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중입니다_빌고 또 빌던 것

by 정림올제

우연히 산책길에서 큰 돌탑이 세워진 걸 봤다. 아니, 여기에 저렇게 큰 돌로 누가 저렇게 돌탑을 세웠을까. 한 사람의 힘으로는 들기도 힘들어 보이는 돌들이 서너 개 쌓여 있었다. 무엇을 빌고자 저렇게 애를 썼을까. 어떤 간절함이 저 사람으로 하여금 무거운 돌을 들어 올리게 했을까.


그 돌탑을 보며 문득 생각이 들었다.


여행지에 가거나 어디를 가면 늘 돌탑을 세운 흔적들이 보인다. 어떻게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돌탑을 세울 수가 있었을까 싶은, 중력을 거스르는 듯한 돌탑들. 크고 작은 돌들이 위태롭게 쌓여 있지만,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바람이 불어도, 비가 와도, 그 자리에 서 있다.
그리고 나도 그곳에서 조심스럽게 나의 돌을 하나 얹는다. 내 돌도 무너지지 않기를, 내 소원도 그렇게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며


벚꽃 잎이 떨어지는 걸 잡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봉숭아물을 들인 손톱이 첫눈 올 때까지 지워지지 않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새해 첫날 뜨는 해를 보며 간절히 빌고 또 빈다. 설이 지나고 보름이 되면 달을 바라보며 소원을 빌고 또 빈다.
무언가를 바라고 간절히 원하는 것들을 자연 현상에 맡긴다. 떨어지는 꽃잎, 물든 손톱, 떠오르는 해, 뜬 달. 그것들이 우리의 간절함을 들어줄 거라고 믿는다.


어떤 의미에서 사람들은 그런 믿음을 만들었을까. 무엇을 그렇게 간절히 바라고 이루고 싶었을까.
아마도 내 맘대로,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돌리고 싶어도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다.

아픈 사람이 낫기를 바라지만 내 힘으로는 낫게 할 수 없다.

시험에 합격하고 싶지만 결과는 내 손에 있지 않다. 가

난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세상은 내 노력만으로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연에 빌었다. 사람의 힘으로 이룰 수 없는 것들을 자연의 힘에 맡겼다. 자연이라면, 사람보다 더 큰 존재라면, 어쩌면 내 간절함을 들어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라도 마음을 담고 싶었던 것이다.


그들이 빌고 또 빌던 그 간절함은 얼마나 이루어졌을까.

벚꽃 잎을 잡은 사람의 사랑은 이루어졌을까.

봉숭아물이 지워지지 않은 사람은 원하던 것을 얻었을까.

해를 보며 빌던 사람의 소원은 들어졌을까.
알 수 없다. 어떤 것은 이루어졌을 것이고, 어떤 것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그렇게라도 빌 수 있었다는 것.

간절함을 담을 곳이 있었다는 것.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방법이 있었다는 것.
나도 많은 것을 빌었다. 새해 첫날 해를 보며 빌었고, 보름달을 보며 빌었고, 돌탑에 돌을 얹으며 빌었다. 그중에서 얼마나 이루어졌는가. 많지 않다. 아니, 대부분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희망이 있었다. 어쩌면 이루어질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있었다. 그리고 그 희망과 기대가 나를 버티게 했다. 내일도 살아갈 이유를 만들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애를 써도,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있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버리지 않는 것. 자연에 빈다는 건, 어쩌면 그 둘 사이의 어딘가에 있는 행위다.
나는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바란다. 그래서 나는 빈다. 떨어지는 꽃잎에, 뜨는 해에, 뜬 달에, 쌓아 올린 돌탑에.


이루어질지 안 이루어질지는 모른다. 하지만 빌지 않으면 이루어질 가능성은 아예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빌고 또 빈다. 간절히, 조심스럽게, 때로는 절박하게.


산책길에서 본 그 큰 돌탑. 누군가 무거운 돌을 들어 올려 쌓았다. 무엇을 빌었을까. 건강? 사랑? 성공? 평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간절함만큼은 느껴진다. 저 무거운 돌을 들어 올릴 만큼의 간절함.
나도 언젠가 다시 돌탑 앞에 서면, 조심스럽게 돌을 하나 얹을 것이다. 그리고 빌 것이다. 구체적인 무언가를 빌 수도 있고, 그저 막연한 행복을 빌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그 순간 내가 빌고 있다는 것.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 아직 희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
사람은 빌고 또 빈다. 이루어질지 안 이루어질지 모르지만, 그래도 빈다.

그것이 사람이다. 그것이 살아간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루어질지 모르는 것을 빌며, 그렇게 오늘을 산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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