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모는 사흘째 외출도 안 하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내가 걱정되었는지 틈만 나면 방문을 노크했다.
그 사이 진영이로부터 안부 메시지가 몇 번 왔지만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 답장하지 않았다.
황 변호사를 만나고 온 후 무기력증이 시작되었고 만사가 귀찮아졌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걸려와서 받으니 인테리어 회사였다. 집 내부 마무리 공사도 다 끝났으니 직접 확인해 보고 서명해 달라고 하는데... 돈 대신 집을 물려주신 아버지가 원망스럽다. 하필 집을. 내가 거기에 무슨 좋은 기억이 있을 거라고. 돌아가실 때까지 아버지는 정말 아버지다웠다. 자기 생각 외에는 아무 생각도 없는 분.
부천시 소사동에 소재한 모든 장례식장에 전화를 걸어 김이순 씨를 찾아보려 한 것도 그만두었다. 유배달과 관련된 나의 의심이 반은 합리적이고 반은 비합리적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파주 깡패나 어머니가 유배달을 보냈을 거로 생각하다니. 내가 잠시 이성이 나갔었나 보다. 할아버지가 보냈을 리도 없다. 돈 가지고 협박하는 정도는 몰라도 사람을 사서 보낼 만큼 용의주도하게 나를 괴롭힐 분이 아니다.
흥분해서 날뛰던 순간이 지나고 나니 내가 무얼 찾는지 무얼 찾고 싶은지도 희미해졌다.
유배달이 우리 부부 주변을 맴돌았던 건 맞지만 지금은 떠난 사람이다. 이미 떠났으니 굳이 이유를 알 필요도 없다. 알아서 기분 안 좋을 일은 이제 그만 들쑤시고 싶다. 그가 다시 나타나서 진영이에게 접근한다 해도, 그래서 진영이가 나를 떠난다 해도 흘러가는 마음을 막을 도리는 없다.
이렇게 모든 걸 한순간에 내려놓게 해 주다니, 무기력증은 어쩌면 세상에 참 필요한 병일지도 모르겠다.
김이순 씨 찾는 걸 멈춘다면 고모네 머물 이유가 없다. 나는 고모에게 그동안 감사했다고 말하며 용돈을 넣은 봉투를 내밀었다. 극구 사양하면서도 고모의 입꼬리가 내내 귀 주변에 닿아 있다.
“할아버지한테는 정말 안 갈 거냐?”
“결혼한 사람한테 자꾸 언제 결혼할 거냐 묻는데 어떻게 가요.”
“돌아가시고 후회하지 말고 꼭 뵙고 가.”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지킬 자신이 없는 약속은 이제 하고 싶지 않다.
“오늘 저녁은 제가 맛있는 거 살게요. 정길이도 퇴근해서 식당으로 오라 하세요.”
고모는 들뜬 얼굴로 정길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둘이 몇 마디 나누더니 고모가 핸드폰을 나에게 넘겼다.
"정길이가 너 바꾸라는데?"
-형, 방금 홀트에서 연락 왔는데, 유영진이란 사람이랑 예전에 같이 살던 룸메이트가 오늘 오후에 번역 봉사하러 온다면서 만나고 싶으면 홀트로 오라네? 뭐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서 형인 척하고 2시까지 가겠다고 해 버렸어.
기다릴 때는 오지 않던 연락이 하필 떠날 마음을 먹으니 왔다.
굳이 갈 필요가 있나, 거절할까 하다가 그래도 한 번은 만나보기로 했다. 만사 다 귀찮아도 유배달에 대한 궁금증은 아직 조금 남아 있나 보다.
“영진이가 생모를 찾고 싶어 한다고요? 이상하네요. 그런 일이라면 저에게 부탁했을 텐데.”
유배달과 달리 한국어에 프랑스 억양이 강한 사내였다.
“저는 한국어 학당에서 유 선생이랑 같이 일하며 친하게 지냈었습니다. 생모를 찾아주고 싶다는 말은 사실 핑계고, 아끼던 동료이자 후배 강사가 갑자기 말도 없이 사라져서 연락도 안 되니 걱정이 되어서 한국에 나온 김에 유 선생을 찾아보려 했던 겁니다. 생모를 찾으러 왔을 것 같아서요.”
“아. 이제야 이해가 가네요.”
“영진 씨에 대해 두루두루 알아보는 중입니다. 왜 갑자기 왔다가 갑자기 사라진 건지. 만나서 반드시 해야 할 얘기도 있습니다.”
“갑자기 사라졌다고요?”
“네. 게다가 사라지기 전에 제게 했던 말이 마음에 걸립니다. 뭔가 사연이 있어서 어학원으로 저를 찾아온 것 같은데··· 제가 그때는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이야기를 못 나눴어요. 그래서 그냥 말없이 떠난 것도 같고.”
사내는 한동안 망설이다 말을 시작했다.
“배달이는 보통 아이들보다 훨씬 성실하고 감성적인 아이였어요. 양부모님들이 워낙 좋으신 분들이라 잘 버텼지만 자기 뿌리에 대한 갈망은 시간이 갈수록 더 커졌어요. 사춘기 때는 심적으로 방황도 많이 했고, 상처도 많이 받았지요. 배달이는 항상 한국에 관심이 많았어요. 어려서부터 한국 TV를 보며 공부했고, 대학에선 한국학을 전공했어요. 어학에 소질이 있는지 한국어도 반은 독학으로 익혔어요. 양부모님들이 항상 배달이를 지지해 주셨죠. 한국에 가서 몇 년간 살아보라고 제안한 것도 그분들이었어요. 배달이가 생부모를 찾는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한국에 간다기에 저도 같이 왔습니다. 부모님도 같이 찾고, 어학원도 함께 다니면 좋을 것 같았거든요. 제가 먼저 생모를 찾았어요. 배달이는 힘들게 생부를 찾았는데 지병이 있으셨어요. 배달이도 내내 모르다가 한참 후에 알았고요.”
“방송은 왜 포기했나요? 생모를 찾으려면 방송이 유일한 방법이었을 텐데.”
“아버지가 아프신 걸 알고 포기했어요. 아프신 분을 번잡스럽게 할 수 없다고요. 아버지 심기를 어지럽히는 일은 조금도 하고 싶지 않다고 했어요.”
“생부가 방송 나가는 걸 원하지 않으셨나요?”
“잘은 모르지만 그냥 투병 중이라 사람 만나기도 싫고 복잡한 것도 싫고 해서 그런 것 같았어요. 근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고 했어요. 아버지 부탁이라고.”
“부탁이요?”
“네. 근데 부탁이 뭔지에 대해서는 정말 한마디도 해주지 않았어요. 저한테 그렇게 숨길 애가 아닌데.”
이 사내도 부탁의 내용을 모른다면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김이순 씨가 뭘 부탁했기에 우리에게 접근한 걸까. 접근한 목적을 달성해서 떠난 건가, 아님 달성하기 위해 다시 돌아올 건가.
다시 시작된 궁금증 속에서 불안감이 거세게 피어올랐다.
“여기저기 다니더니 10월인가 갑자기 짐을 쌌어요. 잠시 다녀올 곳이 있다고. 그때 이미 취업까지 해서 일 잘 다니고 있었는데 말이죠.”
“어디로 간다는 얘긴 없었나요?”
“말해주지 않았어요. 저도 이상해서 꼬치꼬치 물었죠. 근데, 그냥 어떤 여자를 위해 한 남자를 찾아야 한다고만 했어요.”
“어떤··· 여자요?”
어떤 여자를 위해 나를 찾았다? 혹시 내 생모를 말하는 건가. 이 모든 일의 끝에 나를 애타게 찾는 생모가 있다는 건가.
“아버지랑 관련된 여자일 테니 생모를 의미했겠죠.”
유배달의 생모가 나를 찾는 거라고? 유배달이 생모를 못 찾았다고 한 말도 거짓말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유배달이 내 이부동생일 수도 있다는 얘긴데...
듀끌로가 나와 유배달을 헷갈려했다는 얘기가 떠올랐다. 유 배달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더라? 나랑 닮은 구석이 있었나 생각해 보았지만 딱히 잘 모르겠다.
생모도 모자라 갑자기 동생까지 생길 것 같은 상황에 마음이 급해졌다. 알기 두렵지만 더 이상 모른 척 덮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올 7월인가 유 선생 생부가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장례식에 같이 가셨었나요?”
“아니요. 저도 장례식 후에 알게 됐어요. 그쪽도 가족이 있어서 몰래 다녀온 듯했어요. 생부와 함께 사는 부인이 배달이를 반기지 않을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생부의 다른 가족들은 배달 씨에 대해 모르는 건가요?”
“모르는 것 같았어요.”
김이순 씨의 장례를 치렀던 장례식장에 가봐야겠다. 거기라면 다른 가족의 이름이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누구라도 만나 유배달에 대해 더 물어야 한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부천시 소사동에 소재한 모든 장례식장에 전화를 걸어 김이순이란 사람의 장례가 있었는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
전철에서 내려 덜컹거리는 마을버스를 타고 시립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겨울바람이 무척 찬 날이다.
내일모레면 새해가 밝아온다. 시간은 계속 앞으로 가는 데 나는 과거로 돌아가고 있다.
장례식장 앞에는 상복 입은 사람들이 무리지어 담배를 태우거나 커피를 마시고 있다. 죽음이 가득한 곳에서 잠시 탈출한 사람들이 한숨 돌리고 있는 모습은 삶에 가까울까 죽음에 가까울까. 나는 건물로 들어가지 못하고 서성대기만 했다.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을 알게 되고,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나게 될까 봐 두렵다.
유배달의 생모와 내 생모가 같다고 가정한다면 나의 생모가 날 낳고 아버지를 떠났다가 김이순을 만나서 어쩌다 유배달을 가졌고 혼자 낳아 보육원에 버리고 또 사라져 버렸다는 얘기가 된다. 유배달은 어떤 여자를 위해서 나를 찾아야 한다고 했다. 내가 ‘어떤 여자’, 즉 생모의 소재를 알고 있다고 확신하지 않고서는 나를 찾아올 이유가 없다. 이 가정은 확률이 희박하다.
아니면 유배달은 이미 우리 생모를 찾았으면서 못 찾았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그녀를 위해 나를 찾으러 온 걸 수도 있다. 그럼 두 형제가 진영이를 놓고 신경전을 벌였다는 건데... 이런 말도 안 되는 막장 코미디는 아니어야 한다.
나의 생모와 유배달의 생모가 다르다면 여러 시나리오가 나올 수 있다. 그중의 가장 유력해 보이는 우리의 관계는 이러하다.
나의 생모와 결혼해서 살던 김이순 씨는 아내가 결혼 전에 아이를 낳았었던 것과그 아이가부잣집 핏줄이라는 걸 알게 됐고 그걸 이용해서 돈을 벌 수 있겠다 생각하게 된다. 그때 마침 자기도 몰랐던 혼외자 유배달이 나타난 것이다. 유배달이 나를 찾아서 내 생모가 누군지 알려주는 대가로 돈을 뜯어오면 유배달에게 생모에 대한 정보를 주겠다고 설득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유배달이 우리 주변을 맴돌다 나에게 접근했지만 아버지가 갑자기 사망해서, 아니면 진영이한테 맘이 생겨서, 아니면 내가 생모에 관해 전혀 궁금해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서 중도에 포기하고 떠나버린 것이다.
이 시나리오가 맞는다면 나는 곧 내 생모의 이름을 알게 될 것이다. 어쩌면 전화번호도 알게 될 수도 있다. 그러면 나는 내 생모를 만나 남편인 김이순 씨가 왜 나에게 유배달을 보냈는지, 내가 생각하는 시나리오가 맞는지 물어야 할 수도 있다. 문제는 그녀가 유배달과 남편 김이순의 관계를 모른다면, 아니 유배달 자체를 모른다면, 나는 알고 싶은 것은 알아내지 못한 채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만 만나게 된다.
생모와 마주하게 되면 내가 장인어른을 보자마자 진영이를 떠올렸듯이 그녀도 아버지와 쌍둥이처럼 닮은 나를 보고 아버지를 떠올릴 것이다.
그 상황이 오면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서로를 바라보게 될까.
망설이던 발걸음을 옮겨 장례식장 안으로 들어갔다.
사무실로 찾아가 전화로 문의했던 내용을 다시 말하니 직원이 컴퓨터로 이름을 조회하기 시작했다.
“김이순 씨 찾았습니다.”
“혹시 상주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그건 좀 곤란한데···”
“이미 말씀드린 대로 오래전에 헤어진 가족을 찾고 있습니다. 돌아가신 김이순 씨가 제 아버지 같아서 다른 가족분을 만나 몇 가지 여쭙고 싶습니다.”
직원은 잠시 망설이는 듯싶더니 컴퓨터로 눈을 돌렸다.
“상주 성함만 알려드리면 되는 거죠?”
“···네.”
물론 그 정도로는 부족하지만 우선 상주 이름이라도 안 후 다음 질문을 이어갈 생각이다.
망설이던 직원이 상주의 이름을 또박또박 말해 주었다. 이름을 듣는 순간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많은 정보들이 머릿속에서 빠르게 짜 맞혀지기 시작했다.
말을 잇지 못하고 서 있는 나를 보며 여직원이 찾는 분이 맞냐고 물었다. 나는 핸드폰을 열어 전화번호를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