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변해가는 렁보 씨
<연재소설> 땡감이 영그는 시간
위층에서 우당 쾅쾅 무언가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며칠 잠잠하다 싶었는데 또 시작인가 보다. 소리는 침실을 가로지르며 났는데, 두 사람이 밀치며 싸우다 넘어지는 소리 같기도 하고, 컹컹대는 소리와 새된 소리가 함께 들리는 것이 렁보 씨네 개와 고양이가 가구를 넘어뜨리는 건가 싶기도 했다. 아마두 씨가 떠난 직후 렁보 씨 집에서 이런 소리가 자주 들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오늘은 소음이 이내 잠잠해졌다.
산란한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사진을 분류하며 머리를 쥐어짜고 있을 때 벨 소리가 들렸다. 외시경으로 밖을 내다보니 건물의 유리 입구 뒤로 렁보 씨가 서 있는 게 보였다. 그는 오늘도 비틀거리며 문고리를 잡고 있다. 나는 인터폰을 들어 무슨 일이냐 물었다.
“미안합니다. 출입구 좀 열어주시겠어요? 열쇠를 안 가지고 나와서요.”
또? 나는 의아해하며 버튼을 눌러 건물의 출입구를 열어주었다. 요새 툭하면 문을 열어달라고 우리 집 벨을 누르는데, 이것도 아마두 씨가 이사 나갈 즈음부터 시작되었다. 대개 건물 출입구 열쇠랑 집 현관 열쇠를 같이 걸고 다닐 테니, 건물 열쇠가 없다면 집 열쇠도 없을 텐데 집에는 어떻게 들어가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렁보 씨가 우리 집 벨을 누르는 빈도가 잦아졌다. 하루에도 서너 번씩. 근래는 요리 중에도 달려 나가 문을 열어줘야 했고, 그림을 그리다가도 문을 열어줘야 했다. 언제부턴가 나는 이유를 묻거나 인사를 건네는 일 따위는 생략하고 벨이 울리면 기계적으로 버튼만 눌러 문을 열어주었다. 렁보 부인도 이제 파리로 출근하지 않고 집에서 일한다고 들었는데, 왜 내가 문시중을 들어야 하는 걸까. 열쇠는 왜 매번 까먹고 나가서 사람 귀찮게 하는 걸까. 렁보 씨와 진지하게 얘기 좀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에 취해 문 앞에서 비틀거리는 렁보 씨를 붙잡고 따져 물을 수는 없어서 매번 포기하고 미루다, 반나절 동안 다섯 번의 벨이 울렸을 때, 결국 현관을 열고 나가 렁보 씨와 대면했다.
나와 그의 거리는 단 두 발자국. 투명한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나는 그와 마주 섰다. 유리문 너머로 열쇠 한 꾸러미와 씨름 중인 그를 보며 오늘도 대화하긴 글렀구나 직감했지만, 집으로 돌아 들어가진 않았다.
기우뚱대는 그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자세히 알고 싶지 않아 애써 외면하던 모습을 지켜보는 건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다. 수십 개나 되는 열쇠를 하나하나 열쇠 구멍에 넣으며 문을 열려고 애쓰는 그를 보고 있자니 미간이 절로 구겨지고 한숨이 나왔다. 저 많은 열쇠가 다 어디서 났을까, 왜 저렇게 한 꾸러미에 다 묶어 두었을까. 궁금하고 답답한 와중에 두려움과 걱정이 함께 밀려왔다.
그는 한 발자국 앞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는 나를 눈치채지 못했다. 내가 안에서 문을 열자 그의 몸이 앞으로 쏠리며 비틀거렸다.
“괜찮으세요?”
넘어지려던 렁보 씨의 팔을 잡았을 때 그의 재킷 주머니에서 투명한 액체가 주르륵 흘렀다. 나는 놀라서 그의 팔을 놓았고, 그가 휘청거렸다. 내가 다시 그의 팔을 잡자, 그는 괜찮다고 손짓하며 간신히 계단을 올라갔다.
그의 집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을 때, 나의 시선은 다시 바닥으로 향했다. 렁보 씨의 주머니에서 흘러내린 액체의 정체가 궁금했지만 차마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냄새를 맡고 탐색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렁보 씨의 걸음걸이는 눈에 띄게 위태로워졌다.
하루는 건물 입구를 통과하는 그의 움직임이 너무 불안해 보여 복도에서 잠시 지켜보았다. 비틀대며 계단을 오르는 그의 발걸음이 아슬아슬했다.
그가 계단을 다 올라간 걸 확인한 후 나도 집으로 들어가려는데 다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급히 계단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때 렁보 씨가 벌목된 나무처럼 뻣뻣하게 선 자세로 계단 아래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눈앞에서 사람이 추락하는 걸 본 나는 비명을 내질렀고, 내 고함이 건물 전체에 메아리쳤다. 살가죽에 싸인 뼈가 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는 생각보다 훨씬 날카로웠고, 계단을 덮치며 쓰러지는 키 큰 남자의 팔다리는 영화에서 연출된 장면처럼 가지런히 놓이지 않았다.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대던 나는 렁보 씨를 간신히 벽에 기대어 앉혔다. 그의 손과 이마에서 피가 흘렀다. 구급차를 부르려 했지만, 그가 한사코 말렸다.
아마두 씨가 이사한 후 아직 새로운 세입자가 들어오지 않았고, 렁보 부인도 집에 없는 것 같으니 나 말고는 이 사태를 수습할 사람이 없었다. 추락한 충격 때문인지, 술에 취해서인지, 그는 몸을 가누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내가 그를 부축하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꼬챙이처럼 마른 사람이었지만 장신의 술 취한 남자를 부축하는 건 쉽지 않았다. 얼마나 무거운지 다리가 후들거리고 곡소리 같은 신음이 절로 나왔다.
열댓 개 되는 계단을 간신히 올라 그의 현관 앞에 다다랐을 때 열쇠 수십 개가 매달린 꾸러미가 떠올랐다. 만약 렁보 씨가 그 열쇠 꾸러미를 내게 내민다면 두말하지 않고 앰뷸런스를 불러야지 생각하며 그에게 말했다.
“집 열쇠 좀 주세요.”
“열려 있습니다.”
그의 발음은 알아듣기 힘들 만큼 어눌했다.
“네?”
내 되물음에 그가 현관을 향해 고갯짓 했고, 그곳으로 시선을 옮기니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보아하니 현관을 잠그지 않고 사는 눈치다. 렁보 씨가 건물 입구만 통과하면 집으로는 쉽게 들어가는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가장 가까운 의자에 그를 앉혔다.
“부인께 전화해야겠어요. 번호가 어떻게 되시나요?”
“모릅니다.”
“모른다고요?”
“네.”
“아니...”
순간 렁보 부인이 전화번호를 바꾸고 집을 나가버렸나 하는 의심이 들었다. 젊은 동유럽 여자가 나이 지긋한 프랑스 남자와 결혼해 살다가 시민권을 취득한 후 헤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전화해도 안 받을 겁니다.”
“왜요?”
“몰라요. 전화를 안 받아요.”
그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비틀비틀 식탁으로 가더니 그 위에 놓인 하얀 비닐봉지를 열어 솜과 소독약을 꺼냈다. 수전증이 있는 사람처럼 손을 덜덜 떨며 솜을 떨어뜨리기에 내가 대신 얼굴과 손에 난 상처를 소독해 주고 밴드를 붙여 주었다.
“안 되겠어요. 병원에 모셔다 드릴게 요.”
“아닙니다. 그냥 넘어진 건데요, 뭘. 그럴 필요 없습니다.”
이 정도 거리라면 술 냄새가 날 법한데, 향수 냄새 외에는 그 어떤 냄새도 나지 않았다.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취했는데 술 냄새가 안 나는 게 가능한가? 갑자기 술에 취한 게 아니고 약에 취한 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니 렁보 씨는 비틀대는 와중에도 술 냄새를 풍긴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약에 취한 사람이 이렇게 대화를 이어갈 수 있을까? 혀가 꼬여 알아듣기 힘들긴 해도 그는 내 질문을 제대로 이해하고 타당하게 대답하고 있다.
그렇다면 파킨슨병 같은 질병으로 운동 능력을 담당하는 뇌의 영역이 손상된 건가? 사실 그의 걸음걸이는 비틀댄다기보다는 안 넘어지려고 안간힘 쓰며 발을 조금씩 내딛는 방식이었다.
그가 몸을 제대로 못 가누는 원인이 뭐든 지금 렁보 씨를 혼자 집에 두고 가는 건 위험해 보였다.
나는 고개를 들어 집을 휘휘 둘러보았다. 놀랍도록 깨끗하게 정돈된 집.
중독자나 환자가 사는 집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눈길이 테라스에서 멈췄다.
1인용 매트리스가 벽에 세워져 있었다. 지름이 족히 50cm쯤 되는 옅은 연갈색 얼룩이 남아있는 매트리스다. 무슨 얼룩일까. 와인을 쏟은 얼룩이면 다행인데….
그때 혼란스러움을 단박에 두려움으로 바꿀만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현관 쪽으로 다가가 벽에 걸린 인터폰을 바라보았다.
“인터폰 선을 자르셨네요?”
이걸 물을 때가 아니라 못 본 척하고 이 집을 나가야 할 때 같지만 마음을 다잡고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내가 잘랐습니다.”
그동안 왜 우리 집 벨을 눌렀는지 알 것 같았다. 잘린 선이 대롱거리는 인터폰을 보니 온몸에 한기가 느껴졌다.
정말 렁보 부인이 잘랐을까? 렁보 씨가 자른 건 아닐까? 대체 그동안 이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 잦은 소음이 두 부부가 몸싸움하던 소리였나? 그렇다면 저 매트리스의 얼룩도 와인이 아니라 혈흔일 수 있다. 렁보 부인이 집을 나간 게 아니라 렁보 씨랑 싸우다가 죽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전화번호를 모른다고 한 걸 수도….
갑자기 살갗이 조이듯 오싹해지며 이 집에서 당장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집 안쪽 어딘가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빨간색 소파 위에 갈색 줄무늬 고양이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식탁으로 되돌아와 볼펜을 집어 들었다.
“혹시 종이 있으세요? 부인께 메모를 좀 남기고 싶어요.”
렁보 씨가 고개를 천천히 돌려 TV 아래 수납장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시선이 닿은 곳으로 향했다.
“무슨 일이시죠?”
갑자기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2층 계단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렁보 부인이 강아지를 안고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렁보 부인?”
나는 동그래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부인이 집에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집에 있었으면서 복도를 가득 메운 내 비명과 집에 들어와서도 병원에 가자, 부인 전화번호를 달라 등 실랑이하는 소리를 못 들은 척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계단을 다 내려온 그녀의 시선이 신발은커녕 양말도 안 신은 내 맨발에 꽂혔다. 잠시 멈췄던 그녀의 눈길이 다시 내 시선과 맞닿았을 때, 그녀는 동요 없는 목소리로 무슨 일이시죠 하고 재차 물었다. 전혀 놀라지 않는 그녀를 보니 맨발로 뛰어나와 그를 둘러메고 계단을 올라 집까지 들어온 내가 과한 건가 헷갈렸다.
렁보 부인이 차갑게 남편을 쏘아보았다.
“계단에서 넘어지셨어요. 심하게 넘어지셔서 병원에 가보셔야 할 것 같아요.”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녀는 넘어진 정황에 대해 궁금한 게 하나도 없는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남편의 어깨를 눌러 식탁 의자에서 못 일어나게 한 후 나를 현관으로 인도하기 급급했다. 어쩐지 불청객이 되어 쫓겨나는 느낌이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사람마냥 기분도 더러웠다.
복도의 돌바닥이 맨발에 닿자 찬 기운이 그대로 온몸으로 퍼졌고 그제야 나의 현실로 돌아왔다. 부인도 저렇게 침착한데, 왜 생판 남인 내가 이리 수선을 떨어야 하나, 변해가는 그를 보면서 뭐든 해줘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던 날들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내 뒤를 따라 나와 나를 배웅하던 렁보 부인이 입을 열었다.
“그이가 얼마 전부터 또 술을 마시기 시작했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그이를 멈출 수가 없어요.”
원인이 술이라는 사실이 석연치 않으면서도 일면 다행이다 싶었다. 정말 술 때문이라면 렁보 부인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인터폰 선을 자르고, 사람이 계단에서 넘어졌는데도 걱정하는 기색조차 없는 건 너무하지 않나? 떨떠름한 내 표정에 그녀가 부연 설명을 이어갔다.
“간신히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난 사람인데, 어느 날 샴페인을 들고 오더라고요. 그의 친구들은 절대로 술을 선물하지 않는데 계속 선물 받은 거라고 우기고.”
“아...!”
심장이 쿵 떨어졌다. 혹시 내가 준 샴페인을 말하는 건가?
“그게... 언제쯤이죠?”
“글쎄요. 몇 달 된 것 같은데요.”
내가 놀란 얼굴로 렁보 부인을 바라보니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많이 놀라셨죠? 소란 피워서 죄송해요.”
그녀가 남편에 대해 계속 하소연하는데 전혀 들리지 않았다.
내 샴페인 선물을 한사코 거절하던 렁보 씨의 모습만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내가 이 모든 사단의 시작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넋 나간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는 나에게 렁보 부인이 재차 사과했다.
“제가 뭐 도울 일이 없을까요?”
미안합니다, 백 번 천 번 사과하고 싶지만, 감히 내가 술을 선물했다는 말은 꺼내지도 못한 채 집으로 도망치듯 들어와 버렸다.
몸은 도망쳤지만, 정신은 온통 윗집에 머물렀다. 완벽한 선의였는데 철저하게 불행만 초래했다는 사실이 마음을 무겁게 내리눌렀다.
그날 이후 나의 온 신경은 다시 윗집에 쏠리기 시작했다. 예전에도 비틀거리는 렁보 씨를 볼 때면 걱정이 됐었는데, 이제는 걱정을 넘어 죄책감이 들었다.
위층에서는 꽤 잦은 빈도로 커다란 소음이 들렸고, 그 소리는 사람이 넘어지는 소리가 분명했기에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내 심장도 단전 아래까지 처박혔다. 올라가 봐야 하나, 부인도 있는 데 내가 참견하는 건 과하지 않을까, 그냥 있는 건 너무 무심한 거 아닌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이런 나의 고민은 렁보 부인이 커다란 트렁크 두 개를 들고 집을 나가는 걸 본 후 더 무거워졌고, 무거워진 만큼 단순해졌다.
렁보 부인이 집을 나간 이상, 이 건물에 그의 안위를 살필 수 있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기에 렁보 씨가 넘어져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나면 나는 위층으로 달려가 문을 두드렸고, 그는 문 뒤에서 괜찮다고 대답했다. 다음 날이 되면 야구 모자를 눌러쓴 렁보 씨가 장바구니를 들고 마트로 향하는 모습이 창밖으로 보였고, 사람이 그렇게 넘어지고도 저렇게 멀쩡할 수가 있구나, 놀라우면서도 안도되었다.
충격적인 경험도 반복되면 익숙해지는 건지, 늘 걱정한 것보다 멀쩡한 모습으로 장을 보고, 배달 음식을 수령하는 그를 보며 어느새 나는 위층에서 넘어지는 소리가 들려도 달려가지 않게 되었다. 사실 죄책감으로부터 멀리 도망가고 싶었고, 내가 걱정하고 참견해도 바뀌지 않는 상황이 답답해서 그냥 모른 척하고 싶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별 어려움 없이 상황을 외면할 수 있었지만, 걱정과 죄의식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수는 없었다.
하루하루 눈에 띄게 야위고 망가지는 렁보 씨를 보는 건 고역이었다.
하루는 상의가 토사물로 범벅이 되고 소변인지 술인지 모를 액체로 아랫도리까지 흠뻑 젖은 렁보 씨를 마주쳤다. 그는 건물 입구에서 우편함을 열려고 낑낑대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우편함 열쇠를 잃어버렸다며 내 열쇠로 열어 봐 달라기에 해봤지만 될 리가 없었다. 그는 고맙다는 말을 하고 집으로 올라가려 계단으로 몸을 돌렸다.
“렁보 씨, 제가 병원에 같이 가 드리고 싶어요.”
그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빨갛게 충혈된 눈과 푹 꺼진 눈자위 때문에 사람이 더 퀭해 보였다.
“왜요?”
“죄송해요. 샴페인을 선물하는 게 아니었는데… 정말 죄송해요.”
나는 눈물을 글썽이며 머리 숙여 사과했다. 내 사과에 그는 대답 없이 고개를 가로젓더니 건물 입구를 통과해 계단을 올라가 버렸다.
그날 이후 장을 볼 때 빼고는 생전 외출하지 않던 그가 갑자기 멀쩡한 모습으로 강아지를 산책시키고, 자전거를 손보는 등 예전의 렁보 씨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도 단 이틀뿐, 다시 위층에서 렁보 씨가 넘어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나는 운명의 그림자가 그의 목전에 도달했음을, 오늘이 되는 내일이 되든 시간 차이만 있을 뿐 그는 곧 죽을 것이고, 의료진이든 나든 그 누구든 그의 죽음을 잠시 늦출 수는 있어도 다가온 운명을 멀리 물리칠 만큼 그를 변화시킬 수는 없음을 무의식적으로 예상했던 것 같다.
새벽 2시, 고막을 찢을 듯한 초인종 소리에 잠이 깼다.
심장이 터질 듯 쿵쾅거렸다.
간신히 뜬 눈 사이로 네온사인같이 밝은 빛이 비집고 들어왔다.
잠에 취해있었음에도 렁보 씨에게 사고가 났음을 직감했다.
현관을 향해 걸어가는데 잠기운 때문인지, 온몸을 장악한 두려움 때문인지 다리가 휘청거렸다.
인터폰을 들자마자 소방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고, 나는 서둘러 인터폰의 열림 버튼을 누르며 현관문도 급히 열었다. 깜깜한 복도 끝, 건물의 유리 입구에는 소방관들이 서 있었다. 분명히 문을 열었는데 소방관들은 계속 유리문 뒤에 서서 당장 열라고 소리치고 있다.
“열었어요!”
“문 말고 창문이요.”
소방관이 내 침실 방향으로 손짓했다. 갑자기 왜 방 창문을 열라는 건가 의아했지만, 급히 침실로 달려가 창문을 열었고, 창문이 열리자마자 소방관 한 명이 안으로 훌쩍 넘어 들어왔다. 그는 서둘러 방을 가로질러 현관을 통해 복도로 나갔다. 그가 복도로 나가자 센서 등이 켜졌고, 어둠이 걷히면서 건물 입구 앞에 쓰러져 있는 렁보 씨가 보였다. 바닥을 흥건하게 적신 빨간 피 웅덩이도.
“현관 닫으세요!”
소방관이 하얗게 질린 채 현관에 서 있는 날 보며 소리 질렀다.
나는 얼른 문을 닫고 바닥에 쪼그려 앉아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지난번처럼 또 계단에서 넘어진 건가, 이 밤에 대체 왜 계단을 내려온 걸까 등등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소방관의 명령대로 문을 닫기는 했지만 렁보 씨가 괜찮은지 알아야 했다.
나는 펄떡대는 가슴을 진정하며 외시경으로 복도를 내다보았다. 렁보 씨의 하체는 여전히 계단에 걸쳐 있었고, 상체는 건물 입구를 가로막고 있는 그야말로 끔찍하게 불편한 자세였다. 나는 너무 놀라 문 앞에 다시 주저앉아 버렸다. 침실 창으로 새어 들어온 경광등 불빛이 산란한 정신을 더욱 정신없게 만들었다.
커튼 사이로 창밖을 내다보았지만, 렁보 씨를 구급차로 옮기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왜 이렇게 시간이 걸리는 걸까. 이미 소방관들도 도착했고, 구급차도 왔는데. 신속하게 환자를 이송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 답답했다.
다시 외시경으로 복도를 내다보니 렁보 씨는 여전히 지독하게 불편한 포즈로 찬 바닥에 방치되어 있었고, 렁보 씨가 막고 있는 입구를 조금 열고 그 틈으로 소방관들이 몸을 욱여넣으며 복도로 들어오고 있었다. 왜 다친 사람을 찬 바닥에 내버려 둔 채 저렇게 건너 들어왔다 다시 건너 나가는 걸까, 어째서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는 걸까, 밖에 서 있는 저 많은 인원은 왜 자기들끼리 수다만 떨고 그를 병원으로 옮기지 않는 걸까 의아하고 화가 났다.
불안한 마음에 문 앞을 서성이다 다시 외시경으로 복도를 내다보니 소방관 세 명이 렁보 씨를 들어다 우리 집 현관 앞에 가지런히 눕히고 있었다. 병원으로 가야 할 사람을 다시 찬 바닥에 눕히는 이유를 물으려 문을 열려했을 때 흰 천이 펄럭이며 동그란 외시경을 하얗게 채웠다. 하얀 세상이 그렇게 렁보 씨를 고이 덮어 버렸다.
다음 날 집으로 경찰이 찾아왔다. 그는 전날 밤 우리 집 창문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나에게 설명해 주었다.
밤늦게 귀가하던 이웃이 유리문 뒤로 렁보 씨가 쓰러져 있는 걸 발견해서 신고했는데, 입구를 막은 채 쓰러져 있어서 문을 열 수 없었고, 1층인 우리 집을 통해 복도로 나가야 했다고 말했다.
“문을 열다가 부상이 심해질 수 있으니 조심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미 돌아가신 상태였지요.”
“......”
“렁보 씨는 오후 6시경, 저녁으로 배달된 피자를 수령하려 1층으로 내려왔다가 다시 집으로 올라가던 중 추락한 거로 보입니다.”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하는 경찰관 뒤로 굳어가는 렁보 씨의 피 웅덩이가 보인다.
“오후… 6시요?”
“네, 피자 배달원이 6시에 왔었다고 진술했습니다. 피자 박스가 그대로 바닥에 떨어져 있었으니 배달받자마자 사고가 났을 테고요. ”
그 시간에 나는 뭘 했더라. 고기를 굽고 채소를 썰며 내 일상을 살고 있었을 것이다. 그의 일상을 짓밟은 장본인일 수도 있는 나는 그가 죽어가는 동안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제가 일찍 발견했다면 살 수도 있었겠네요?”
“그랬을 수도 있겠죠.”
“……”
절망하는 내 표정에 경찰관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미 추락한 순간 유명을 달리했을 거로 추정합니다.”
“렁보 씨가 알코올 문제로 고생하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뭘 해야 할지, 뭘 하는 게 맞는 건지 고민만 했어요. 고민하지 말고 그냥 경찰에 알리고 병원으로 데리고 갔었어야 했는데…”
“아니에요. 이웃들은 그분을 입원시킬 권리가 없습니다. 본인이 원하지 않는 한 가족도 입원시킬 수 없는걸요.”
“위험하다는 걸 알고도 지켜만 본 게 잘못이 아니라고요?”
“이웃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니까요.”
경찰의 말을 듣는 순간 창피하게도 안도되었다. 그러면서 두려웠다. 마음에 병이 생겨 바른 판단을 할 수 없는 사람을 도울 방법이 없는 게 맞는 걸까? 차갑고 냉정한 법 덕분에 나의 죄책감은 한결 가벼워졌지만 철저하게 무력해지기도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뭔가를 시도했어도 바꿀 수 없었다는 것. 우리가 이 세상에 할 수 있는 일이 참 별로 없다는 것.
수도관이 모여있는 벽장문 옆으로 붉은 피가 흥건하다. 렁보 씨가 내게 수도관 밸브에 대해 알려주었던 바로 그곳이다. 나의 시선이 머문 곳으로 몸을 돌린 경찰은 곧 사람을 보내 복도를 치워 주겠다는 말을 하고는 건물 입구를 활짝 열어놓았다.
바람과 함께 비릿한 피향이 콧속으로 범람해 들어왔다. 나는 멍청히 서서 뒤돌아 가는 경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경찰의 약속과 달리 청소 요원은 오지 않았고, 주말 내내 방치되었던 피 웅덩이는 점점 더 굳어버렸으며, 그 위로 날파리들이 날아들었다. 아직 겨울바람이 차가운 2월 초, 이 파리들은 대체 어디서 날아온 걸까 궁금해만 하며 나는 이번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