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중입니다_제 때를 잃은 봄

by 정림올제

개나리가 먼저 피고, 며칠 뒤 벚꽃이 피고, 그다음 진달래가 피는 순서가 있었다. 적어도 내 기억 속 봄은 그랬다. 하지만 올해는 다르다. 개나리, 벚꽃, 진달래가 거의 동시에 피어났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아니 누군가 재촉이라도 한 듯, 모두 함께 피어버렸다.

처음엔 예뻤다. 노란 개나리와 분홍빛 벚꽃과 진분홍 진달래가 한꺼번에 피어있는 모습. 색의 향연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화사했다.
사람들은 사진을 찍었고, 나도 사진을 찍었다. "참 예쁘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조금 지나니, 이상했다. 그리고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봄꽃에는 순서가 있었다. 목련이 봄의 소식을 알리기 시작하면 개나리와 매화, 벚꽃이 그 뒤를 이었다. 벚꽃이 지기 시작할 때쯤 진달래가 피어났다. 그 순서를 따라가다 보면 봄이 깊어지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올해는 그 순서가 사라졌다. 모든 꽃이 한꺼번에 피었다. 봄이 깊어지는 걸 느낄 시간도 없이, 봄이 한꺼번에 왔다가 한꺼번에 가버릴 것 같았다.
왜일까. 날씨가 갑자기 따뜻해졌기 때문이다. 봄이 성급하게 찾아왔다. 그리고 꽃들도 성급하게 피어버렸다. 지구 온난화. 기후 변화. 뉴스에서 늘 듣던 단어들이 꽃을 보며 실감이 났다.

그런데 오늘, 산책길에서 천천히 피어나는 꽃을 봤다. 그늘진 곳에 있는 목련이었다. 햇빛이 잘 들지 않는 나무 그늘 아래, 조용히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었다. 다른 곳의 목련은 이미 지고 없는데, 이곳의 목련은 이제 활짝 피어났다.

그 모습이 예뻐 보였다. 아니, 예쁘다는 표현보다는 안심이 된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아, 아직 자기 때에 맞춰 피는 꽃이 있구나. 서두르지 않고, 조급해하지 않고, 자기만의 리듬으로 피어나는 꽃이 있구나.
그늘진 곳은 햇빛이 적게 들어 온도가 낮다. 그래서 꽃이 천천히 핀다. 다른 곳이 성급하게 봄을 맞이하는 동안, 이곳은 여전히 제 때를 지키고 있었다. 기후 변화의 영향을 받지 않은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조금은 버티고 있는 것 같았다.

천천히 피어나는 꽃. 서두르지 않는 꽃. 자기 때를 기다리는 꽃. 빨리빨리 피어나는 것이 좋은 건 아니다. 모든 것이 동시에 피어나는 것이 화려한 것 같지만, 사실 그건 자연스럽지 않다. 봄은 원래 천천히 오는 것이다. 조금씩, 조금씩, 꽃이 피고 지며 계절이 깊어지는 것이다.

그늘진 곳의 꽃을 보며 생각했다. 세상이 아무리 빨라져도, 내 속도를 잃지 않고 싶다고. 모두가 서두르며 달려가도, 나는 내 때를 기다리며 천천히 가고 싶다고.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세상은 점점 빨라지고 있고, 기후도 점점 불안정해지고 있다. 나만 천천히 간다고 해서 세상이 기다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살고 싶다.

이렇게 계속 기후가 변한다면, 몇 년 후의 봄은 어떤 모습일까. 꽃이 피는 순서가 완전히 사라질까. 아니면 어떤 꽃은 아예 피지 못하게 될까. 봄이라는 계절 자체가 흐려질까. 하는 걱정과 함께 그늘진 곳에서 천천히 피어나는 꽃을 보며, 아직 자기 때를 지키는 것들이 있다는 걸 확인했다. 모든 것이 변해도, 어딘가에서는 여전히 제 리듬을 유지하는 것들이 있다. 그것이 작은 위안이 된다.

우리가 기후 변화를 막을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너무 작고, 세상은 너무 크다. 하지만 그래도, 그늘진 곳의 꽃처럼, 나는 내 속도를 지키며 살아가고 싶다. 서두르지 않고, 조급해하지 않고, 내 때를 기다리며.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저항이다.

언젠가는 모든 것이 제 때를 찾아가기를. 봄꽃이 다시 순서대로 피어나기를. 그때까지 나는 그늘진 곳의 꽃처럼, 내 때를 기다리며 살아갈 것이다.

제 때에 피는 꽃이 가장 아름답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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