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민우 이야기 - 돌이킬 수 없는 관계
<연재소설> 비밀의 부부
“이렇게 따로 뵙는 건 처음이네요.”
황 변호사는 왜 나를 기다렸을까.
카페에 마주 앉았지만 할 말이 없다.
궁금한 것이 많지만 굳이 묻지는 않을 거다. 묻는다고 대답해 줄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가운 척 미소 띠고 날 보는 그를 나도 가만히 응시했다. 까맣게 염색한 머리카락 아래로 굵은 주름이 깊이 파인 얼굴이 영 어색하다.
“이사장님이 외곽에 있는 병원으로 이송됐었다는 소식을 얼마 전에야 들었습니다. 제가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그는 목례까지 하며 정중히 사과했다.
"병원에서는 가족들의 결정이라 따로 연락을 안 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아드님이 이곳으로 다시 모셨다기에 많이 놀랐습니다. 이사장님도 놀라셨고요.”
딱히 뭐라고 대답할 말이 없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잎이 다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뭇가지 위로 까마귀가 날아들고 있다.
아까 병실에서 어머니가 한 말이 떠올랐다.
무슨 꿍꿍이냐? 그게 뭐든 네 맘대로는 안 될 거야.
나는 뭘 기대하고 여기에 왔던 걸까. 너무나 뻔한 결과인데 이렇게 허무한 이유는 뭘까.
어머니는 내 대답이 맘에 드셨으려나. 무슨 속셈이냐는 어머니의 질문에 사과하지 않아서 고마워요 라는 말로 간단히 내 진심을 전했다.
마음이 훨씬 홀가분해졌다. 어려운 숙제를 용케 피할 수 있어서 안도감이 몰려왔다고 해야 하나. 억지로 화해할 이유도, 무리해서 용서해야 할 필요도 없어졌으니 말이다.
“무슨 꿍꿍이냐고 묻고 싶으신 건가요?”
“그런 표현은 좀···”
대화는 또 끊겼다. 분명히 나에게 할 말이 있어서 기다렸을 텐데 왜 뜸 들이는지 모르겠다.
“이제 하실 말씀 하시죠.”
“댁에는 가 보셨는지요? 이사장님이 고심해서 준비하신 선물입니다.”
하늘을 찌를 듯 치켜 올라간 입꼬리. 황 변호사는 뿌듯한 미소를 입가에 한껏 머금었다.
“아. 네··· 선물이었군요.”
비아냥거리는 내 태도에 적잖이 당황한 황 변호사의 입꼬리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의 미간에 힘이 들어간다.
“왜··· 마음에 안 드시나요?”
“혹시 그 선물 직접 보셨습니까?”
“아니요. 그냥 자문만 해드렸습니다.”
“법에 집주인 동의 없이 집을 맘대로 부숴도 된다고 나와 있나요?”
“연식이 오래된 집이라 안전검사에서 부적합 판정이 나왔습니다. 재건축을 급히 해야 하는데 아드님은 한국에 안 계시고, 아버님께 상속받은 건물이기도 하고, 어머님이 계속 살던 집이니까 보수든 재건축이든 진행해도 무리 없을 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맘에 안 드시나요?”
나 정도 애송이쯤은 언제든 상대할 수 있다는 자신만만한 태도. 그를 납작하게 눌러주고 싶은 충동이 인다.
“선물을 받을지 말지 고민 중입니다.”
“네?”
황 변호사가 무척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이렇게 나올 줄 모르진 않았을 텐데. 그렇다면 지금 저 표정도 연기일 것이다. 나를 이상한 사람, 삐뚤어진 아들로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원상 복구하셔야 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예전 그 모습 그대로. 마당에 있던 자갈돌 하나하나 모두 그대로.”
나는 모든 단어를 한 음절씩 정성스럽게 강조하며 말해 주었다.
“아니 그게 무슨···”
“놀라시는 걸 보니 이건 예상 못 하셨나 봅니다?”
“어차피 세를 주거나 매매를 하더라도 공사가 필요했던 집입니다.”
예상대로 황 변호사는 준비해 둔 말을 침착하게 이어갔다.
“선물에 진심이 느껴지지 않아서요. 어쩐지 엿 먹이는 느낌이랄까.”
“어디가 맘에 안 드는지 말씀하시면 수정하는 방향으로···”
“전부 다요. 다 맘에 안 들어요.”
“감정적으로 이러시지 말고 원하는 바를 말씀해 보세요.”
투정 부리는 어린아이를 진정시키려는 듯 말하는 그가 역겹다. 나는 뜨거운 커피를 천천히 마셨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누를 시간이, 그의 인내심을 바닥 낼 시간이 필요하다. 대답 없이 커피만 마시는 나를 기다리던 그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채근했다.
"이사장님은 최대한 오픈 마인드로······"
지금부터 그는 결코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할 것이다. 이제 이 대화는 내가 주도할 테니까.
“두 분은 어떤 대화를 하시나요?”
“네?”
“머리가 좋은 분이니 저와 어머니의 사이가 원만하지 않다는 건 이미 오래전에 아셨을 테고, 어머니와 말하다 보면 좋은 의도로 이러는 게 아니란 것도 눈치채셨을 거고. 안전 진단이다 뭐다 상황 설정 다 하고 교묘하게 골탕 먹일만한 재건축 계획을 세우셨으면서 제가 감정적으로 반응한다고요?”
황 변호사가 잠시 대답을 머뭇거렸다. 내가 이렇게 지난 과거사를 오픈하고 나올지는 몰랐을 것이다. 모르는 척해야 하나, 안다고 해야 하나 망설이던 그는,
“돌아가시기 전에 아드님의 아픈 기억을 지워 주고 싶으셨겠죠. 저는 그렇게 이해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영리한 대답이다. 멍청해 보이지 않으면서 의뢰인의 입장을 최대한 변호하는 걸 보니 그는 실력이 꽤 좋은 변호사임이 틀림없다.
"아픈 기억을 지워 주고 싶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몰라도 내 맘대로는 절대로 안 될 거라고 경고하던 어머니가 떠오른다. 이런 진심은 나에게만 보이는 분. 남들 몰래 교묘하게 괴롭히는 술수는 여전했다. 주변에는 한없이 인자하고 이성적인 사람으로 자신을 포장하면서.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를 낱낱이 까발리지 않는 한 나는 어머니의 정성을 취향 타령하면서 밀어내는 철없는 아들로만 보일 것이다.
“집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말씀해 보세요.”
형광빛 주황색이 거슬린다고 하면 다시 페인트칠하면 될 일이라고 말할 것이다. 건물에 좋은 재료를 썼을 리가 없다고 의심하면 위조되었을지도 모를 증거를 내밀 것이다. 지난 과오를 덮기 위해서 한 일이 아니냐고 따지면 집안 어른들 뿐 아니라 당사자인 나 역시도 이미 덮은 문제가 아니냐고 대답할 것이다. 어떤 말을 해도 나만 과민증 환자로 몰릴 걸 알기에 아무 대답도 하고 싶지 않다.
“오랜 시간 병마로 고생하셨는데 마지막 가는 길마저 이렇게 고돼서야···”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 고생스럽게 병마와 싸우는 상황에서도 단 한 번의 참회도 없이 오히려 날 골탕 먹일 생각만 한 사람이 아닌 피해자인 나를 탓하다니.
상기된 내 얼굴을 보던 황 변호사가 새로운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새 이사장님도 그렇고 좀 너무하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갑자기 큰고모 얘기로 화제가 전환되었다.
“와병 중인 이사장님께서 부군이 남기신 유산을 포함한 전 재산을 미혼모 시설에 기부하기로 한 사실을 새 이사장님이 아시고 무척 노여워하셨습니다. 지금 우리 아동복지재단도 어려운데 다른 곳에 기부하는 게 말이 되냐며 검은 속내가 괘씸하다고 병원을 옮기신 듯합니다. 재단에 악감정을 품고 한 행동으로 생각하신 듯한데···”
“전 재산을 미혼모 시설에 기부한다고요?”
다른 말은 더 들을 것도 없고 이 말을 확인해야 한다.
“······네. 모르셨나요?”
“몰랐습니다.”
“전 알고 이러시는 줄 알았습니다.”
황 변호사의 얼굴에 안도의 기미가 번졌다.
“이러다니요?”
“괜히 재건축을 꼬투리 잡아서 유산 상속받으시려는 줄 알았습니다.”
도통 끼고 싶지 않은 개싸움에 휘말리게 되었다. 어른들의 재산 다툼에 끼고 싶은 맘은 전혀 없지만 기왕 휘말리게 되었으니 정식으로 발을 담가야겠다.
“좋은 생각이네요.”
“네?”
“잠깐 저답지 않게 괜찮은 사람 흉내 좀 내보려 했었는데. 착한 척하는 거 별로네요. 이사장님 정신 완전히 놓으시기 전에 유언장 수정하셔야 할 겁니다. 이대로 돌아가셔서 이사장님 이름으로 단 1원이라도 기부되었다는 기사가 나가면 저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겁니다.”
“유류분 청구 소송이라도 하실 겁니까? 그 계획이라면 제가 50%는 아드님께 상속하는 거로 하시라고 설득해 보겠습니다.”
“제가 기부금이나 탐낼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네?”
“유류분 청구 소송이라··· 저도 어머니를 닮아 명예욕이 강해요. 기부금을 탐내서 소탐대실할 만큼 멍청하지도 않고.”
“상속이 목적이 아니라면 왜 이러시는 겁니까?”
“평생 소외된 어린이들을 위해 일하다가 죽을 때는 미혼모들까지 끌어안는 완벽한 마무리를 원하신 것 같은데··· 측은지심이 전혀 없는 사람이 기부하는 게 진심일까요? 저는 돈으로 명예를 사려는 걸로만 보이는데. 저승에는 못 가지고 가는 돈, 팔아서 이름이라도 남기겠다는 심보겠지요. 그렇게 맘대로는 안될 겁니다. 잔인하게 학대당했던 산 증인으로서, 단 한 번의 사과도 못 받은 피해자로서 그런 위선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거든요. 이것만은 막아야 제가 숨 쉬고 살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어쩌실 작정입니까?”
“인터뷰해서 책이나 불티나게 팔아 볼까... 뭐 그런 생각? 치사하게 유산이나 탐내느니 이게 훨씬 낫잖아요? 어머니 소원대로 이름은 남겠네요.”
황 변호사는 붉게 상기된 얼굴로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조금 전 자신만만하던 태도와는 상반된 모습이다.
“그럼 우리 재단에 기부하는 거로 하면 되겠습니까?”
“그건 더욱 안 될 일이죠. 어린이 학대범이 어린이 재단에 전 재산을 기부하다. 이렇게 기사 나갈 겁니다.”
“그러면 어쩌라는 겁니까?”
나는 안절부절못하는 그에게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내 계획을 말해 주었다.
“어쩌긴요. 외아드님 있으시잖아요."
"네···?"
황당한 표정의 그를 보고 있자니 웃음이 터질 것만 같다.
"상속하셔야지요. 하나뿐인 아드님께.”
“유산에 관심 없으시다면서요?”
뭔가 굉장히 억울한 표정의 황 변호사를 보니 답답했던 가슴 한편이 시원해진다.
“반성도 안 하고 사과도 안 할 거면 벌금은 내야죠. 혹시 아나요? 그 정도면 제가 평생 입 다물지?”
더 들을 말도 없거니와 할 말도 없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혹시 모르실까 봐 말씀드리는데, 이사장님의 외아드님은 어린 시절에 당한 학대 트라우마로 정신이 온전치가 않다네요. 동정심을 못 느끼고 공감 능력도 현저히 떨어진답니다. 다시 말해 그 어떤 협상도 없을 거란 얘기지요."
황 변호사가 잠시만 더 얘기하자고 잡았지만 나는 그냥 카페를 나와버렸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상쾌했다.
어머니를 이 병원으로 다시 모신 건 정말 잘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