


“그런 건 아닌데, 뭐랄까, 강요로 시작해서 그런지 감정이 안 살아. 감흥이 없으니 영감도 안 떠오르고.”


“내가 좀 도와줄까?”


“어떻게?”


“기욤이 그러는데, 이번 화재 사건 말이야. 윗집에서 담배꽁초 버리는 걸 여러 번 목격한 증인이 있었대. 오랫동안 감시했는지 난장질하며 파티하는 모습이랑, 창가에서 담배 피우다 꽁초 버리는 걸 영상으로 찍어뒀나 봐. 그 사람이 경찰에 증거를 제출했고 직접 증언도 해서 사건이 한 번에 해결된 거라더라.”


나는 잠시 멍해 있었다. 문득 작고 동그란 쌍안경이 떠올랐다.


“그 사람이… 누군데?”


“글쎄? 그 여자 아닐까?”



*


여자는 갑작스러운 나의 방문에 어리둥절해했다.


“갑자기 어쩐 일이세요?”


“여쭤볼 게 있어서요. 잠시면 되는 데 시간 괜찮으세요?”


“그럼요. 들어오세요.”


그녀가 나를 거실로 안내했다. 여행 갈 준비 중이었나? 집이 조금 어수선했다.


“쌍안경으로 저를 지켜본 게 아니었나요?”


그녀는 잠시 나를 빤히 보다가,


“윗집도 보고, 작가님도 보고, 다 봤지요.”


그녀의 대답에 나도 잠시 그녀를 빤히 보다 이유를 물었다.


“왜요?”


“위태로워 보여서.”


여자가 고른 단어는 정확했다. 그때의 나는 정말로 위태로웠다. 벼랑 끝에 서 있던 나를, 떨어지는 나를 잡아 준 손이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내민 손이었다니.


왜 날 도와준 걸까, 왜 나를 위해 불편을 감수한 걸까.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에게 받는 도움은 여운이 몇 배는 더 강렬하다. 요새 자기 시간과 에너지를 쓰며 생판 남인 나를 돕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고 있다.


이런 친절이 나는 낯설다.


낯선 것은 조금 불안하다.


지금 느끼는 이 불안은 나도 뭔가 보답하고 싶은데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 같기 때문일 것이다.


“감사해요.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기분 좋은데요?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됐다니.”


협박하냐는 둥 독한 말로 원망을 퍼붓던 나를 보며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그림책은 잘 돼 가나요?”


“그게... 아직...”


“서두르고 싶지 않은데, 시간이 별로 없어서 자꾸 묻게 되네요.”


“어디 가시나요?”


“네, 곧 여기를 떠나요.”


“아!”


바닥에 너부러진 오래된 책과 쓰레기봉투가 눈에 들어온다. 여행 준비가 아니라 묵은 짐을 정리하며 떠날 준비 중이었다.


“아들이 다 컸어요. 몇 달 전에 열여섯 살이 돼서 아빠한테 보냈고요. 제가 보낸 게 아니고 아들이 제게서 탈출한 거라고 해야 정확하겠네요. 어쨌든, 일을 마쳤으니 이제 본국으로 돌아가려고요. 가봐야 반겨줄 부모님도 안 계시고, 어쩌면 여기보다 더 낯설고 더 이방인 취급을 받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가려고요. 여기에 남을 명분이 사라졌으니.”


갑자기 울컥 눈물이 나려 했다.


그녀가 가여워서 울컥한 건 아닌데 뭐 때문에 눈물이 나는 건지, 이게 무슨 감정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 어쩌면 나는 미래의 나와 마주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모습의 나를. 어딜 가도 편치 않은 마음으로 늙어가는 나를. 때 이른 서글픔으로 울 필요는 없다고, 간신히 마음을 추스르며 그녀에게 약속했다.


“곧 완성해 드릴게요. 떠나시기 전에 꼭.”


그녀가 밝게 웃는다. 내가 할 수 있는 보답을 그녀에게 꼭 하고 싶다. 나는 한 번 더 감사 인사를 건넨 후 서둘러 그녀의 집을 빠져나왔다.



*


“갑자기 어디 갔다 오는 거야?”


집에 들어서자마자 오드리가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혼이 반쯤 나간 날 보며 오드리가 걱정스레 되물었다.


세 번이나 이혼한 그녀는 이별 후 찾아오는 혼란스러움을 어떻게 이겨냈을까. 아이가 없으니 나보다는 덜 복잡하고 제약도 적었으려나? 이방인으로 살아야 했던 적이 없으니 덜 혼란스러웠을지도 모른다.


집에 오자 참았던 눈물이 다시 차올랐고 눈물이 글썽이는 날 본 오드리가 놀라 내 어깨를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에디가 다 커서 내 손길이 필요 없어지면, 여기에 남아 이방인으로 늙어가는 것보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낫겠지?”


“뭐?”


“여기 남을 이유가 사라지면 말이야.”


때아닌 질문에 오드리는 말문이 막힌 듯 나를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그런데 한국에 간들 뭐가 다를까? 부모님은 돌아가셨을 테고 친구도 친지도 이미 다 멀어져서 내 옆에는 아무도 없을 텐데.”


“갑자기 이게 다 무슨 소리야?”


“게다가 한국으로 돌아가면 에디도 거의 못 볼 테고….”


“기욤 만나고 오는 거야? 대체 둘이 무슨 얘길 한 거야?”


“이젠 어디에 살든 낯설고 편치 않을 것 같아. 나는 내 인생이 끝까지 이렇게 혼란스럽고 외로울까 봐 겁나.”


이 말을 했을 때 결국 눈물이 터져버렸다.


내 눈물의 무게를 이해한 걸까? 오드리는 내가 진정하고 잠이 들 때까지 잠자코 곁을 지켜주었다.


눈을 떴을 때 오드리는 떠나고 없었다. 에디도 없었다. 식탁 위에는 에디를 본가로 데려가겠다는 메모가 남겨 있었다. 오늘부터 2주간 방학이니 나쁘지 않은 결정이다.


나는 작업 테이블 위에 펼쳐진 사진들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여자의 모습에서 내 미래를 본 후, 세상을 향해 그리고 나를 향해, 하고 싶은 말이 생겼다. 이야기가 떠오르니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나 자신을 위한 작품이 될 것 같은 그림을.


*


이틀 정도 지난 것 같다.


사실 며칠이 지났는지 잘 모르겠다.


어쩌다 보니 햇빛 막이 덧창도 안 올리고 커튼도 닫은 채 지내고 있다.


에디가 없으니 아침 점심 저녁이라는 생활의 큰 틀을 유지할 이유도 없었다.


나는 시간과 관련된 모든 개념을 잃고 먹지도 자지도 않고 그림만 그리고 있다. 지쳐 쓰러질 때쯤 집에 굴러다니는 아무거나 조금 집어 먹고, 손이 더는 움직이지 않을 때만 아무렇게나 구겨져 잠시 쉬었다.


밖에서 몇 번 벨이 울렸지만 나가보지 않았고, 전화는 이미 오래전에 배터리가 다 되었다.


이 정도로 열중한 적이 있었던가?


진작 이렇게 했으면 오드리보다 훌륭한 작가가 됐을지도 모르겠다.


문장을 쓰고 그림을 그리면서 혼자 울고 웃고 있다. 나에게 필요했던 이 시간이 그녀에게도 기쁨을 줄 수 있기를 바라며 나는 그렇게 나를 쏟아부었다.




언제 잠들었는지 잘 모르겠다.


눈을 떴을 때 기욤과 필립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놀라서 몸을 일으키려는 데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다. 사실 눈꺼풀을 지탱할 힘도 없었다. 내가 눈을 뜨자 필립이 안도의 숨을 내쉬며 떨어지는 수액의 양을 조절했다. 매트리스가 녹고 있는 걸까. 늪에 빠진 것처럼 몸이 한없이 침대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필립이 기욤에게 눈인사를 건네고 자리를 떠났다. 목이 너무 마르다. 물을 마시고 싶은데 힘이 없어서 일어날 수가 없다. 기욤, 물 좀 줄래, 입술을 달싹이는 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나를 지켜보던 기욤이 울기 시작했다. 마치 곧 죽을 사람을 대하는 사람처럼. 내가 죽을병이라도 걸린 건가, 더럭 겁이 나며 궁금했지만 금세 만사 귀찮아졌다.


눈이 다시 스르륵 감겼다.


잠들었었는데, 기욤이 나를 깨웠다. 더 자고 싶으니 제발 내버려 두라고 애원했는데도 굳이 일으켜 앉히며 푸르뎅뎅한 수프를 먹으라고 한다. 도저히 먹을 수 없는 무시무시한 초록색이다.


“안 바빠?”


왜 눈만 뜨면 기욤이 보이는지 알 수가 없다. 같이 살 때는 눈만 뜨면 안 보이던 사람인데.


“이거 먹는 거 보고 갈게.”


“나 죽는대?”


“응. 이거 안 먹으면 죽는대. 너 탈진에, 탈수에 정말 죽을 뻔했어.”


“……”


“일주일이야. 알긴 알아?


“......”


“이렇게 대책 없이 작업할 거야? 이럴 거면 일하지 마.”


나는 말없이 수프를 먹었다. 지나치게 건강한 맛이었다.


“이 레시피 네 유튜브에도 꼭 올려. 나만 당할 순 없어.”


기욤이 나를 뚫어지라 바라본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눈치다.


“할 말 있으면 해.”


날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불편하다. 헤어지긴 했지만, 과로로 검게 시들어버린 날 보는 건 싫다.


“말해. 그냥.”


“심장 약은 언제부터 먹은 거야?”


나는 기욤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그 얘기는 정말이지 하고 싶지 않다. 불편한 대화를 멈추기 위해 수프를 빠르게 먹어치웠다. 나의 의도를 눈치챈 기욤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필립이….”


“자, 봐. 다 먹었지? 이제 가.”


나는 기욤의 말을 끊으며 빈 그릇을 내밀었다. 그가 다시 나를 빤히 바라본다.


내가 목표하는 수명은 앞으로 딱 10년이야. 그러니 뭘 조심하라는 잔소리 따윈 필요 없어,라고 진심을 말한다면 기욤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기욤이 말없이 빈 그릇을 받아 들었다. 내가 불편해하는 걸 알아챘는지 잠시 머뭇거리다 화제를 돌렸다.


“에디 데리고 스키장에 갈까 해.”


“뭐?”


상체를 급하게 곧추세우는 날 보며 기욤이 피식 웃었다.


“아들이랑 추억을 쌓으라며? 한번 해 보려고. 남들이 하는 아빠 노릇.”


“나 정말 죽는대? 겁나게 왜 이래?”


“겁은 내가 나지! 생전 처음 하는 일인데.”


“아니, 갑자기 왜?”


“너 이상형이 가정적이고 다정한 배관공이라며? 예전에는 자기 일 열심히 하는 능력 있는 남자라더니.”


“......”


“가정적인 배관공? 까짓 거 못할 것도 없어.”


무슨 의도로 하는 말일까, 천천히 곱씹어 보아도 진의를 알 수 없는 말이다. 내가 미간을 찡그리자 기욤이 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노력할 거야. 한꺼번에 변할 수는 없겠지만.”


그의 푸른 눈동자에서 나온 짙은 빛이 내 눈을 뚫고 들어가 머리를 어지럽힌다. 생각지도 못한 선언에 멍해져서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다.


“그래도 바다로 돌아갈 거야?”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잠시 어리둥절했다.


“그림을 봤어.”


“......”


“허락 없이 봐서 미안.”


“......”


“바다로 돌아간 여자는 육지를 잊고 행복하게 잘 살아?”


이제 어디든 행복은 없어. 추억하는 것일 뿐. 하고 싶은 말은 이랬지만, 그냥 입을 열지 않았다. 어둡기만 한 나의 속내를 굳이 남들에게 내보이진 말자, 이미 다짐했으니까.


피로감이 몰려와 다시 누우려는데 기욤이 말을 이었다.


“슬프고 기뻤어.”


“... 뭐가?”


“널 너무 몰랐던 거. 이제야 좀 알게 된 거.”


“......”


“네가 제자리로 돌아오길 바랐는데, 제자리를 찾아가야 할 사람은 나였어.”


언제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한 걸까.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이런 솔직한 대화는 결혼 후 처음이라 얼떨떨하고 당황스럽다. 아니, 감동했다고 해야 하나. 지금 내가 느끼는 이 복잡한 심경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단어를 찾을 수 있을까?


“내가 내 자리로 돌아가도 될까?”


눈물이 나는데 입은 웃고 있는 내 모습이 거울에 비친다. 이 와중에 좀 더 이쁘게 울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고 있다.


“돌아가는 게 아니라 이제야 찾아가는 게 되겠네.”


갑작스러운 제안에 마음이 산란해졌다. 나는 그냥 못 들은 척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아버렸다. 그가 또 정신없이 나를 흔들기 시작했다. 진실하고 성실한 눈빛으로 9년 전 그날처럼.


“대답도 안 하고 이러기야?”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나 난감해하고 있지만 난 이미 흔들려 버렸다. 그렇다면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카밀은 언제, 어떻게, 무슨 이유로 만났던 거지?”


나의 뜬금없는 질문에 기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그 얘기를 하자고?”


“타당한 이유를 대야 할 거야. 안 그러면 제자리고 뭐고 없을 테니까.”


기욤이 밝게 웃으며 침대 옆에 털썩 앉아 내게 몸을 밀착시켰다.


“너 지금 불어로 말하고 있는 건 알아?”


“떨어져 줄래?”


“좋다. 네가 나한테 불어로 말해서.”


기욤이 영어도 불어도 아닌 한국어로 내게 얘기할 날이 올까? 그때의 나는 어떤 기분이 들까? 기분이 어떻든 그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얼마나 큰 노력을 해야 하는지 잘 아니까.


“너도 한국어 배워.”


“그러려고.”


심술 나서 한 번 해 본 소리였는데 그가 당연한 듯 흔쾌히 받아들였다. 내가 놀란 눈으로 빤히 바라보자 기욤이 한술 더 떴다.


“우리 한국 가서 살아볼까?”


“뭐?”


“에디도 한국어 배워야지. 3년 정도 살다 오자. 좋으면 더 있고. 한국이든 프랑스든, 우리에게 맞는 곳을 찾아보는 거지.”


“필립이 나 곧 죽는대?”


“왜 자꾸 그 소리야?”


“아니면 말이 안 되잖아. 갑자기 어떻게 이래?”


“갑자기가 아니야. 오래전부터 고민했지만 엄두가 안 나서 말을 못 했을 뿐이야.”


꿈같은 계획을 제시하는 기욤을 보니 나의 우주가 또 빙빙 돌기 시작한다. 정말 기욤은 ‘terrible’ 한 남자다.



기운을 좀 차린 나는 그림을 챙겨 앞 건물 2층으로 향했다. 원고를 좋아하지 않으면 어쩌나 마음 졸였는데, 여자는 다행히 몹시 맘에 들어했다.


“제 사진을 많이 활용해서 그리셨네요. 이러니까 정말 제가 주인공 같아요. 내용 연결하시기 힘드셨을 텐데 감사합니다. 글도, 그림도 다 맘에 듭니다. 이렇게 금방 완성하실지 몰랐어요. 남은 돈은 이번 주 중으로 송금해 드릴게요.”


“아니에요. 지난번에 주신 돈으로 충분합니다.”


“네?”


“대신 이 책을 출판하고 싶은데, 어떠세요?”


“출판이요?”


“네.”


“저야, 좋지요!”


여자는 선뜻 출판에 필요한 비용을 투자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리고는 한층 들뜬 표정으로 본국에서도 출판하고 싶다고 말했다.


“작가님 덕분에 회복될 것 같지 않은 상처가 치유되고 있어요. 정말 고마워요.”


“제가 더 고맙습니다.”


“그냥 하시는 말씀이겠지만 듣기 좋네요.”


“진심이에요. 두 번이나 절 구해주셨어요.”


여자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증언해 드린 것 말고 또 뭐가 있나요?”


“아이를 낳으면서 제 알맹이도 다 빠져나간 느낌이었어요. 영영 잃은 줄 알았는데 잃어버린 게 아니란 걸 여사님 덕분에 깨달았어요.”


“그래서 표정이 편안해지셨군요.”


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빙긋 웃었다.


“작업은 계속하실 거죠?”


“그래야죠.”


“앞으로 어떻게 변하실지 기대되네요.”


“저도 궁금해요. 얼마나 많은 실패를 하고 그것들이 저를 어디로 이끌지.”


“세상에나! 시작하는 마당에 무슨 그런 말을 해요?”


“이제야 출발선에 섰으니 앞으로 무수히 실패하겠죠? 실패를 두려워만 했었는데, 이젠 궁금해요. 제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실패를 받아들이고, 또 어떻게 추스르고 다시 일어날지. 그리고 그 끝이 어디일지.”


“좀 밝아지신 줄 알았는데.”


“좀 의연해지긴 했습니다.”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여자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


“시고 떫던 사람이 어느새 이렇게 영글었을까요?”


여자의 질문에 나는 가벼운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나를 지긋이 바라보던 여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럼요.”


“물로 돌아간 주인공은 어떻게 될까요?”


“엔딩 뒤의 이야기는 독자의 몫이지요.”


“작가님이 생각하는 후일담이 궁금해요.”


“글쎄요. 뭍이 그리울 때는 육지로 올라와 그리움을 달래다 물속이 그리우면 다시 물속으로 돌아갈 것 같아요. 이제는 물에서 사는 법도, 뭍에서 사는 법도 아니까요.”


“그럼 육지에서든 물에서든 더는 이방인이 아닌 건가요?”


“스스로 구분 짓는다면 누구나 어디서든 이방인이겠죠. 어떻게 분류하냐에 따라 모두 이방인이 될 수 있으니까요.”


“괴리감은 이민자들만 느끼는 게 아니다?”


나 혼자 외로운 섬이 되어 떠다닌다고 생각했는데, 각자의 세계가 있는 사람은 모두 섬이지 않을까.


“제가 느끼는 불안과 외로움을 객관적으로 바라봤더니 절반은 제 안에서 비롯되었더라고요. 그래서 내 집은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하던 마음을 그 어디든 내 집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바꾸어 보려고요. 책 주인공도 물속으로 돌아가면 알게 되겠죠. 한 번 배운 호흡법은 시간이 지나도 쉽게 까먹지 않으니 겁먹을 필요 없다는 걸.”


여자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제가 이 주인공처럼 삶에 충실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후회되네요.”


“......?”


“저기 보이는 샴페인 브랜드 아시죠? 저기 오너가 제 남편이에요. 우리 관계는 이미 아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끝났는데, 전 아들이 16살이 될 때까지 이혼 도장을 안 찍고 버텼어요. 아들을 다 키워놓고 헤어지려는 책임감도, 가정을 지키려는 노력도 아니었어요. 그냥 자존심 때문이었어요. 그렇게 끝낼 수는 없었거든요. 이혼해야 한다면 위자료라도 많이 받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죠. 그걸 남편도 알고, 남편의 애인도 알고, 심지어 아들도 알았어요. 그렇게 십몇 년을 술과 담배에만 의지해서 인생을 낭비했죠. 그래서 건강도, 시간도, 아들도 다 잃게 되었고요. 오죽하면 이 나이에 틀니를 해야 할 정도로 잇몸이 녹았겠어요? 막상 떠날 때가 되었고 꾸역꾸역 목표도 이뤘는데 패잔병이 되어 돌아가는 기분이에요. 그래서 이 책의 주인공이 후에 어떤 삶을 살지 궁금했어요. 이제라도 닮고 싶어서요.”


너무 큰 고백을 듣고 나니 할 말이 없어졌다. 자신의 인생을 통으로 고해하는 사람에게 감히 어떤 위로를 할 수 있을까. 나는 그저 고개만 가만히 끄덕였다.


“노력한다면 제 인생도 이렇게 울림이 남을 수 있을까요?”



*


스키장에서 돌아온 에디가 오자마자 투덜거린다. 엄마가 같이 갔어야 했는데, 같이 안 가서 자기 스키 방학이 망쳤다는 둥, 물어내라는 둥, 계속 심술을 부리고 있다.


“그렇게 재미없었어?”


“스키는 재밌었는데, 아빠는 싫었어.”


“왜?”


“다 자기 맘대로 해. 뭐 먹고 싶냐고 묻고는 자기가 먹고 싶은 거 고르고, 스키 수업 끝나는 시간보다 늘 늦게 데리러 오고, 내가 스키 타고 싶을 때는 피곤하다고 나중에 하자 하고, 내가 졸릴 때는 스키장에 자러 왔냐고 당장 나가자 하고. 스파에 데려가서 혼자 뜨거운 사우나에만 들어가 있고.”


“좋았던 것도 있었을 거 아냐?”


“엄마, 어디가? 나 이제 아빠랑 살아야 하는 거야?”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니면 왜 자꾸 아빠랑 둘이 뭘 하라고 해?”


“그런 거 아냐. 그냥 아빠가 너랑 둘이 추억을 쌓고 싶댔어.”


“아, 됐어! 그냥 예전처럼 하라고 해!”


“너 아빠랑 노는 애들이 부럽다며?”


“그거야 어릴 때지!”


“너 아직 여덟 살이거든?”


“그냥 아무것도 안 하는 아빠가 더 좋아. 잘하지도 못하면서 자꾸 뭘 하려고 하니까 귀찮고 어색해.”


“에디, 엄마가 너한테 같이 요리하자고 해놓고 손대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뭘 하는 게 더 귀찮고 방해만 된다, 이러면 기분 어때?”


“... 나쁘지.”


“같이 하는 줄 알고 신난 너한테 실수 좀 한다고 그냥 보기만 하라고 해도 돼?”


“안 되지.”


“좀 서툴러도 기다려 줘.”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조용하던 에디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빠는 계속 못 할 것 같은데 큰일이네.”


어쩌면 에디의 예상이 맞을지도 모른다. 마음이 변했다고 살던 습관까지 순식간에 바뀌지는 않으니까. 아들의 부정적인 예측에 무모하게 희망을 심어줄 수도, 동조할 수도 없는 나는 그냥 빙그레 웃고 말았다.


“엄마도 그렇게 생각하지?”


“마법처럼 변하지는 않겠지.”


변하는 것보다 변하지 않는 부분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기다려도 나아지지 않고, 나중엔 노력도 안 하고 예전이랑 똑같아지면 어떻게 할 거야? 그때는 또 떠날 거지?”


“에디, 미래의 행복을 기대하며 상상하는 건 좋지만, 아직 오지 않은 불행을 추측하며 걱정할 필요는 없어.”


내 대답에 에디가 고개를 떨구었다. 아들이 원하는 대답은 확고한 약속일 것이다. 조건을 달지 않는 약속. 그 약속을 끝까지 지킬 수 있을지 없을지 나도 확신할 수는 없지만, 미리 재단하며 약속하는 걸 조심하진 않기로 했다.


“엄마가 성급하게 집을 나와버린 건 정말 잘못했어. 앞으로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약속할게.”


에디가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나는 에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귀에 소곤소곤 속삭였다.


“에디? 오늘은 머리 좀 감자.”


우리는 계속 못 하는 게 많을 것이다. 변하기로 했다고 하루아침에 변할 리도 없고, 관계가 극적으로 좋아질 리도 없다. 하지만 상대가 내 마음을 들여다보기 시작한 것만으로도 많은 것이 변했다. 그를 보는 내 시각도, 내 삶을 바라보는 내 관점도. 흐르는 시간을 버티는 자세로 기계적으로 살던 나에게 용기라는 자유의지가 생겼고 어쩌면 삶이 다시 재미있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낭만도 생겼다.

오래전에 끝난 이야기의 마지막 문장에 마침표를 찍었다. 미련과 두려움으로 지금까지 미뤘었는데. 마음이 정리되고 나니 전례 없이 홀가분하다. 나는 이제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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