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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모아 Sep 11. 2024

[22화] 민우 이야기 – 낡은 통장의 주인

<연재소설> 비밀의 부부

저녁 9시가 넘어서야 처형이 돌아왔다. 이미 우리끼리 아이스크림도 먹고, 크리스마스 선물도 다 풀어 본 후였다. 환하게 웃으며 들어오는 선영이 누나의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한국 나온다는 말 없었잖아?”


“오랜만입니다. 처형! 우리 프랑스식으로 인사할까요?”


내가 팔을 벌리며 다가가자 누나는 손사래 치며 뒷걸음질 쳤다.


“얜 또 안 왔어?”


“기어코 안 온다네.”


“프랑스가 그렇게 좋다니? 가기 전엔 안 간다고 난리 더니.”


혜린이랑 장 본 봉지를 열어보는 누나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안 그래도 장 볼 때 됐는데, 돈 굳었네.”


봉지에서 물건을 빼던 누나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소주? 제부, 무슨 일 있어?”


“오랜만에 한잔합시다, 처형.”






혜린이가 잠이 든 후 누나와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하지 말라는 데도 누나는 안주로 김치전을 만들었다.


“내일도 출근해?”


“크리스마스라 안 하지.”


“일은 할 만해요?”


“응, 네 덕에 일자리 잘 잡았지. 늘 고마워하고 있어.”


“근데 무슨 야근이 이렇게 많아요?”


“복지관 영양사 일만으로는 혜린이 키우기 힘들어서.”


“다른 일도 하는 거야?”


“응. 마트에서 6시부터 9시까지 일해. 매일은 아니고 연락 올 때만.”


커다란 가방을 등에 메고 혼자 떡볶이를 먹던 혜린이가 떠올랐다.


“미안하네.”


“뭐가?”


“두루두루··· 그냥 옆에 살았으면 혜린이도 같이 키우고 했을 텐데.”


“진영이는 좀 어때? 나아졌어?”


뭐라 대답해야 하나 잠시 망설이다 술을 마셨다. 말없이 내 대답을 기다리던 누나는 내가 세 번째 잔을 비우자 잔을 빼앗았다.


나는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프랑스에 도착한 후 한 달쯤 지났을 때 길고양이가 새끼 세 마리를 우리 집 테라스에 낳고 사라져 버렸고, 진영이는 그 고양이들을 키우느라 정신이 없다고. 자식 이상으로 정성을 쏟더니 이제는 반려동물 입양 제도를 법제화하는 캠페인을 벌여 고양이들의 법적인 엄마, 말하자면 진짜 엄마가 되겠다는 야망을 품었다고 일러버렸다. 게다가 주인 잃은 윗집 고양이까지 키우고 싶어서 안달이 났고, 고양이 관련 책과 유튜브를 보느라 밤을 새우고, 낮에는 유기동물 센터에서 봉사하느라 절필한 지 오래되었다는 말도. 고양이들 두고 여행할 수가 없어서 한국이든 어디든 아무 데도 안 간다는 말까지.


낱낱이 일러바칠수록 선영이 누나의 턱이 아래로 떨어졌다.


내 이야기를 듣던 누나는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하며 소주를 맥주잔에 따라 한숨에 마셔버렸다.


“그래서 올여름에 안 온 거구나? 미친년.”


“······”


“아무리 원수 같은 아버지라도 장례식에는 와야지.”


“장례식이라니?”


“설마 모르는 거야?”


“장인어른이 돌아가셨어?”


“세상에··· 난 연락 한 번 없길래 혼자 장례 치르면서 얼마나 원망했는 줄 알아? 나오지는 못해도 고생한다, 미안하다, 전화는 할 줄 알았거든.”


“나한테 직접 연락했어야지!”


“당연히 둘이 결정한 건 줄 알았지. 딸도 안 온다는 데 장인을 뵌 적도 없는 사위한테 무슨 연락을 해?"


"아무리 그래도..."


"열일곱 살 이후로 왕래 없이 살았으니 남이나 다름없다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진영이가 너무 매몰차게 전화를 끊어 버려서 황당했어. 엄마 장례식 때 진영이가 자긴 이제 아버지 없다고, 돌아가셔도 절대 안 볼 거라고 했었는데 진짜 그럴 줄은 몰랐거든.”


“그래서 올여름에 한사코 날 안 만난 거였어?”


“뭐 하는 짓인가 싶었어. 장례 때는 연락 한 번 없더니 장례 끝나자마자 나오는 건 무슨 경우인가, 괘씸해서 못 보겠더라고.”


“누나 혼자 힘들었겠네.”


“어차피 조문객도 없고, 와 줄 가족도 없어서 그냥 무 빈소 화장식으로 했어.”


장인어른이 돌아가셨다니. 꿈에도 몰랐던 일이다.


올여름에 우리가 뭘 했더라.


특별한 기억이 전혀 없는 걸 보니 늘 그렇듯 너무나도 지루하고 평범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진영이는 어쩜 그렇게 감쪽같이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하루하루를 살아냈을까. 나는 또다시 진영이의 낯선 모습과 마주하게 되었다.


누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식탁으로 돌아온 누나가 내 앞으로 커다란 상자를 내려놓았다.


“워낙 경황없이 치른 장례였고, 장례 후에는 방학 내내 혼자 있는 혜린이를 여기저기 부탁하며 출근하느라 유품 상자가 있는 것조차 까먹고 있었어.”


상자를 열어보았다. 작은 사진첩과 오래된 손목시계, 낡은 라이터...


“미리 짐 정리를 다 하셨는지 남은 물건이 거의 없더라.”


상자 안 유품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건 둥근 호리형 백자였다.


“백자가 있네?”


“응. 깨지면 안 된다고 했다네. 많이 아끼셨나 봐.”


백자를 꺼내 보았다. 이상하게 입구가 꽉 막힌 백자였다. 백자가 완성된 후 구멍을 막은 게 아니라 애초에 구멍 없이 제작된 듯 보였다.


“근데 왜 구멍이 없지? 관상용이라 해도 구멍은 다 있지 않나?”


“그러게 말이야. 나도 이상하더라고. 우리 엄마가 이렇게 만들었을 리 없는데...”


“어머니?”


옛날에 엄마가 집에서 자기를 만드셨었거든. 우리가 큰 후로는 그릇 굽는 걸 못 봤는데, 이걸 언제 만드신 걸까. 지금까지 간직한 걸 보면 엄마가 만든  같은데.”


나는 백자를 유심히 관찰했다.


“웃기지? 그렇게 때리고 괴롭혔으면서 엄마가 죽으니까 엄마가 만든 도자기는 깨지지 않게 애지중지하고.”


“......”


구멍만 있다면 화병이나 술병으로 쓰기 딱 좋았겠지만 이건 쓸모도 없고.


누나가 백자를 다시 상자에 넣으려 했다.


"줘 봐."


뭐가 담긴 게 아닐까 싶어서 백자를 흔들어 보았다.


"아무것도 없어. 나도 벌써 해 봤지."


정말 속은 텅 비어 있었다.


"뭐지...?"


"둘 곳도 없고 쓸 데도 없어서 그냥 버릴까 해."


“어머니가 만드신 거라며?”


“엄마가 만들었다면 저렇게 만든 데에 이유가 있을 거야. 근데 어쩐지 좋은 의미는 아닐 거 같아.”


"......"


"아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엄마가 만든 게 아닌 것 같아. 캐나다 가기 전에는 집에서 그릇을 만들고 굽는 걸 자주 봤었는데, 후에는 안 하셨었거든. 게다가 엄마는 이런 장식용 도자기는 만들지 않으셨어. 그릇이나 접시만 만들었지."


"그래도 장인어른 유품인데 버린다고?"


"엄마가 만든 게 아니면 뭐... 쓸모도 없고."


“그럼 내가 가져가도 돼?”


“... 이걸?”


“버리면 안 될 것 같아.”


“너 미신 같은 거 믿니?”


선영이 누나가 헛웃음을 뿜었다.


나도 처형처럼 이 백자가 석연치 않다. 처형의 물음에 그냥 멋쩍게 웃고 말았지만, 미신이든 뭐든 장인어른이 깨지지 않게 조심하신 물건이라면 버려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근데...”


처형이 입가에 담은 미소를 지우고 손때 묻은 낡은 통장과 도장을 내 앞으로 내밀었다.


낯익은 통장. 내가 잘 아는 물건이다.


“이런 것도 있더라?"


"......"


"얼마나 놀랐는지.”


열어보지 않아도 무슨 통장인지 잘 안다. 당황스러운 건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하는 난감함 때문이었다.


자세히 다 말하면 충격과 상처가 클 테고, 다 빼고 말하면 의심만 남을 것이다.


“당장 너한테 전화하려다 이건 만나서 할 얘기 같아서 참고 있었어.”


“놀랐겠네.”


“아버지 만난 적 있어?”


“······응.”


“언제?”


“혼인 신고한 후에.”


“어떻게 알고?”


“······어쩌다 알게 되었어.”


“어쩌다? 네 이름으로 된 통장이랑 도장이 아버지한테 있었는데 어쩌다라고? 게다가 8년간 매달 30만 원씩 자동 이체되었고. 이번 달에도 이체했더라?”


“돌아가신 지 몰랐으니까.”


대체 어디서부터 얘기를 해야 하나 망설이고 있는데 누나가 또 다른 물건을 꺼내 놓았다. 오래전 진영이가 쓰던 핸드폰이다.


거짓말. 처음 만난 건 결혼 전이지?”


입을 꾹 다문 내 앞에서 누나가 핸드폰의 전원을 켰다. 혹시 핸드폰에 사진과 영상이 남이 있을까 봐 가슴이 철렁했다. 나는 놀라 손을 뻗었다.


"이리 줘."


"진영이가 병원에서 잃어버렸다던 그 핸드폰이지?"


"줘, 누나."


"진영이가 난리 치며 찾던 핸드폰이 왜 아버지한테 있어? 혼인신고 후가 아니라 그때 처음 만난 거지?”


누나는 전원이 켜지기 시작한 핸드폰을 내 앞에 들어 보였다.


나는 누나 손에서 핸드폰을 가로챘다. 아무에게도 하지 않으려 했던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밖에 없는 순간이 왔다.





누나가 분만실에 들어간 날, 병원에 가보니 진영이가 만신창이가 되어 누워있었어.


자세히 보니 몸의 상처들은 하루에 생긴 것들이 아니더라. 적어도 한 달은 된 상처부터 그날 입은 상처까지··· 온몸이 상처투성이었어.


왼손에는 꽤 오래전에 입은 담배 화상 자국도 있었는데 채 아물기도 전에 구둣발에 짓밟혀 있었고. 피가 얼룩진 반지를 보고 아주 지독한 놈한테 걸렸구나, 알아챘지.


진영이 핸드폰을 살펴봤어.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사진과 영상, 메시지들이 잔뜩 와 있었어. 병원에 실려오는 그 짧은 시간에 얼마나 많은 걸 보냈던지. 사경을 헤매서 볼 수도 없는 사람한테 말이야..


인터넷 검색 내역은 더 기가 막혔어. 진영이가 죽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었더라.


죽이는 방법을 검색했었다면 그렇게 화나지 않았을 거야. 쉽게 물러설 리가 없는 애가 어쩌다 이 지경으로 망가졌나. 대체 얼마나 당한 건가.


병원에서 나와 밤새 고민했어. 그놈을 어떻게 없애버릴까...

도박에 빠진 놈 같으니 유인해서 각서와 차용증을 받고 돈을 쥐여 줄까. 그리고 그 각서와 차용증을 악명 놓은 사채업자한테 팔아 버릴까. 말이 안 통하는 중국 어선에 넘겨 버릴까. 그것도 아니면 전문적인 해결사라도 고용해서 겁을 줘 볼까···


그러다가 진영이 핸드폰 발신 번호에서 이상한 걸 발견했어.

이름 대신 마침표로 저장된 번호였는데 통화는 안 하고 걸고 끊기만 수차례 반복했더라고.


이상해서 전화해 보니까 무슨 사무실이라고 했어. 뭐 하는 곳인지 물어보니 공교롭게도 흥신소였어.


아. 진영이도 나랑 비슷한 생각을 했었나 보다. 혹시 이미 의뢰를 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그 사무실로 찾아가 봤어.


놀랍게도 날카로운 눈매랑 광대가 진영이랑 너무 닮은 50대 후반 아저씨가 나를 맞아 줬어.


예전에 진영이한테 들었던 아버지 얘기가 떠올랐어. 조직에서 카바레 사업을 도맡아 다 크게 배신당했던 이야기 말이야. 


김동철이라고 적힌 명함을 내미는 데 아버지임을 확신했고 당황해서 사무실을 나와버렸어.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당장 떠오르지 않았거든.


반나절 고민한 후 다시 그곳을 찾아갔어. 진영이가 퇴원하기 전에 놈을 해결해야 해서 더는 시간 끌 수 없었어.


스토킹 당하는 친구가 있는데 이런 것도 해결해 주냐고 물었더니 그쪽으로 전문이라고 대답하셨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줄 수도 있다고.


난 진영이의 핸드폰과 다치기 전의 진영이 사진, 그리고 입원한 진영이의 사진을 내밀었어.


순간 파랗게 질리는 아버님 표정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


나는 아버님을 더욱 자극하기 위해 이놈이 또 찾아오면 진영이는 죽을 거라는 말도 했어.


이번에도 스스로 죽어서 그놈이 잡히도록 하려 했는데 실패한 거라고.


아버님의 눈에 핏줄이 서는데도 멈추지 않고 말했어.


일만 잘 처리된다면 평생이 걸려도 부르는 대로 값을 치를 테니, 일이 마무리되면 연락 달라는 말을 남기고 사무실을 나와버렸어. 핸드폰 속 사진을 보며 괴로워하는 아버님을 더는 대면할 수가 없었거든.


일주일 후 아버님께 연락이 왔어. 진영이가 퇴원하기 전날이었어.


사무실 말고 다른 곳에서 보자고 하셨는데 막걸리를 파는 민속 주점이었어. 들어가 보니 아버님은 이미 술을 많이 드신 것 같았고 무척 괴로워 보였어.


그 모습을 뵈니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후회가 밀려왔어. 적어도 핸드폰은··· 넘기지 말걸...



머릿속에 아버님을 만났던 날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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