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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모아 Sep 16. 2024

[27화] 민우 이야기 - 선명해진 그림자

<연재소설> 비밀의 부부

"네, 김선영 씨 맞아요. 같은 번호네요.


김 씨 성을 가진 남자. 작년 여름에 사망. 선영이란 딸이 있음.


내가 아는 선영이 누나가 김이순 씨 딸이라고?





밖으로 나오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어떻게 사무실을 나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한동안 멍해 있던 나는 장례식장 앞뜰 한쪽에 서서 선영이 누나에게 전화 걸었다. 누나는 전화를 받자마자 곧 다시 연락을 주겠다며 끊으려 했다. 나는 황급히 할 말을 이어갔다.


“누나, 장인어른 성함이 김자 이자 순자 쓰셨어?”


수화기 너머로 침묵이 시작되었다.


누나? 듣고 있어?”


계속 대답이 없어서 전화를 끊으려는 데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건 왜?"


“급해. 빨리 말해줘.”


“…어. 김이순 맞아.”


“나한테는 김동철이라고 하셨었는데?”


“김이순이라는 이름이 싫어서 평상시에는 늘 김동철이라는 이름을 쓰셨어. 근데 아버지 본명은 어떻게 안 거야?”


"......!"


"제부?"


"......"


"민우야!"


“오늘 몇 시에 퇴근해요?”


나의 시나리오는 완전히 틀렸다.


어떤 여자는 나의 생모가 아니라 내 아내 진영이었다.






처형의 집에 도착했을 때 집에는 혜린이만 있었다. 나를 보고 환하게 웃던 혜린이가 배고프다며 라면을 끓여 달라고 했다. 나는 라면을 끓이면서 지난여름 외할아버지 장례식장에 다녀왔는지 물어보았다.


“갔었지.”


“어땠어?”


“너무 이상했어. 한 번도 본 적 없는 외할아버지를 장례식장에서 처음 만난 거잖아.”


“거기서 뭐 했어?”


“그냥 있었어.”


라면 국물에서 피어오르는 뜨거운 김이 혜린이 안경을 하얗게 물들였다.


“아무것도 안 하고?”


“할 게 없었어. 있을 곳도 없었고 손님도 없었거든. 그래서 집에 갔다 다시 왔다, 왔다 갔다 하기만 했어.”


“그럼 엄마랑 혜린이만 있었어?”


“아니, 어떤 오빠가 같이 있었어. 자원봉사로 할아버지를 돌보던 사람이었대.”


갑자기 냉장고로 간 혜린이가 냉장고 문을 열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근데 그것도 되게 이상했어.”


“뭐가?”


“마지막에 있잖아. 그 오빠가 울더라. 엄마도 안 우는데…”


유배달이 울었다…


같이 살다가 헤어진 이산가족도 아니고, 태어나서부터 생판 남으로 살다가 만난 부자 사이에 무슨 정이 있다고 장례식까지 와서 운다는 말인가.


더 이해하기 힘든 건 아버지 간청으로 직장도 포기하고 프랑스로 돌아와 진영이 주변을 맴돌았다는 사실이다. 이 정도면 그냥 가족에 대한 병적인 집착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가족에 집착하는 사람이라면 쉽게 떠날 리가 없을 텐데... 자기 신분을 끝까지 숨긴 이유는 뭐고 갑자기 사라진 이유는 뭘까.


집착이 아니면 장인어른이 유배달에게 우리 이야기를 다 말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진영이에 대한 것과, 나에 대한 것, 그리고 그 깡패와 연관된 모든 일을. 다 알기에 올 수밖에 없었을 수도 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나와 함께 사는 진영이가 염려되었을 테니까.


“우리도 못 왔는데. 같이 있어 줬다니 고맙네.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궁금하다.”


“사진 보여줄까?”


“사진이 있어?”


“응. 엄마 몰래 장례식 후에 한 번 만났었어.”


“몰래?”


“학원 빼먹고 만났거든. 조카들 선물 사는 데 도와달라고 해서 같이 백화점에 갔었어. 조카가 셋이래서 내가 장난감 기차 골라줬어. 나 그거 어렸을 때 갖고 싶었거든. 인형도 같이 고르고, 맛있는 것도 먹고, 내 선물도 사고, 사진도 찍었어.”


혜린이는 휴대폰을 내 앞으로 내밀었다.


솜사탕을 들고 밝게 웃고 있는 혜린이와 유배달이다.


나는 말없이 사진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나의 영역에 들어와 온갖 발자국을 남기고 떠난 사람. 황당하고 언짢으면서 미안했다. 어떤 마음으로 우리를 바라보았을지, 어떤 마음으로 장례식장을 지켰을지, 나는 그 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다. 헤아릴 자격도 없지 않냐고 되묻는 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것만 같다.


“이 삼촌, 잘 생겼지?”


“아무나 삼촌이야?”


“내가 오빠라고 부르니까 나이 많다고 삼촌이라고 부르랬어.”


혜린이가 뾰로통해져서 핸드폰을 가져가 버렸다.


“근데 프랑스가 그렇게 크고 좋아? 왜 다들 프랑스로 가지?


“이 사람이 프랑스로 갔어?”


 “응. 큰 잘못을 한 누나가 있어서 혼내주러 간다고 했어.”


유배달이 그리 넉살이 좋았나? 누나라는 단어를 이토록 자연스럽게 쓰다니. 어쩐지 진영이랑 둘이 있을 때면 진영이한테도 누나라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내 줬대?”


내가 이메일로 잘 혼내줬냐고 물어봤더니 맘이 아파서 못했다더라.”


“… 왜 맘이 아파?”


누나가 너무 괴로워해서 맘이 아팠대.”


괴로워했다고? 뭘? 아버지 장례식에 안 간 걸 후회했다는 말인가? 아버지와 오래전에 연을 끊었어도 돌아가시고 나니 가슴이 아팠을 수도 있다. 그러면 왜 처형에게는 장례식에 안 간다고 매몰차게 군 걸까? 게다가 진영이는 나에게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도 말하지 않았다. 그 정도로 아버지를 부정하고 싶은 사람이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괴로워했다는 건 좀 모순적이지 않나.


나는 지난여름의 진영이를, 우리의 관계를 떠올려 보았다.


그 당시 갑작스럽게 변한 건 나였기 때문에 이상해진 건 그녀보다 나였다. 오히려 진영이는 신경질적으로 변해버린 나를 보며 어리둥절해하고 혼란스러워했다. 장인이 유배달을 보낸 걸 알았다면, 유배달이 동생인 걸 알았다면, 그 모든 걸 알고도 그렇게 태연하게 하루하루를 살아낼 수가 없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다. 그냥 그녀가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고 믿고 싶다.


“괴로워하면 혼내지 않아도 되는 건가?”


“이미 잘못한 걸 알고 후회하는데 왜 혼내. 나도 반성하는 데 엄마가 혼내면 오히려 잘못한 게 없어지는 느낌이 들어.”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이 이렇게 쉬운 일이었나? 평생 끓어오르는 분노와 원망을 주체할 수 없어서 글로 쏟아붓던 나는 가늠할 수 없는 감정이다.


이 모든 걸 가슴에 담고 사라진 그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이모부? 왜 그래?"


혜린이가 멍해 있는 나를 찬찬히 살피고 있다.


“그럼 그 사람은 지금 프랑스에 있겠네?”


“아니, 아프리카에 있는 콩고 민주 뭐라고 했는데 까먹었어. 그 나라는 한국이랑 많이 달라서 앞으로 이메일에 답장하기 힘들 거라고 했어. 내가 그 나라 찾아봤는데 너무 위험한 곳이라 무서워서 울었어. 그 삼촌 다치거나 죽으면 어떡하지?”


혜린이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기분이 이상해진다.


갑자기 진영이가 떠올랐다.


유배달과 테라스에서 단둘이 차를 마신 날, 빨갛게 충혈되었던 진영이의 눈. 아니 그 전에 그녀의 배를 만지던 유배달을 거북해하지 않던 모습도. 유배달의 얘기가 나올 때마다 피어오르던 근심스러운 표정들. 몰래 흘리던 눈물. 누군가의 연락을 애타게 기다리던 모습까지도.


지난여름, 진영이는 태연하지 않았다.


평소 같지 않은 그런 행동들이 나를 자극했었고,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한 것이다.


진영이는 유배달이 동생인 것도, 그가 위험한 타지로 떠난 것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지금 이 추측이 다 사실이라면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한다.


진영이는 내가 오래전에 장인을 찾아간 일까지 알고 있을까? 내가 한 짓을 알고 있다면, 철저히 감추고 싶은 내 비열하고 어두운 본성을 알고 있다면 나는 진영이를 다시 볼 자신이 없는데…


“늦었지? 미안. 장 봐 오느라.”


선영이 누나가 양손 가득 물건을 들고 들어왔다. 라면을 먹는 혜린이의 머리를 쓰다듬던 누나가 나를 바라본다. 누나도 알고 있을까?


“전화 끊고 가슴이 얼마나 두근거렸는지.”


“왜?”


“보통 때 사용하지 않는 이름이거니와 떤 일을 하시던 분인지 아니까.”


“…….”


“무슨 일이야? 아버지 이름은 어디서 들은 거야?”


이미 알아야 할 것을 알게 되었는데 선영이 누나에게 굳이 말할 필요가 있을까. 지금은 나도 이미 포화상태라 놀라고 흥분하는 누나까지 돌볼 여력이 없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묻을 수 있으면 묻고 싶다.


“그냥 맘이 안 좋아서 장례식장에 갔었어. 보내드린 장소라도 가보려고.”


“거길 어떻게 알고?”


“누나가 말했잖아. OO 시립 장례식장이었다고.”


“내가…? 그랬나?”


내 거짓말에 고개를 갸우뚱하던 처형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사건에 휘말린 줄 알았어. 혹시 과거에 한 일로 형사가 찾아왔나... 아님 방송국에서 찾아왔나…”


정말로 걱정했던 모양이다.


긴장이 풀린 누나가 식탁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내가 모르는 지난날 장인은 대체 어떤 모습이었을까.


“누나랑 진영이한테도 심하셨어?”


“좀 그랬지. 아빠가 무섭고, 하는 일이 창피하기도 했고, 정도 없었어. 어렸을 때는 집에 거의 안 들어오셨고, 캐나다에서 사는 4년간은 아예 못 만났으니까. 같이 살기 시작했을 때는 그냥 엄마를 괴롭히며 평화로운 삶을 흔드는 사람 정도로만 생각했어.”


내가 진영이와 고양이들 사이에서 느끼는 소외감과는 비교도 안 되는 소외감이었을 것이다.


"나보다 진영이가 아빠에 대한 원망이 커. 나는 알지만 진영이는 모르는 게 거든."


"......?"


"진영이는 아빠가 의부증이 심하다고 생각했지만 난 의부증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어. 엄마가 캐나다에서 다른 사람 만나는 여러 번 봤었거든. 그래서 진영이만큼 아빠가 밉지 않았어. 솔직히 많이 불쌍했었어. 아빠의 무시무시한 폭력성 때문에  연민이 곧 사라져 버리긴 했지만."


선영이 누나 얼굴에 후회가 어렸다.


“새삼 후회되네. 아빠를 밀어내기만 한 것 같아서. 진영이 일도 아빠가 해결했다고 하니, 어쩌면 아빠도 누구보다 가족을 원했을 수도 있겠다 싶어."


"......"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졌다.


"네가 만난 우리 아빠는 어떤 분이셨어?”


뭐라고 답해야 할까. 자신을 경멸하는 자식을 위해 사람을 흔적도 없이 해치운 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진영이한테 들었던 거랑은 많이 달랐어.”


“아빠뿐 아니라 아빠가 하는 일을 특히나 싫어했거든. 진영이는 아빠가 개입한 걸 알면 절대로 안 되겠더라. 며칠 전에 전화 왔었는데, 아빠 유품에서 네 명의로 된 통장이  나왔다는 얘기를 하니까 미친 애처럼 펄펄 뛰었어.”


“놀라는 게 아니라 펄펄 뛰었다고?”


“명의는 너로 되어있지만 너는 모르는 돈이고, 자기가 드리던 돈이었다는데? 오래전에 아빠가 키워준 값 내놓으라며 돈을 요구하길래 아무 통장이나 급하게 줘 버렸는데 그게 니 통장이었다나. 아빠한테는 그 통장으로 매달 죽을 때까지 송금할 테니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했다는 거야. 너 말이 맞는 거야, 아니면 진영이 말이 맞는 거야?”


대체 무슨 상황인지 가늠이 안 돼서 어리둥절했다. 돈이 어느 통장에서 빠져나갔는지 확인하면 누가 맞는지 금방 밝혀질 것이다. 다만 그녀가 왜 이렇게 이상한 말과 행동을 하는지 의아할 뿐이다.


“너랑 아빠는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고 스친 적도 없다고 고래고래 소리 질렀어. 통장에 대해서 너한테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그 돈은 분명히 자기가 보낸 거니까 네가 아빠한테 돈을 줬다는 얘기 누구한테든 한 번만 더 하면 다 같이 죽는 줄 알래.”


“… 다 같이 죽는 줄 알라 했다고? 진영이가?”


“응! 통장 가지러 당장 나올 것처럼 굴었다니까. 돈을 좋아하긴 해도 절대 남의 돈을 탐내는 애가 아닌데, 걔 돈 필요하니?”


순간 진영이가 정말 나 모르게 돈이 필요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아프리카로 떠난 유배달에게 주려는 건가? 말이 되지 않는다. 처형은 유배달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그녀도 이미 유배달이 자신의 동생이란 걸 알고 있지는 않을까.


“유품은 어떻게 받았어? 누나가 장인어른 집에 가서 정리한 거야?”


“아니, 자원봉사로 아빠를 관리하던 젊은 남자가 줬어. 고맙게도 그 사람이 장례식 내내 같이 있어 주기도 했고.”


선영이 누나는 알면서 모르는 척 연기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유배달이 누구인지 모르는 게 분명하다.


그러면 유배달이 누나에게 유품을 전해줬을 테니 그도 내 명의로 된 통장을 보았을 것이다.


그는 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도대체 장인어른은 유배달에게 어디까지 얘기한 걸까. 자기가 살아온 세월을, 그 많은 과오를, 나 때문에 할 수밖에 없었던 일까지 다 말했을까? 그래서 유배달이 우리 둘을 대신하여 속죄하는 심정으로 타지로 떠난 걸까?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니 유배달에게 느꼈던 미안함과 안쓰러움이 사라져 버렸다. 그의 행태가 모조리 아니꼬워졌다.


자기가 무슨 예수 그리스도라도 되는 줄 착각하는 그 시건방짐.


지가 왜. 뭔데. 이런 더러운 기분은 정말 오랜만이다.


“화장이 끝날 즈음 울더라. 자기 아버지 생각이 났대. 얼마 전에 돌아가셨다고 하더라고. 참 신기하게도 위로가 되는 거야. 생판 남인데 말이지.”


누나에게 말해야 하나 다시 고민된다. 지금 모른 척 묻어 버린다면 언제까지 묻을 수 있을까.


진영이와 유배달은 왜 나에게, 선영이 누나에게 아무 말도 안 했을까. 뭘 숨기고 싶었던 걸까.


머리가 너무 복잡하다. 지금 내가 필요한 건 선영이 누나의 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누나가 나서서 나 대신 진영이에게 묻고 싶은 걸 다 묻고, 혼란스러운 이 모든 질문에 답을 찾아 주길.


누나에게 이야기할 거라면 지금이어야 한다. 지금을 놓치면 더욱 말하기 힘들 것이다. 이건 뒤늦게 털어놓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저기, 누나…”


식탁 위의 내 핸드폰이 번쩍거렸다. 누나와 내 시선이 함께 핸드폰으로 향했다. 한동안 멍하니 메시지만 바라보았다. 어두워진 내 표정에 누나가 내 핸드폰을 가져가 메시지를 읽었다.


“검은 옷은 있어? 장례식장 가면 다 준비돼 있겠지?”


내 핸드폰을 보던 누나가 한숨을 내쉬며 주소를 받아 적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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