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땡감이 영그는 시간
언니의 조언대로 모에카가 먼저 연락할 때까지 잠자코 기다리기로 했지만 이렇게 오래 연락을 안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 줄 때면 자연스럽게 거리에서 마주쳤었는데 무슨 일인지 일주일째 모에카를 볼 수가 없다. 에디의 말로는 나엘은 문제없이 학교에 온다고 한다. 다만 평소보다 일찍 도착하고 에뛰드(방과 후 1시간 더 학교에 남아 자습하는 것)를 하고 있다고 했다. 나와 부딪히는 걸 피하려고 그러는 것 같아 마음이 쓰였다.
일주일이 지나고 열흘쯤 될 무렵 미안하던 마음이 알 수 없는 분노로 바뀌었다.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이렇게까지 연락을 끊나, 나를 친구 남편이나 넘보는 파렴치한 인간으로밖에 안 본 건가, 우리의 신뢰가 이 정도였나, 회의도 들었다.
테라스에 담배꽁초는 쌓여가고 망가진 울타리도 속절없이 덜렁거리고 있다.
위층 사람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 마냥 주말마다 음악에 맞춰 점프를 해댔고, 나는 그냥 멍청하게 앉아 온몸으로 소음을 흡수했다. 예전에는 파티 소리가 나면 즉시 침실로 피하곤 했는데, 그마저도 하지 않았다. 밤새 거실에 앉아 일부러 소음에 나 자신을 노출했다. 방으로 들어가면 자려고 애쓸 것 같아 거실에 있었다. 그 어떤 노력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모든 게 다 지겹고 부질없이 느껴졌다. 하고 싶은 일도,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었다.
모에카가 이렇게 큰 존재였나. 기욤과 헤어지기로 했을 때만큼 나는 무너졌다. 에디가 없었다면 밥도 안 해 먹고 잠도 안 잤을 것이다. 아이가 있기에 삶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고 있었다. 무너지는 나를 간신히 지탱해 주는 건 에디뿐이었다.
훌쩍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에디가 거실 어귀에 서서 어둠 속에 귀신처럼 앉아있는 나를 바라보고 있다. 엄마, 요새 왜 그래. 나 너무 무서워.
윗집의 큰 소음에도 깨지 않던 에디가 날 걱정하느라 잠을 설치고 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아이의 모습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우울감에 둥둥 떠다니던 마음이 쿵 하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나는 울먹이는 에디에게 다가갔다. 나보다 더 아픈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내 아들. 부모의 감정은 아이들에게 훨씬 큰 강도로 전달된다는 사실을 잠시 외면하고 있었다.
에디를 번쩍 안아 올렸다. 이미 안아 올리기도 버거울 만큼 커버렸지만, 마음은 아직 덜 자란 여덟 살 어린 내 아들. 미안해, 에디야. 잠깐 끔찍한 꿈을 꿨어. 그런데 지금 막 깨어났어. 에디 덕분이야. 고마워. 에디가 눈물이 가득 고인 내 눈을 소매로 닦아주었다. 나는 에디의 손을 잡고 침실로 향했다.
정신을 가다듬기는 했지만 뻥 뚫린 마음이 채워진 건 아니었다. 2주간 가이드 일도 없었다. 이제는 나랑 일도 하기 싫은 건가. 원래도 겨울에는 일이 적지만, 일이 없는 것도 의도된 게 아닌가 마음 쓰였다. 이 정도 시간을 두었으면 내가 먼저 연락해서 잘 지내냐, 요새 뭐 하느라 그렇게 바쁘냐, 물어도 되지 않을까? 오해가 있으면 풀고 싶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려면 자연스럽게 만날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
“에디? 요즘 나엘이랑 집에서 논 적 없지? 초대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초대해도 돼.”
“그러고 싶지. 근데 내가 놀자고 했더니 안 될 것 같다고 했어.”
“왜?”
“요새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서 지내는데, 집이 멀어서 학교에 왔다 갔다 하는 것도 힘들대. 그래서 친구 집에 놀러 가는 건 당분간 안된다고 하셨대.”
모에카는 시어머니랑 사이가 좋지 않아 왕래조차 안 하는데, 나엘이 왜 본가에서 지내고 있는 걸까?
“왜 할머니 집에서 지낸대?”
“엄마가 일 때문에 너무 바쁘데.”
혹시 나에게 말도 없이 사업을 확장한 건가, 정말 그 정도로 나를 밀어내야 하나 싶어 묘한 적의가 솟았다.
“왜?”
“몰라. 물어봤는데, 엄마 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며 눈물이 막 글썽거렸어.”
이건 좀 이상하다. 갑자기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어디가 많이 아파서 병원에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바로 모에카에게 전화했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 메시지도 보냈지만, 그마저도 읽지 않았다. 나는 필립에게 전화를 걸까 망설이다, 파비엔느에게 전화를 걸어 모에카에 관해 물어보았다.
“요새 모에카 본 적 있어?”
“모에카? 일본 갔다고 하던데?”
그동안 안 보였던 이유가 일본에 갔기 때문이었나? 전혀 생각도 못 한 이유다.
“일본?”
“나도 방금 크리스토프한테 들었어. 오늘 필립을 만났는데, 그 문제로 매우 힘들어한다더라. 나도 너무 놀라서 너한테 전화하려던 참이었어.”
파비엔느의 남편 크리스토프와 필립은 랭스 토박이로 어린 시절 같은 학교에 다녔던 친구 사이라 서로 자주 만나곤 한다.
“일본에 무슨 일로?”
“가족한테 일이 생겨서 갔다던데? 너도 모르고 있었어?”
얼마나 급한 일이기에 말도 없이 일본으로 출발했을까. 아니, 나한테는 이제 말하고 싶지 않았던 걸까.
“게다가 필립이 완강히 반대했는데도 가버렸대. 언제 돌아올 수 있는지, 돌아오긴 할 건지 모른다네.”
“무슨 그런 말을 해? 당연히 돌아오겠지. 나엘이 있는데.”
“여하튼 이 일로 필립에 크게 실망하고 화난 것 같아. 모에카가 돌아와도 다시 예전처럼 살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대. 넌 전혀 모르는 일이야?”
대체 이게 다 무슨 소리란 말인가. 보통 문제가 아님이 분명하다.
“몰랐어.”
“근데, 가족한테 문제가 생겨서 가는 걸 필립은 왜 못 가게 했을까? 난 그것도 이상해. 우리한테 말도 없이 급하게 간 걸 보면 굉장히 중요하고 시급한 일일 텐데 말이야.”
머리가 멍해서 파비엔느의 말이 잘 들리지 않는다. 나는 대충 말을 얼버무리고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모에카와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 우리가 나누었던 모든 대화 내용을 꼼꼼히 복기해 보았다. 그러다 문득, 친구 이야기라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얘기를 하며 무거웠던 그녀의 표정도.
혹시 그 가슴 아픈 사연이 친구 얘기가 아니라 그녀 얘기였던 걸까?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매일 자기 전에 영상 통화하는 조카가 있다는 것도 떠올랐다. 그 조카가 손수 만든 조악한 손뜨개 머플러를 하고 커피잔을 초조하게 두드리던 그녀의 모습도.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녀답지 않게 어둡고 근심 가득했던 그날의 표정을 보고도 왜 자세히 묻지 않았을까. 어쩜 그렇게 아둔했을까. 내 상처만 돌아보고 푸념하느라 그녀의 아픔을 감지하지 못했다. 내가 조금만 빨리 눈치챘더라면, 그녀 혼자 고민하며 떠나지 않았을 텐데. 나에게 늘 언덕이 되어 준 친구에게 나는 힘이 되어 주지 못한 게 미안하고 마음 아팠다.
핸드폰의 채팅앱을 다시 열었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쓰고 지우기만 수십 번.
<미안해.>
고르고 고른 말이 고작 ‘미안해’였다.
메시지를 확인한 후에도, 모에카는 답이 없었다. 모든 걸 뒤늦게 알아챈 나는 이제 무얼 할 수 있을까? 무얼 해야 할까? 고민하는 머리가 지끈거린다.
위층에서 다시 음악 소리가 들리면서 광기 어린 웃음소리와 발 구르는 소리가 들린다.
모처럼 볕이 좋아 테라스에 널어 둔 이불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부터 애지중지하며 어디를 가든 늘 지니고 다녔던 나만의 특급 보물. 황급히 테라스로 향했다. 가래침이나 꽁초 공격이 시작되기 전에 이불을 걷어야 한다.
창을 열고 테라스로 몸을 내밀었을 때 발이 멈추었다.
갑자기 무섭도록 나쁜 생각이 머리를 어지럽힌다.
변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조금 더 어른스러워져야겠다는 결심이다.
내 삶에 내가 없다고, 잃어버린 나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항상 나에게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창밖으로 내 분홍 이불이 보인다. 단 한 번도 헤어져 본 적 없는 가장 소중한 내 쉼터. 언젠가 헤어져야 한다면 지금이 그때가 아닐까.
윗집 창문이 열렸다.
창이 열리자마자 건물 안에 갇혀 진동하던 음악 소리가 밖으로 터져나갔다. 고름이 터지면서 성난 농포가 가라앉듯 음악 소리가 밖으로 흘러나가자 건물도 소음의 압력에서 조금 해방되었다.
나는 거실 전등을 모두 끄고 커튼을 살짝 열었다.
창가에서 큰 소리로 떠드는 젊은 남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담배꽁초 하나가 내 이불에 날아들었다. 예상했던 일인데도 화가 솟구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벌벌 떨리는 손을 움켜쥐었다.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는 걸, 이제는 몸소 받아들여야 한다.
열린 통창 앞에 서서 가만히 이불을 바라보았다. 위에서 두 번째 꽁초가 떨어졌다.
지금이라도 포기하고 당장 이불을 가지고 들어올까 망설이는 사이 꽁초에 남아있던 작은 불씨가 이불 표면에서 몸집을 불리기 시작했다. 사방이 구멍 나고 해져서 너덜거리는 이불 위로 작은 불꽃이 노랗게 넘실거렸다.
불이 조금씩 번지기 시작했다. 너 없이 내가 살 수 있을까. 더는 지켜볼 수 없어서 통창을 닫고 커튼에 당겼다.
커튼을 다 닫기 전, 맞은편 건물 2층에서 쌍안경으로 나를 지켜보는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지금까지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걸까.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지만, 미리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하나씩 풀어가기로. 우선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끄기로.
닫힌 커튼 틈으로 일렁이는 불꽃이 빠르게 커지는 게 보인다.
복도에서 찢어질 듯한 여자의 고성이 들리기 시작하자 음악이 꺼졌다. 렁보 부인이 결국 경찰을 부르겠다고 소리를 질렀고, 미치광이 파티쟁이들도 마음대로 하라고 되받아치고 있다.
불이 났다고 다급하게 소리치는 목소리가 창 너머로 들리기 시작했다. 창가에서 웅성거리던 파티광들이 창 아래를 내려다보다 계단을 달려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누군가 고의로 망가뜨린 우리 울타리마저 말끔히 태워주길 간절히 바라면서 불이 조금 더 빨리, 더 많이 번지길 기다리고 있다. 저 울타리는 피해자인 내가 아니라 망가뜨린 놈들이 고쳐야 하는 거니까.
누군가 우리 집 현관문을 거칠게 두드렸다.
나는 잠에서 방금 깬 듯한 얼굴로 천천히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장대만 한 아마두 씨 아들이 큰 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
나는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무슨 말인지 도통 못 알아듣겠다는 얼굴로, 잠에 취한 듯 멀뚱멀뚱 서 있었다.
*
경찰차와 소방차가 뒤엉켜 있는 사이로 낯익은 차량이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놀란 에디가 울면서 핸드폰을 달라고 하더니 결국 기욤에게 전화한 모양이다.
굳은 표정의 기욤이 우리에게 뛰어왔고, 흥분한 렁보 씨 부부는 경찰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고자질하고 있다.
나는 그냥 지친 표정으로 전소된 울타리 앞 화단에 넋 나간 사람처럼 앉아있었다.
울타리가 뻥 뚫려 속이 훤히 보이는 집이 위태로워 보인다. 견고하지도 않고 효율적이지도 않은 이따위 울타리가 무슨 필요가 있나 싶었는데. 아무 기능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건 나의 착각이었다.
기욤이 겁에 질린 파티광들에게 다가가 절대로 합의는 없다, 죗값을 다 치르게 하겠다, 각오해라 등 강한 어조로 경고하고 있다. 아마두 씨 아들은 나에게 보였던 무시무시한 발톱은 완벽히 숨기고 풀 죽은 강아지마냥 고분고분히 사과했다. 이렇게 되길 바라긴 했지만, 막상 불타 없어진 울타리를 보니 겁이 더럭 난다.
불이 나는 걸 알고도 내버려 둔 건 중죄일까? 쌍안경으로 계속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앞 건물 2층 여자가 몹시 거슬린다.
경찰 조사가 끝난 후 간단한 옷만 챙겨 기욤 집으로 갔다. 에디만 보내고 나는 집에 남으려 했지만, 에디가 울며불며 난리를 치는 바람에 같이 오게 됐다. 사실 나도 내 이불이 희생된 집에서 이 밤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기욤을 알아본 이웃들이 쑤군대며 이것저것 물을 상황도 잠시 피하고 싶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에디는 자연스럽게 자기 방으로 들어가 잠이 들었다.
나는 막상 어디에서 자야 하나,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몹시 난감하다. 몇 달 전까지 살던 내 집이 처음 간 남의 집보다 낯설게 느껴지는 생경한 경험을 하고 있다.
“많이 놀랐지?”
기욤이 셀러(celler)에서 와인을 한 병 꺼내와 잔에 따랐다. 시계의 시침이 4를 향하고 있다.
“좀 마시고 자자.”
“......”
에디에게는 나보다 든든한 울타리가 필요하다. 나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 건 완벽한 오산이었다.
“잔불이 남은 담배를 창밖으로 던지다니.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그동안 얼마나 많은 꽁초가 우리 테라스로 떨어졌었는지 알게 된다면 그는 무슨 말을 할까. 나의 무능함을 비난할 수도 있다.
“울타리가 완성될 때까지 에디는 여기에서 지내는 게 좋을 것 같아.”
“너는?”
“난 오늘만 신세 질게.”
기욤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우리가 왜 이래야 하는지 모르겠어.”
“......”
“정말 이혼을 원하는 거야?”
사실 이제는 나도 잘 모르겠다. 내가 이혼을 원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화가 난 건지.
너 하나 보고 프랑스를 선택했고, 오도 가도 못 하고 여기에 살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는데 너는 늘 없었어. 내가 느껴온 외로움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그래서 얼마나 불안한지, 넌 상상도 못 할 거야,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가슴에서 터져 나온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속마음을 내보이기에 우리는 너무 멀어져 버린 걸까.
“좋은 남편, 다정한 아빠가 아니었다는 거 인정해. 그래도 우리에겐 선물 같은 아들이 있잖아.”
“맞아, 엄청난 선물이지. 근데 숙제 같은 선물이야. 만 피스 퍼즐같이 피나게 노력해야 진가를 발휘하는 선물. 함께 받은 선물이잖아. 그러면 같이 완성해야지. 퍼즐 조각이 하나씩 맞추어질 때면 함께 기뻐하고, 맞는 조각을 찾을 수 없을 때는 같이 고민하면서. 이걸 나 혼자 하라고 하면 어떻게 해?”
기욤은 땅에 뿌리내린 나무처럼 미동도 없이 서서 나를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나는 점점 사회에서 멀어지고, 너는 점점 가정에서 멀어지고. 선물이 더는 선물이 아니고 해결하기 힘든 과제로 느껴졌어. 이러다가 선물 받은 걸 원망하게 될까 봐 두려웠어.”
저렇게 충격받은 표정은 처음 보는 것 같다. 그동안 수없이 얘기했는데, 왜 처음 듣는 것처럼 놀란 표정을 짓는 걸까. 흘려버리던 말을 이제야 귀에 담나 보다.
“미안해. 그렇게 힘든 줄 몰랐어.”
어떻게 모를 수 있는지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미안하다는 말은 그 어느 때보다 진심으로 들렸다.
“우린 정말 가망이 없는 거야?”
기분이 조금 이상하다. 끝을 말하고 있는데 어쩌면 그가 이제 노력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보인다.
“많이 늦은 거 알아. 하지만 내가 이제야 네 마음을 제대로 알게 됐으니 한 번 더 노력해 봐야 한다고 생각해.”
나는 대답을 망설였다. 다 맞는 말이고, 나 역시 너무 지쳐서 기욤이 이끄는 대로 하고 싶지만, 예전으로 돌아갈 자신은 없다.
내 대답을 기다리던 기욤이 시선을 돌렸다. 자는 줄 알았는데 에디가 방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에디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누운 에디가 조용히 말했다.
“가지 마. 엄마.”
“안 가. 걱정 마.”
“내일도, 모레도. 가지 마.”
에디가 다 듣고 있었나 보다. 가정불화가 있는 집 아이들의 특징이다. 자는 척, 안 듣는 척하지만 온 신경이 부모의 대화와 행동에 쏠려 있는 그 불안한 심정을 잘 안다. 엄마 아빠가 잠들기 전에는 잠들지 못했던 내 어린 시절이 떠오르며 가슴이 미어졌다. 그렇게 다짐했는데, 내가 에디에게 같은 아픔을 주고 있었다.
“아기처럼 왜 그래? 다 큰 소년이.”
“난 크고 싶지 않아. 계속 아기로 있고 싶어.”
“어서 크고 싶다고 했었잖아.”
“변하는 게 싫어.”
“사람이 나이에 맞게, 상황에 맞게 변해야지 어떻게 늘 같을 수가 있어?”
돌아누워 있던 에디가 벌떡 일어나 앉으며 나를 쏘아보았다.
“엄마도 변한 게 싫은 거잖아! 날 낳고 변해버린 엄마 자신이 싫다며? 엄마가 돼서 상황이 달라진 거고, 그래서 당연히 엄마 인생도 변한 건데 왜 예전의 엄마로 돌아가고 싶어 해? 예전으로 돌아가면, 그럼 나는? 나도 없어져야겠네?”
“에디야.”
에디의 눈두덩이가 빨개졌다.
“엄마는 내 엄마인 게 행복하지 않은 거야?”
“아냐, 행복해. 너무 행복해.”
“근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거지?”
“엄마이기 전에 강민경이기도 하니까 강민경으로도 살고 싶은 거야.”
“그게 아빠랑 살면 불가능한 거야?”
말문이 막혔다. 정곡을 찔려서 변명할 말을 찾을 수가 없다. 여러 가지 이유를 대고 있지만 결국 내가 집을 뛰쳐나온 주원인은 기욤에게 실망하고 화났기 때문임을 이제 인정해야겠다.
“간단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야. 그런데 엄마랑 아빠 사이가 변해도, 우리가 에디 부모라는 것과 널 사랑하는 건 변하지 않아.”
내가 늘 하는 이 말을 듣자마자 에디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돌아누워 버렸다.
다음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시커먼 아가리를 벌리고 속을 훤히 드러낸 울타리가 나를 맞이했다. 밝을 때 보니 더 흉물스럽다. 한숨이 나온다.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이 집 안을 힐끗댈 게 뻔했다.
나는 병풍 모양의 칸막이를 사 와 뚫린 울타리 앞에 세웠다. 어떻게 세워야 바람에 넘어지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앞 건물 2층에서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낮은 담장 위로 담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는데 사람은 안 보이고 담장 끝에 동그란 검정 물체만 살짝 보였다. 유심히 보니 쌍안경이었다. 누군가 담장 아래 숨어 입에 담배를 물고, 날 감시 중인 모양이다. 낮은 담장 아래로 몸을 숨기려면 어지간히 몸을 구기지 않으면 안 될 텐데, 뭐 저렇게까지 애쓰며 나를 구경하는지 알 수가 없다.
앞 건물은 이상한 사람들만 모여 사는 곳인가? 1층에 살던 K를 물리치고 나니 2층 여자가 말썽이다. 쌍안경은 부엌에서도 나를 관찰했고, 화장실에서도 나를 살폈다. 몸만 숨기면 쌍안경이 안 보인다고 생각하는 건가? 며칠째 계속되는 감시에 슬슬 약이 오르기 시작했다. 이불에 불이 붙은 걸 알고도 모른 척 내버려 둔 나를 감시하며 꼬투리를 잡으려는 모양인데….
저지른 잘못이 있으니 당당히 가서 따질 수는 없고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 그녀의 한심한 모습을 그려서 관음증 걸린 사람이 얼마나 추한지 스스로 깨닫게 해 주기로 했다.
담장 뒤로 어떤 포즈를 하고 있는지 보이지는 않지만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우스꽝스러운 포즈로 상상해 그려 넣었다. 부엌 싱크대 뒤로, 화장실 벽 뒤로 숨은 포즈도 기괴하리만큼 이상하고 추하게 그려서 정성껏 채색했다. 나는 세 장의 그림을 봉투에 넣어 그녀의 현관 아래로 밀어 넣었다. 그림을 본 그녀가 어떤 행동을 할지 벌써 두근거린다.
아마두 씨 가족은 어디로 갔는지 통 보이지 않았다. 우선은 다행이지만 다시 돌아왔을 때 또 어떤 식으로 내게 해코지할지 걱정이 됐다. 불에 탄 울타리가 다 수리되었을 때, 에디를 집으로 데리고 왔고, 그날 아마두 씨 집에서 짐이 나가는 게 보였다. 쌍안경 여인이 아마두 씨를 만나 쓸데없는 말을 할까 봐 걱정됐었는데 다행이었다.
이삿짐 트럭이 출발하기 전, 아마두 씨가 우리 집 벨을 눌렀지만, 나는 문 뒤에 숨어서 없는 척했고, 그도 서너 번 벨을 누르다 포기하고 발길을 돌렸다. 이번 화재에 나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지라 그를 대면하고 싶지 않았다. 처벌받을 그의 아들의 안부도 알고 싶지 않았다. 그 어떤 죄책감도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들이 떠나고 고요한 일상이 허락되자 내 마음도 평온해졌다.
새벽에 간혹 잠이 깨기는 했지만, 그건 티티새가 지저귀는 소리 때문이었고, 나는 웃으며 다시 잠을 청할 수 있었다.
그렇게 평화로운 사나흘이 흐르고, 일주일이 되던 날, 우리 집 거실을 통째로 집어삼킬 듯한 음악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아마두 씨는 분명히 가고 없는데, 어떻게 예전처럼 음악 소리가 들리는 건지, 대체 이 소리는 어디서 나는 건지 의아했다.
소음의 출처를 알아내기 위해 테라스로 나갔다. 믿고 싶지 않지만, 음악 소리는 우리 옆집, 알렉산드라 집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금까지 나를 괴롭혔던 소음 중 절반이 알렉산드라가 튼 음악임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