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생전 단 일 초도 중요한 적 없던 나란 사람이 마지막 가는 길에는 가장 중요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어머니도 불쾌하겠지만 나 역시 편치 않다. 어떤 모양새로 빈소를 지켜야 하나 고민하다가 웃음이 터져 나왔다. 거기 갈 생각을 하는 건가. 내가 왜. 대체 왜.
전화가 계속 울린다.
어머니 빈소에 나타나지 않는 외아들 얘기를 하며 수군대는 이들 때문에 가족들 입장이 말이 아니겠지만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허락 없이 멋대로 결혼했다고 더 이상 가족이 아니다 쫓아내지 않았는가.
나는 갈래갈래 흐트러진 생각을 단순하게 다듬기로 했다. 그냥 내 마음 가는 대로 뭉개기로.
어느새 집 앞에 도착했다.
어둠이 내린 주황색 빌딩은 명도와 채도가 모두 열 단계씩 내려간 그냥 평범한 건물이었다.
나 편한 방식으로 오해든 뭐든 실컷 하면서 내키는 대로 살고 싶은데 마음이 계속 왔다 갔다 한다.
핸드폰을 열어 거실 CCTV 화면을 보았다. 열흘 동안 계속 꺼져 있었는데 오늘은 카메라가 켜져 있다. 카메라를 켰다는 건 진영이가 외출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화면 안으로 진영이가 쑤욱 들어왔다.
내가 보는 걸 아는 걸까. 진영이가 카메라 앞에 다가서서 렌즈를 응시한다. 말없이 서 있다가 오른손을 들어 인사하듯 흔들며 미소 짓고는 화면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카메라 테스트를 하는 것 같다. 다시 화면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렸지만 바로 외출했는지 진영이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고양이 세 마리가 번갈아 화면 안으로 들어왔다 사라졌다. 이 녀석들이 우리 쌍둥이들이었다면 나는 과연 평범하게 살 수 있었을까.
처형이 누군가와 통화하는 동안 혜린이와 단둘이 나누었던 대화가 떠오른다.
“혜린아. 잘못했는데 후회를 안 하는 사람이 있어. 반성도 안 하고 사과도 안 해. 어떻게 할까?”
혜린이는 나를 빤히 보다가 물었다.
“큰 잘못이야?”
“응. 아주 아주 커.”
“그럼 후회하겠지.”
나는 말없이 핸드폰만 만지작거렸다. 혜린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 사실 지난번에 엄마한테 엄마가 이렇게 독하고 못된 사람이라 아빠가 가버린 거라고 말했었어. 엄마 때문에 내가 아빠 없이 자라야 하는 거라고. 그날 밤 엄마가 방에서 몰래 울더라. 나도 마음 아파서 많이 울었는데 사과는 안 했어. 앞으로도 안 할 거야. 그냥 내가 안 한 일인 것처럼 살 거야.”
정길이한테서 문자가 들어왔다.
[형, 와서 그냥 서 있기만 해.]
고민을 왜 했나 싶을 만큼 나는 무리 없이 잘 해내고 있다.
조문객이 많을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인사를 받는 일도 제법 태연하게 해내고 있다. 굳은 표정으로 목례하고 맞절만 하면 되니 크게 문제 될 건 없다.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그냥 허수아비 노릇만 하는데도 정신이 하나도 없다. 심신이 몹시 지쳤는데 잠이 오지 않아 다행이다. 이곳에서 자기 싫다. 꿈을 꿀까 두렵다.
조문객이 드문 새벽 시간에는 핸드폰을 꺼내 프랑스 집 CCTV 화면만 보고 있다. 카메라 정면을 향해 미소 짓던 날을 마지막으로 진영이는 보이지 않았다. 고양이들을 두고 멀리 갈 사람이 아니니 내가 안 보는 시간에만 거실에 나오는 듯하다.
새벽 2시. 장례가 시작된 지 나흘이 지났고, 하루만 더 지나면 발인이다.
무슨 오일장이냐 한소리 하고 싶었지만 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나는 의견을 낼 수도, 낼 이유도 없는 입장이다.
나흘쯤 되니 올 사람은 다 온 건지 자정이 지날 즈음 빈소가 한가해졌다. 나를 제외한 가족들은 휴게실에 누워 잠이 들었고 빈소에는 나와 몇몇 도우미분들만 있는 정도다.
정길이가 볼 때마다 뭘 좀 먹어라, 눈 좀 붙여라, 권하지만, 그 무엇도 하고 싶지 않다. 형, 먹지도 자지도 않고 빈소만 지키고 있으니까 완전 효자 같아, 하는 소리에 뭐든 먹고 어디서든 자 보려 했지만, 이내 포기해 버렸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도저히 할 수가 없다.
다시 CCTV 화면을 열어보았다. 낯선 여자가 우리 집 거실에 있다. 자세히 보니 희경이다. 오늘은 희경이를 초대했나 보다.
내가 없어도 문제없이 재미나게 지내는 진영이가 하나도 기특하지 않다. 왠지 모르게 골이 나서 핸드폰을 꺼버렸다. 진영이 메시지에 답장하지 않은 건 나지만 나를 궁금해하지 않고 잘 지내는 건 딱히 기분 좋지 않다.
벽에 기대앉아 깜빡 졸았나 보다. 고개가 툭 떨어지다 눈이 떠졌다.
꿈을 꾸는 건가.
빈소 입구에서 진영이가 사뿐사뿐 걸어오고 있다.
멍하니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내 앞에 선 진영이가 가볍게 목례한후 영좌에 무릎 꿇고 앉아 향에 불을 붙여 향로에 꽂았다. 영정사진을 잠시 바라보던 그녀가 헌화하고 절을 한 후 내게로 다가와 절하기 시작했다.얼결에 나도 맞절을 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빈소를 빠져나갔다. 저렇게 말랐었나. 검은 옷을 입은 진영이 뒷모습이 유난히 가늘어 보인다. 나는 멍하니 서서 멀어지는 진영이의 뒷모습만 바라볼 뿐 잡지 못했다.
정신 차리고 뒤따라 나갔지만 진영이는 그새 사라지고 없었다. 병원 앞을 한참 헤매다 포기하고 전화하려는데,그녀가 장례식장 앞 벤치에 앉아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리 뛰어다녀?”
“봤으면 좀 부르지.”
숨을 고르며 그녀 옆에 앉았다.
새벽 겨울바람이 무척 차갑다.
재킷을 벗어 그녀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하고 싶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사람들이 물으면 누구라고 소개해야 할지, 소개했을 때 상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그 반응이 진영이를 아프게 하지는 않을지 머리가 복잡했다.
“어떻게 온 거야?”
“너 혼내주러 왔지.”
“뭘?”
그녀가 피식 웃는다.
“너 또 거짓말했더라?”
어떤 거짓말일까. 하도 많아서 어떤 걸 말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욕실 훔쳐본 거 너 아니잖아. 근데 왜 너라고 했어?”
가장 약한 거짓말을 들켜서 다행이다. 딱히 답할 말이 없어서 그냥 가만히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너 떠나고 다음 날인가? 창문 뒤에서 또 누군가 욕실 안을 훔쳐보는 거야. 창문을 여니 고등학생쯤 돼 보이는 키 큰 남학생이 방긋방긋 웃으며 나를 바라보더라. 봉쥬르 인사하면서. 어눌한 말투로 계속 중얼거리며 해맑게 웃는 게 하도 기막혀서 뭐 하는 짓이냐고 화를 내는데 멀리서 할머니 한 분이 뛰어오셨어. 창문이나 울타리 뒤로 인기척이 들리면 인사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지 엿보는 건 아니라며 연신 사과하더라. 할머니가 사과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 애는 계속 웃고만 있는데··· 지난번에도 이런 적 있느냐고 물었어. 이미 경찰에 신고해서 취소해야 하니 제대로 대답해 달라고 했지. 할머니가 깜짝 놀라면서 몇 번 더 있었지만, 항상 자기가 바로 끌고 가서 뭘 본 건 없다며 신고한 걸 취소해 달라고 부탁하더라고.”
허탈해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우리 둘 다 소설 집필을 집어치워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둘이 한꺼번에 공상의 나래를 펼치는 통에 일상이 번거로울 정도로 분주해지니 말이다.
“상주가 빈소를 비워도 돼? 어서 들어가.”
상주. 들을수록 부담스럽다.
갑자기 관계에 대해 돌아보게 된다. 제일 가까운 사람이 차야 할 이 완장을 철천지원수 같은 내가 차고 영정 앞에 서 있는 이유가 뭔가. 나보다 윗집 남자에게 더 의지하던 진영이는 나를 남편이라고 생각하긴 할까. 아버지는? 유배달은? 우리는 대체 서로에게 무엇일까.
"난 네가 이렇게 쉽게 한국에 올 수 있는 사람인 줄 몰랐어."
"......"
"그것도 한 번 본 적 없는 시어머니 때문에."
"내가 그분 때문에 나왔겠어?"
자기 부모 장례식도 안 간 사람이니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나오진 않았을 거다. 그럼 왜 나왔냐고 묻자 진영이는 얼른 말을 돌렸다.
“힘들지?”
“······”
“내가 뭐 해 줄까?”
“뭘 해줄 수 있는데?”
“원하는 걸 말해봐. 금연같이 정말 하기 힘든 일, 내가 못 할 것 같은 일로.”
고양이. 알면서 뭘 묻는지.
지금이 절호의 기회란 걸 잘 알지만 나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네가 할 수 있는 선이 어디까지인지 몰라서 말 못 하겠어.”
진영이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문득 우리가 친구가 아닌 부부가 된 것이 과연 잘한 결정이었을까 의문이 든다. 그녀도 이런 심정으로 내게 결혼한 이유를 물었던 걸까?
“뭐 하나 물어봐도 돼?”
“뭔데?”
“왜 나한테 결혼하자고 했었어?”
진영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어?”
“그게 인제야 궁금해졌어?”
“당연한 거를 궁금해하는 게 이상한 거 아닌가?”
“···그런가?”
씁쓸한 표정의 진영이를 보고 있자니 사랑보다 더 특별한 이유가 있는 느낌이 든다.
“대답해 봐. 왜 결혼하자고 했는지.”
“비밀이야.”
나를 골탕 먹이려는 것 같아 나도 튕기고 싶은데 덫에 걸린 듯 끌려가게 되었다.
“아까 원하는 거 말하면 들어준댔지? 그거 지금 쓸게. 대답해. 왜 뜬금없이 사귀자고 하고, 결혼하자고 했었어?”
활짝 웃던 진영이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아니, 어두워졌다.
“진짜 알고 싶어?”
“응. 100% 진실만. 장난하지 말고, 돌려 말하지 말고.”
잠시 망설이던 진영이가 입을 열었다.
“그럼 꼬치꼬치 따져 묻기 없음.”
“뭐가 이렇게 심각해?”
진영이는 고개를 돌려 허공을 바라보더니, 무심하게 툭 대답했다.
“내 옆에 묶어 두려고.”
예상 답안과 너무 달라서 당황했다. 따져 묻지 말라고 했지만 이건 좀 짚고 넘어가야겠다.
“··· 왜 묶어 둬?”
“언제든 내 뒤로 숨길 수 있게.”
모성애를 느꼈다는 건가. 대체 무엇으로부터 나를 숨긴다는 건가. 그녀의 대답에서 왠지 모를 무게가 느껴졌다. 그녀가 말속에 숨긴 진실이 무언지 알 수 없어서 잠시 멍해 있었다. 속뜻을 물으려는 데 진영이가 급히 화제를 돌렸다.
“너는 내가 아니었어도 결혼했을까?”
“아니. 안 했지."
"그렇군."
"너는?”
“나도 안 했지.”
"......"
“그럼 우리 둘이 각자의 배우자 때문에 못 만나고 살지는 않았겠군.”
“그렇지.”
“계속 친구로 지냈을 수도 있었다는 얘기네.”
"...... 결혼한 걸 후회해?"
“글쎄. 너는?”
후회한다기보다는 미안한 마음이 크다. 나 때문에 그녀까지 벌 받는 것 같아 늘 마음이 무겁다. 앞으로도 나와 함께라면 단란한 가정 속에서 대다수의 기준으로 평범해 보이는 행복을 누리며 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삶이 나에게는 허락될 것 같지 않다. 더 늦기 전에 그녀를 놓아주어야 하나.
“내가 잘 살 수 있을까?”
어머니를 증오했고, 차오르는 분노를 어쩌지 못해 맘속으로 수없이 죽이다 글을 써서 말라죽도록 괴롭혔다. 내 힘으로 안 되는 놈은 장인의 힘을 빌려서 응징했다. 나라면 줄넘기를 고양이 속박용으로 쓰지 않고 변기를 밟고 올라가 목을 매는데 쓰겠다는 말을 할 때도, 천장 조명걸이에 직접 줄넘기를 걸고 듀끌로를 화장실로 끌고 갔을 때도 죄책감 따윈 없었다. 이런 내가 잘 살 수 있을까. 그럴 자격이 있을까.
“못 살 이유, 그런 게 있어?”
아이들을 잃은 건 내가 부모 자격이 없어서야, 말하고 싶었다. 털어놓으면 더 무거워질 그 말을.
“잘 살지 말고, 그냥 살자. 우리 방식대로.”
진영이가 해맑게 대답했다.
나를 보며 미소 짓던 그녀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 돌아보니 장례식장 입구에서 큰고모가 우리를 향해 빠르게 걸어오고 있었다. 고모는 인사하는 진영이를 위아래로 한번 훑고는 없는 사람마냥 대꾸도 하지 않았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어서 들어와.”
큰고모는 나에게 눈을 흘긴 후 다시 건물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더 이상 이 자리를 참아낼 이유가 없음을 깨달았다.
“가자.”
나는 진영이 손을 잡았다.
“한 번이면 됐어. 나 때문에 더 이상 가족들이랑 등지지 마.”
“내가 싫어.”
“네가 이러니까 내가 너한테 의지할 수도 없고, 네 앞에서 당당할 수도 없는 거야. 내가 원치 않는 방식으로 나를 위하지 말아 줘. 나는 내가 지켜!”
갑자기 히스테릭해진 그녀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니, 왜 화를 내?"
진영이는 대답 없이 가방을 뒤져 무언가를 꺼냈다.편의점에서 사 온 즉석 어묵탕이다. 먹으면 체할 것 같은데 입에서는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안 먹고 있지? 쓰러지겠다.”
진영이가 비닐을 뜯어, 내 앞으로 내밀었다.
“조금이라도 먹고 어서 들어가.”
나는 따뜻한 국물을 조금 마셨다. 희경이에게 방문 탁묘까지 부탁하고 바로 달려온 것도 놀라운데 이런 생각까지 하다니. 진영이가 몹시 알고 싶어 했던 사실을 지금이라도 말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술 취해서 여자한테 실수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갑자기 무슨 소리야?”
이렇게 힌트를 주는데 또 전혀 못 알아듣고 있다.
“너는 어떻게 니 이름도 못 알아들어?”
진영이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는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아는 여자 중에 준영이란 여자는 없었다고.”
진영이는 멍해 있다가 그제야 말귀를 알아먹었는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한동안 허탈하게 웃던 그녀가 가방을 추스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빌어먹을. 용서하고 화해하는 게 좋다고 누가 그래? 그거 억지로 하지 말자. 우리만 죽겠다.”
이번엔 내가 진영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는 못 했는데 그녀가 선택한 단어들이 왠지 모르게 오싹했다. 그동안 의아했던 수많은 것들이 하나씩 머릿속에 짜 맞춰지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 나 자신이든 다른 누구든 억지로 용서하고 용서받으려고 애쓰지 않을 거야. 너도 그랬으면 해.”
뜨거운 불구덩이에서 꺼낸 쇳물 같은 불안감이 목구멍을 막아 버려 아무 소리도 낼 수가 없다. 의심했던 모든 것이 모조리 사실일 것 같은 불길함··· 애써 부정하며 간신히 덮어 놓았던 일들인데...
“천벌 받을 죄를 지었어도 돈과 지위가 있으면 마지막 가는 길이 값질 수 있구나. 염치없이 오일장이 웬 말이야.”
온몸에 전율이 올랐다. 내가 놀란 걸 아는지 모르는지 진영이는 태연한 표정으로 재킷을 벗어 내 어깨에 걸쳐주었다.
“난 아침 비행기로 돌아가. 집에서 보자.”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그녀는 분명 나와 어머니의 지독한 악연을 알고 있다. 어쩌면 내가 어머니에게 한 짓까지도 다.
뒤돌아 걸어가는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진영이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순간 그녀가 나와 어머니의 관계뿐 아니라 장인어른과의 관계도 알고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10년 전, 양우석이 다시 찾아올까 봐 안절부절못하던 그녀가 어느 날부턴가 차분해졌다. 극도로 불안해하던 사람이 별다른 확신 없이 갑자기 안정을 찾을 리 없다는 걸 왜 진작 의심해 보지 않았을까.
그 당시에도 지극히 수상했지만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아 억지로 묻어 버렸었다. 그렇다면 진영이가 장인어른을 만났다는 건데··· 장인어른은 대체 어디까지 말했을까. 결코 내 얘기를 직접 했을 리는 없지만, 둘이 깡패에 대해 조금이라도 얘기를 나누었다면, 아버님이 그놈을 손봤다는 걸 진영이가 눈치챘다면, 그 뒤에 내가 있다는 걸 모를 리 없다.
김이순이란 이름을 듣자마자 경직되던 선영이 누나가 떠오른다. 아버지의 과거 때문에 불안에 떨던 누나의 모습.
- 언제든 내 뒤로 숨길 수 있게.
조금 전 진영이가 한 말이 귓가를 쟁쟁 울린다.
어쩌면 진영이는 이미 오래전에 내가 한 짓을 다 알게 됐으면서도 자기가 안다는 사실을 나에게 감추고, 10년 전 일이 세상에 발각되더라도 내가 드러나지 않도록 지독하게 부녀 관계를 끊어버린 걸 수도 있다. 그래서 통장의 출처가 자기라고 우겼을 수도···
장인어른이 갑자기 흥신소 일을 그만두고 내게도 찾아오지 말라 했던 것 역시 진영이가 한 일인 건가.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간신히 가다듬고 다시 질문했다.
“장인어른 장례식에 안 간 게 아니라 못 간 거였어?”
멈춰 섰던 진영이가 돌아서 나를 바라본다.
미친 듯 요동치는 심장 때문에 숨쉬기가 힘들다.
그녀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한동안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본 얼굴 중 가장 슬픈 얼굴로.
그녀가 이내 뒤돌아 걷기 시작한다. 다가가고 싶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모른 척해주지. 그냥 끝까지 모른 척해주지.
진영이와 유배달이 나에게, 아니 다른 이들에게, 모든 걸 숨길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제 알게 되었다. 장인어른이 유배달의 방송을 막은 이유도.
그 일이 세상에 발각되는 날이 와도 내가 진영이 뒤에 숨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내가 수용할 수 없는 방식으로 누군가 나를 위해주는 건 참 고통스러운 일이란 걸 이제 알게 되었다. 나 대신 죄책감을 안고 숨죽이고 살아온 그녀를 나는 이제 어떻게 봐야 하나.
정말 비밀 같은 건 없는 건지 아무리 잘 감추어도 어디서 어떻게 새는지도 모르게 새어나가 흘러가지 말아야 할 곳을 향해 흘러가 버린다. 어쩌면 듀끌로에게 한 짓도 진영이에게 흘러가는 중인 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다 알고 있을지도···
그렇다면 진영이는 언제까지 나를 이해해 주고 모르는 척 눈감아 줄 수 있을까.
미선 선배가 흘리듯 했던 말이 떠오른다.
-나는 왠지 고양이는 그냥 핑계일 것만 같아.
나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도, 완전히 밀어낼 수도 없던 진영이에게 고양이는 방파제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네가 참 많이 힘들었겠구나.’
애틋한 부모는 아니었지만 부모의 죽음조차 공유할 수 없는 우리는 대체 무얼까 고민했었는데 이제는 그보다 더 큰 고민이 밀려온다. 모든 것이 다 들통나 버린 지금, 우리는 진짜 부부가 될 수 있을까. 나는 어쩐지 그 반대일 것만 같다.
하루 남은 장례식이 짧게 느껴진다. 이곳을 떠날 때가 되면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내 집은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지만 이젠 그 어디로도 갈 수가 없다.
한 개비 남겨둔 담배를 안주머니에서 꺼냈다. 담배를 피우는 것이 더 이상 망설여지지 않는다. 우리 둘 다 이제 그만 노력해야 할 때가 왔다. 날뛰는 내 마음을 붙잡아주던 울타리를 나오기로 결심하니 홀가분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