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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모아 Sep 13. 2024

[24화] 민우 이야기 - 원치 않은 재회

<연재소설> 비밀의 부부

누나, 무슨 걱정을 하는 거야? 그럴 거 없어.”


처형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이다.


“그럼 이 통장은?”


“혼인 신고한 후 한번 더 찾아갔는데 사무실이 사라지고 없었어. 수소문해서 찾아가 보니 상가 건물에서 경비 일을 하고 계셨어. 예전과 달리 무척 수척한 모습에 못 알아볼 뻔했어. 진영이와 부부가 되었다고 말씀드리니 기뻐하시더라. 그리고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당부하셨어. 우리가 만나다 보면 진영이가 알게 될 거라고.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어. 만나고 살 수는 없더라도 뭐든 하고 싶었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 막도장을 만들어서 내 이름으로 은행 계좌를 하나 열었어. 그리고 아버님께 다시 찾아갔지. 아버님이 걱정하시니 앞으로 못 찾아뵙겠지만 사위가 드리는 용돈은 받으셔야 한다고. 사위라는 말이 듣기 좋으셨나 봐. 흔쾌히 받아 주셨어.”


선영이 누나가 통장을 열어보았다. 8년간 입금만 되었고 출금한 적은 한 번도 없이 손때만 가득한 통장.


“암으로 오래 투병하셨다고 들었는데 병원비로 좀 쓰시지··· 쓰지도 않을 걸 대체 얼마나 열어 본 거야. 닳고 닳았다.”


“······”


통장을 만지는 누나의 눈에서 눈물이 스며 나왔다.


“그것도 모르고 난 장례식 내내 화가 나 있었어. 죽지 못해 살고 있는 나한테 왜 이렇게 자꾸 할 일만 생기나 버거웠고 짜증 났거든. 아버지 혼자 돌아가신 게 가엽긴 했지만

그런 감정조차도 버겁고 힘들었어. 모든 게 다 숙제 같아서 빨리 대충 끝내 버리고만 싶었어.”


“혼자서 다 해야 했으니...”


“넌 어쩜 이런 일을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던 거야?”


“미안해. 아기 낳은 지 얼마 안 된 누나한테 이런 얘기할 수 없었어. 게다가 출산 직후부터 혜린이 아빠 때문에 많이 힘들어했었잖아.”


“내가 미안하다. 너 혼자 이 무거운 짐을 다 지게 하고···”


“······”


“지금 나도 이렇게 놀랍고 후회가 밀려와서 괴로운데 진영이는 어떨까? 이걸 알게 되면 걔가 어떻게 살아?”


“누나만 말 안 하면 진영이는 알 일 없어.”


“진영이는 이런 것도 모르고 고양이니 뭐니 제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사는 거잖아. 너한테 정말 면목 없다. 이 얘기를 다 듣고 내가 어떻게 진영이를 모른 척 그냥 놔둬?”


“알면 나랑 못 산다고 할 거야. 내 눈치만 살피며 살게 되든가. 그렇게는 내가 못 살아.”


말은 이렇게 했지만 정작 입이 근질거리는 건 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래 들어 걸핏하면 “내가 누구 때문에···”라는 말을 자주 내뱉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본전 생각이 나는 걸까? 나는 요새 안 하던 생색을 내며 진영이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




 




술은 역시 나랑 안 맞는다. 속이 불편해서 밤새 뒤척이다 눈을 뜨니 새벽 5시였다.


선영이 누나가 깨지 않도록 조심하며 집을 나섰다.


크리스마스 당일에 문 연 사우나가 있을까 고민하다 몇십 년간 단 한 번도 보수공사를 안 한 듯 보이는 목욕탕 앞에 발이 멈췄다. 다행히 불이 켜져 있다.


사우나를 하고 나니 출출해졌다. 목욕탕 앞 해장국집에서 아침을 먹은 후 집으로 발을 옮겼다. 명의만 내 이름인 내 집. 주인은 난데 내 허락도 없이 허물어지고 새로 지어진 내 집.


어머니는 아버지가 이 집을 당신이 아닌 내게 남겨 주었다는 사실을 단 한 번도 인정하지 않았다.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든 그거야 자유지만 실제로도 이 집에 대한 나의 소유권을 묵살해 버리는 건 난감했다. 내가 들어가 살 수도 없고, 남에게 팔 수도 없는 방식, 즉 당신이 이 집을 계속 점거하는 방식으로.


자식의 도리라는 명제 앞에서 집주인인 아들이 어머니를 내쫓고 집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다는 법의 논리는 나약하기만 했다. 가족, 그것도 어머니가 계속 살겠다는데 집세를 받으랴, 다른 사람에게 팔 수가 있으랴. 이럴 때만 동원되는 가족이라는 굴레가 몹시 역겹다.


살 때도 자기 맘대로 더니 떠날 때도 자기 맘대로다. 내게 한마디 양해도 없이 당당하게 살다가 일언반구 없이 집을 없애버렸다. 아버지가 주신 집을 곱게 넘기기 싫었음이 뻔하다.


내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 어떤 꼴로 만들어 놨는지.


집 앞에 도착해서도 여기가 맞나 잠시 헷갈렸다. 말이 리모델링이지 예전 집을 완전히 부수고 새로 올린 건물이었다.


이웃한 건물들 사이에서 지극히 생뚱맞은 모양새로 할 말을 잃게 만드는 건물···


베네치아 부라노 섬에서 방금 날아온 듯한 형광색 건물이 떠오르는 햇빛 아래 눈부시게 주황을 발광하고 있었다. 찌그러진 땅콩 모양의 타원형 건물은 주택도 아니고 상가도 아닌 모양으로 청록 기와까지 얹혀져 얼핏 보기엔 놀이동산에 있는 공중화장실 같기도 했다. 새로 지은 집이 예전 집보다 매매하기 더욱 어려워진 것이다.


어머니가 손대지 않은 건 단 하나, 애지중지하던 능소화뿐이었다. 당신을 꼭 닮은 능소화. 다른 건 몰라도 프랑스로 돌아가기 전에 저것만큼은 반드시 베어버릴 것이다.


병상에 누워 있다고, 더 이상 싸울 상대가 아니라고 생각한 내 오만함에 콧방귀가 나온다.


이 선물을 받을까 말까. 받는다 해도 순순히 받을 수는 없다.

어떤 형태의 답례품을 드려야 할지 깊이 고민해 봐야겠다.


어머니와 나의 싸움이 시작된 게 언제였더라?


10살까지는 내가 일방적으로 당했으니 싸움이라 할 수 없을 테고, 11살부터라고 봐야 할 것이다.


3학년 끝자락, 봄방학의 어느 날 밤, 담임 선생님이 갑자기 집으로 찾아오셨다. 그날이 바로 어머니의 일방적인 공격이 멈추게 된 날이다.


교대를 졸업하고 온 첫 발령지에서 이십 대의 가녀린 여자 선생님은 인생에서 가장 골치 아픈 일을 겪게 된 것이다.

그날 밤 다락방에 쓰러져 있던 날 안아 올리던 선생님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빨강머리 앤처럼 주근깨가 많던 선생님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주근깨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1학기 내내 나를 유심히 지켜보던 선생님은 여름방학 이후부터 구석구석 내 몸을 살피기 시작했고 제일 좋아하는 게 뭐냐, 제일 무서운 게 뭐냐 등의 시답지 않은 질문을 하며 내 대답을 받아 적곤 했다.


증거가 충분해진 봄방학의 어느 밤, 선생님은 우리 집 대문 앞을 지키고 있다가 귀가하던 어머니에게 긴히 드릴 말씀이 있다는 얘기로 집에 들어온 후 다과를 준비하던 어머니를 따돌리고 다락으로 올라와 준비해 온 망치로 문을 부수고 나를 구해 주었다.


그 일로 곤욕을 치른 선생님을 나는 무척 원망했었다. 그런 어머니라도 친어머니가 아니란 사실은 괴로웠고, 내가 친자식이 아니라는 이유로, 아니 정말로 미워서 가두고 잔혹하게 학대했다는 사실은 어린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일 이후 나는 대구 할아버지 댁에서 3년간 지내다가 서울에 있는 중학교에서 공부하고 싶다고 졸라 다시 예전에 살던 집으로 돌아왔다. 더 이상 어머니가 편히 살도록 내버려 둘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집으로 돌아오기 전,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을 찾아가 다시 어머니와 살게 되어서 선생님의 노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나의 당돌함에 놀란 선생님은 어디에 어떻게 쓸 것이냐 묻다, 걱정스레 쳐다보다, 연락하면 언제든 달려가겠노라 득하다 결국은 공책을 넘겨주셨다. 이 공책은 증거가 될 수 있는 글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졌는지 내게 알려 주었고, 훗날 내 첫 소설의 근간이 되기도 했다.


나는 선생님이 주신 공책과 병원에서 받은 진단서를 가지고 서울 집으로 들어갔고, 사춘기가 절정에 오른 남학생이 할 만한 행동-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의 교묘한 반항-을 하면서 어머니와 대립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은 3년 동안 받은 심리치료 덕인 것 같다.


치료사는 나에게 사랑받기 위해 너무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나에게 필요한 말이라는 건 인정하지만 내가 들은 말 중 가장 모욕적인 말이었다.


대구를 떠나는 날 나는 다짐했다. 다시는 사랑을 구걸하지 않을 것을. 내가 원할 때 내 방식대로, 내가 사랑할 것을.


어머니의 암 발병은 어쩌면 나와 살면서 받은 스트레스 때문일지도 모른다.


6년 전 어머니는 유방암 수술을 받았고, 완치 판정을 받기 직전에 암세포가 다시 척추와 뇌에서 발견되었다. 항암 치료를 다시 시작했지만 별 효과가 없었고 암세포가 퍼진 척추뼈 때문에 거동이 불가능해지면서 요양병원에 입원하셨다. 그 후로는 종합병원과 요양병원을 오가며 지내다가 두어 달 전부터는 요양병원에만 머물고 있다고 한다.


약기운 때문에 하루 종일 비몽사몽 잠에 빠져있다고 들었지만, 어머니를 만나야겠다.


병실 앞에 도착했을 때 뜻밖에도 우리 재단의 고문 변호사가 병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황 변호사는 나를 보고 흠칫 놀랐고 그 모습을 보니 괜스레 기분이 언짢아졌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제가 묻고 싶은 말인데요?”


“저야 일 때문에···”


“크리스마스 아침부터 충성이시네요.”


황 변호사는 나를 대면하는 게 껄끄러워 보였다. 나도 딱히 할 말이 있는 건 아니니 그냥 자리를 피해 주기로 했다.


“저는 이만.”


나는 병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한평생 원망하고 증오하던 사람이 육신의 감옥에 갇혀 헐떡대고 있다.


간병인이 긴장한 표정으로 나를 주시한다.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병원에 들어선 지 십 분도 되지 않아 만나는 사람마다 나를 악인 취급이다. 그들 못지않게 나도 적의가 솟았다.


“잠시 둘이 있겠습니다.”


간병인은 내 말을 들었으면서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나 역시 물러설 이유가 없었다. 나는 그녀가 나갈 때까지 그녀를 응시했다. 간병인은 마지못해 자리를 비키며 한마디 했다.


“용변 처리할 시간이에요. 그래서 변호사님도 나가신 거예요.”


간병인이 나간 후 나는 침대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눈을 뜨고 있는 것도 힘겨워 보였다.


말라비틀어진 나무토막.


지금 이 모습을 보는 나는 어떤 감정을 느껴야 보편적인 걸까. 가슴에 일렁이는 이 격렬한 감정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복잡하게 얽힌 혼란스러운 감정 중 확실한 게 있다면, 내가 먼저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약간의 미안함과 어쩌면 어머니도 나한테 한 짓을 후회하고 있진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 그리고 능소화의 밝은 주황색을 좋아했을 뿐 건물로 날 골탕 먹일 마음은 없지 않았을까 하는 너그러움 정도다.


어머니의 입술이 달싹거린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데 들리지 않는다.


나는 몸을 숙여 귀를 갖다 댔다.


소곤소곤 힘겹게 뱉은 말이 고막을 파고든다.


내가 몸을 일으켰을 때 병실 문에 난 유리창 너머로 나를 유심히 지켜보는 간병인과 눈이 마주쳤다.


경계하는 눈빛.


나는 다시 몸을 수그려 어머니 귀에 조용히 속삭였다. 질문 같은 걸 하셨으니 대답이란 걸 돌려드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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