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쌍안경의 속셈
<연재소설> 땡감이 영그는 시간
모에카가 떠난 지 3주가 되어간다. 대체 언제쯤 돌아올 거냐고, 오긴 할 거냐고 묻고 싶지만, 미안하다는 문자를 보낸 후 나는 그녀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궁금하다고 내가 가늠할 수조차 없는 그녀의 상황을 헤집을 수는 없다.
몇 날 며칠 계속되던 겨울비가 그치고 두꺼운 구름 사이로 해가 모습을 드러냈다. 학교 정문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가는 데 눈부신 햇살 아래 필립이 보였다. 반가움과 함께 마음이 불편해졌다. 인사해야 하나 못 본 척해야 하나 잠시 머뭇거리다 용기 내어 필립에게 다가갔다.
내가 인사하자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은 표정이다.
“나 심장이 계속 이상해.”
조심스레 털어놓자 필립이 눈살을 찌푸리며 나를 보았다.
“약은 잘 먹고 있어?”
“응.”
“증상이 어떤데?”
“너만 보면 무서워서 가슴이 두근거리고, 모에카만 생각하면 심장이 찢어질 듯 아파.”
필립이 어이없다는 듯 짧게 코웃음을 뱉었다.
“가슴이 두근거릴 때면 눈물도 나.”
“다음 주말에 온대.”
내가 놀란 눈으로 말을 잇지 못하자 필립이 계속 말을 이었다.
“왜 갔는지는 알고 있지?”
“... 응.”
“......”
“혼자... 오는 거야?”
“그러기로 했대.”
필립이 내게서 시선을 거두고 교문을 바라보았다. 나는 교문이 열리기 전에 준비해 둔 말을 황급히 꺼냈다.
“필립, 사실 모에카가 일본에 간 건 다 내 탓이야.”
그는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직접 가서 아이랑 시간을 보내보라고, 그리고 데려올지 말지 결정하라고 조언했었어. 아니,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했어.”
“뭐?”
“다 내 탓이야. 그러니까 모에카 미워하지 마.”
얼굴이 울그락푸르락한 필립을 도저히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시선을 발끝에 두었다.
“도대체 왜 그랬어? 그럼 나엘은 어쩌라고? 네가 어떻게 우리한테 이럴 수 있어?”
“미안해. 정말 미안해.”
얼굴이 터질 듯 벌게진 필립이 나를 등지고 교문 쪽으로 향했다.
“나처럼 될까 봐 그랬어. 자책하고 후회할 일이 많아지면 옆 사람을 원망하게 되거든.”
내 말에 필립이 발길을 멈추었다.
“너랑 모에카는 오래오래 잘 살아야지.”
이 말을 하는 데 갑자기 울컥했다. 가여운 내 결혼이 떠오른 것도 같고, 나의 이별이 더욱 선명해진 것도 같았다.
“그러니까 화는 나한테 내고, 모에카 오면 따뜻하게 맞아줘.”
멈춰 선 그에게 다가갔지만, 필립은 여전히 바닥만 바라보았다.
“나 주치의 바꿔야 해?”
내가 조심스럽게 묻자, 필립이 고개를 들어 나를 흘겨보았다.
“약 잘 먹어.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바로 전화하고.”
그는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머금고 나엘을 향해 빠르게 걸어가 버렸다.
에디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한 여자가 우리 집 앞을 서성이다 나를 발견하자마자 굳은 얼굴로 인사하며 다가왔다. 분명히 어디서 본 얼굴인데 누군지 기억나지 않는다.
“이 그림, 그쪽이 그린 거죠?”
그녀가 대뜸 낯익은 그림 세 장을 앞으로 내밀었다. 보아하니 앞 건물 2층에 사는 여자다.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어 그냥 가만히 서 있었다.
“당신 그림 맞지요?”
“글쎄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내게는 중요한 문제예요.”
뭐가 중요하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나는 에디에게 열쇠를 건넸다.
“에디, 먼저 집에 들어가 있을래?”
에디는 나와 여자를 번갈아 보기만 하며 움직이지 않았다.
“엄마도 금방 들어갈 거야.”
에디가 집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한 후 그녀에게 되물었다.
“왜 자꾸 저를 염탐하시는 거죠?”
“그럴만하니까 그러겠죠?”
“저도 그릴 만하니까 그렸어요. 남을 몰래 훔쳐보는 게 얼마나 추한지 아셔야 할 것 같아서.”
“추... 추해요?”
내 말에 충격받았는지 그녀가 입을 동그랗게 벌렸고, 그 안으로 까맣게 죽어가는 앞니가 살짝 보였다. 그녀의 앞니를 보자마자 치과 대기실에서 만났던 여자가 떠올랐다. 그 여자가 이 여자다.
“그럼 제가 뭘 봤는지도 아시겠네요?”
“......”
나는 합죽이처럼 입을 딱 다물어 버렸다. 담요에 불이 번지는 걸 보고도 내버려 둔 나를 주시하던 쌍안경이 떠올랐다.
“그날 밤, 본인이 한 일을 그리면 더 재미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지금 날 협박하겠다는 건데……. 의도는 파악했지만 대응할 묘수가 떠오르지 않는다.
“내일 저희 집으로 좀 오셔야겠어요. 이번 일에 관해 얘기를 나누고 싶거든요.”
“제가 왜 그쪽이랑 그 일에 관해 얘기를 나눠야 하지요?”
“그럼 경찰이랑 얘기할까요? 일이 너무 부당하게 흘러가면 안 될 것 같아서 말이죠.”
염탐하든지 말든지 내버려 둘 걸 또 괜히 벌집을 건드려서 피곤하게 됐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내일 아침 에디를 학교에 보내고 찾아가겠다 한 후 간신히 그녀에게서 빠져나왔다.
집에 돌아와 그녀가 뭘 원하는 걸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뻔한 목적이라면 돈일 것이고, 조금 고차원적인 목적이라면 화재가 커진 건 나의 잘못도 있으니 경찰서에 가서 제대로 진술하라는 설득일 것이다.
이 두 가지 모두 내가 수용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어떤 경우가 됐든 경찰이 개입하는 순간이 오면 나는 무조건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오리발을 내밀기로 마음먹었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건, 내가 곤란해질 만한 증거를 그녀가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것. 그 경우만 아니길 바랄 뿐이다.
*
타인의 집에 처음 방문할 때는 빈손으로 가지 않는 게 예의지만, 초대받아 가는 상황이 아니니 뭘 들고 가기도 우스운 일이다.
잔뜩 굳은 얼굴로 문이 열리길 기다리며 어떤 상황이 기다리고 있을지 가슴 졸이고 있었다. 남들도 이렇게 피곤하게 살까. 삶의 태도를 바꾸든지, 시골로 내려가 혼자 조용히 살든지 해야겠다고 다짐할 즈음 문이 열렸고, 나와 다르게 아주 밝은 표정의 여자가 고대하던 손님을 맞듯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녀의 반응이 너무 어이없고 당혹스러워서 주춤거리는데 그녀가 내 팔을 잡아당겼고, 나는 그렇게 그 집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집안 풍경은 굉장히 특이했다.
벽에는 온통 그림이 걸려있었고, 그 아래에는 샴페인과 와인병이 빼곡히 진열되어 있었다. 다 마신 빈 병을 왜 안 버리고 저렇게 세워둔 건지, 술고래인 것도 자랑할 일인가, 아니면 요즘은 이런 실내장식이 유행인 건가, 이해할 수 없었다.
줄지어있는 술병을 어리둥절하게 바라보고 있자, 그녀는, 샴페인 한잔하실래요? 물었다. 아침 댓바람부터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러면 차 드릴게요.”
우리는 차를 마시며 도란도란 얘기할 사이가 아니다. 나는 이 불편한 대화를 어서 끝내고 이 집에서 나가고 싶다.
“차는 됐으니 그냥 하실 말씀만 하세요.”
“왜요? 저랑 차 마시는 게 불편하세요?”
“네. 그래서 얼른 끝내고 나가고 싶어요. 뭘 원하시는 거죠?”
“글쎄요?”
“돈을 원하신다면 소용없어요.”
왼쪽 입고리만 비쭉 올리며 웃는 모습이 영 야비해 보인다.
“왜요?”
“먹고 죽을래도 없으니까요.”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찬찬히 훑어본다. 다 아니까 거짓말 말라는 표정.
“이 레지던스 사람 대부분이 당신 남편을 알 걸요?”
기욤 얘기에 내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나는 볼 수 없었지만, 그녀가 갑자기 큰 소리로 웃는 걸 보니 꽤나 우스꽝스러운 표정이었음이 분명하다.
“결국, 돈이군요?”
그녀가 웃음을 거두고 줄지어있는 샴페인 병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걸 보고도 제가 돈이 필요한 사람으로 보이세요?”
빈 샴페인 병은 모두 고급 샴페인 브랜드였고, 그중에서도 구하기 힘든 빈티지 샴페인이거나 블랑 드 블랑(blanc de blanc)이었다.
“그럼 뭘 원하시는 거죠?”
“저는 그림을 좋아해요. 그래서 배워도 봤는데, 영 소질이 없더라고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뚱딴지같아서 잠시 어리둥절했다. 내가 눈살을 찌푸리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직접 그리는 건 포기했어요. 대신 그림 속 작가의 감정을 읽기 시작했어요. 작품이 담고 있는 이야기를 제 나름대로 상상해 보는 거죠.”
“그런데요?”
“그쪽 그림을 봤을 때 보자마자 웃음이 났어요. 우스꽝스러운 내 모습이 웃기기도 했고, 그날의 나와 마주하는 느낌이었어요. 내가 이런 모습이었구나, 이렇게 보였구나.”
“……”
“재미있기도 했지만 동시에 엄청난 희열을 느꼈어요. 거울 속의 나는 끔찍하게 싫은데 나를 그린 그림은 왜 이렇게 좋은 걸까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수가 없다.
“정확히 원하시는 바를 말씀해 주세요.”
“그림을 그려주세요.”
“네?”
그녀는 옆에 준비해 둔 파일을 나에게 내밀었다. 파일 안에는 수십 장의 사진이 들어있었다. 어린 시절의 여자부터 고등학생이 된 여자, 아이를 안고 있는 젊은 여자, 중학생으로 보이는 소년과 함께 있는 중년의 여자까지. 모두 그녀의 사진이었다.
“이걸 왜….”
“제가 주인공인 그림책을 갖고 싶어요.”
“네?”
“물론 값은 넉넉히 치를 거고요.”
“자서전 같은 걸 원하시는 건가요?”
“전혀요! 저도 돌이켜 보고 싶지 않은 제 인생을 뭐 하러 증거까지 남기겠어요? 그냥 저를 뮤즈로 한 작품을 원해요. 작가님의 상상으로 만들어진 새 인생에서 다른 삶을 사는 절 보고 싶어요.”
생각지도 못한 요구에 어리둥절했다.
여자가 내 앞으로 사진을 한 장씩 펼쳐 보였다. 마땅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멍하니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사진을 본다 한들 떠오르는 게 있을 리 없다.
“슬픈 동화든, 행복한 동화든 상관없어요. 뭐든 작가님 상상에 맡길게요.”
나는 내 앞에 펼쳐진 사진을 조심스럽게 정리하여 파일 안에 다시 넣었다.
“저는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책을 써 본 적도 없고, 그림을 안 그린 지도 오래되었어요. 무엇보다 상상력이 그다지 풍부하지도 않습니다.”
그녀는 내가 휘갈겨 그린 그림 세 장을 내 앞에 내놓았다.
“이 그림이 얼마나 큰 기쁨을 주었는지 아세요?”
분명히 모욕을 주려고 그린 그림인데 왜 기쁨을 느끼고 난리인지.
“주인공이 된 느낌이었어요. 제 인생을 살면서도 한 번 느껴본 적 없는 이 감정을 당신이 그려준 그림을 통해서 느낀 거죠.”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는 하지만 내가 해결해 줘야 할 문제는 아니다. 나는 이미 내 문제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것 같다.
“다른 분을 찾아보세요. 이왕이면 그림책을 전문으로 제작하는 작가로요. 저는 힘들 것 같습니다.”
그녀의 표정이 금세 차갑게 변했다.
“그러면 전 경찰서로 갈 수밖에.”
체류증 갱신.
머리에 불도장처럼 박힌 이 단어가 가슴을 답답하게 만든다. 거주증을 갱신하기 전까지는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어야 한다. 경찰이 개입하는 순간 나는 불리해진다.
“협박하시는 건가요?”
“지옥에서 탈출하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릴 순 없죠. 이런 마음, 누구보다 잘 아시잖아요?”
“제가 알긴 뭘 알아요?”
“그날 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수단과 방법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 아닌가요?”
방화 방조와 협박 중 어느 쪽이 더 중죄일까? 사실 협박이 두렵기도 했지만, 그보다 기분 나쁜 게 더 컸다. 묻어버리고 싶은 잘못을 자꾸 들춰내는 그녀가 싫다.
“이런 협박을 받으면서 만들어진 작품이 과연 아름답게 표현될까요?”
“아름다울 필요 없습니다. 작가님 마음껏 표현하세요.”
그녀가 굳었던 얼굴에 다시 환한 미소를 담고 내게 파일을 내밀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파일을 받아 들었다. 무조건 못한다고 거절하면 앙심을 살 것이다. 우선 되는대로 그려주고, 맘에 안 든다고 하면 내 능력으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 하고 그만두면 될 일이다.
“저는 소설가도 아니고 상상력도 없어요. 그냥 사진 몇 장 뽑아서 그리는 수준이 될 거예요.”
“우선 10%를 착수금으로 드릴게요. 나머지는 완성되면 드리기로.”
그녀가 하얀 봉투를 내민다.
집에 와서 봉투를 열어보고 깜짝 놀랐다. 10%라 하기엔 너무 큰 금액이었다. 부담스러우면서도 마음이 살랑거렸다. 이 큰돈을 쾌척할 만큼 내 그림이 인상적이었나? 그냥 돈이 많아 어쩔 줄 모르는 사람일 수도 있지만, 어찌 되었든 내 그림이 한 명의 마음을 흔든 건 사실이니까.
여자가 준 파일을 열어 사진을 펼쳐 보았다. 한 장 한 장 찬찬히 보며 어떤 사진을 골라 무슨 내용을 만들까 머리를 쥐어짜 보았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소파에 누워 핸드폰으로 뉴스를 검색하면서도 신경은 온통 봉투에 쏠려 있다.
봉투를 다시 열어 돈을 세보았다. 소파에서 빈둥대며 한가하게 핸드폰이나 볼 때가 아니었다.
여자의 사진이 널브러져 있는 책상 앞을 서성이다 에디의 그림책을 뒤적여보았다. 참고할 책이 별로 없었다. 에디의 도움이 필요하다.
“에디, 엄마가 읽어 준 동화책 중 제일 좋았던 책이 어떤 거였어?”
잠시 망설이던 에디가 고개를 오른쪽으로 비틀었다.
“없는 거 같은데?”
“뭐? 없다고?”
“응. 기억나는 건 있는 데 좋았던 건... 없어.”
“기억나는 건 뭔데?”
“말 안 듣는 개구리 때문에 엄마 개구리가 뱀에 물려 죽고, 아들 개구리가 후회하면서 비 올 때마다 무덤 앞에서 우는 거.”
“아.”
“그리고 에드워드 이야기.”
“에드워드 이야기? 그런 책도 있었어?”
“책은 아니고. 내가 하도 초콜릿을 많이 먹어서 엄마가 지어냈던 얘기.”
“진짜? 난 기억 안 나는데? 무슨 내용이었어?”
에디는 초콜릿과 사탕을 너무 좋아하던 에드워드라는 애와 그 애를 사랑해서 초콜릿과 사탕을 무한정 제공해 주던 엄마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이렇게 마구잡이로 이야기를 지어냈다니. 조악한 스토리에 웃음이 터졌다.
“엄마가 그런 얘기를 했어?”
“응. 이거 말고도 엄청 많지. 나한테 할 말 있으면 맨날 ‘옛날에 <에리>라는 남자애가 살았는데...’, ‘옛날에 <우디>라는 남자애가 살았는데...’ 이러면서.”
이제야 생각이 난다. 에드워드, 에리, 우디, 에밀...
“에호안 얘기도 생각난다. 에호안은 늘 성내면서 말하고 욕도 잘하는 남자애인데, 나쁜 말을 하도 해서 입에서 징그러운 지렁이가 나오기 시작했고, 결국 입술 두 쪽도 지렁이로 변해버렸다고. 두 지렁이가 밥 먹을 때도, 잘 때도 꿈틀거려서 먹을 수도 잘 수도 없게 됐댔어. 나는 그때 그 얘기를 진짜 믿어서 얼마나 무서웠다고. 어떻게 아들한테 그런 무시무시한 거짓말을 해?”
“거짓말이라니? 그건 사실이야!”
“나쁜 말을 하면 진짜로 입에서 지렁이가 나온다고?”
“그럼! 화내고 짜증 내고 욕하는 사람 입에서 나오는 말은 다 지렁이처럼 징그럽잖아. 그 입에서 또 어떤 끔찍한 말이 나올까 싶어서 입술도 징그럽게 보이고.”
나의 에드워드이자 에호안인 에디가 고개를 가만히 끄덕이다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아! 맞다. 에드도 있었다! 물 대신 주스랑 콜라만 마셔서 몸속에 있던 꽃밭이 다 시들어 버린 남자애. 똥 밭이 되어버린 몸속을 다시 꽃밭으로 만들려고 애쓰는 얘기였어.”
고집스럽게 따지고 떼쓰는 아들을 설득하기 위해 즉석에서 마구 지어냈던 이야기를 여태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내가 이야기를 거침없이 지어내곤 했던 사실도 새삼 놀라웠다.
다시 여자의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에게는 어떤 이야기가 필요할까.
사진 속 여자는 여전히 아무런 힌트도 주지 않고 나를 향해 웃고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