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은 무겁지만, 마음은 가볍게
모든 활동이 그렇듯이 먼저 복장을 제대로 갖추어야 한다.
한국무용은 무용 슈즈와 발목 기장의 풀치마, 속바지를 기본으로 한다. 티셔츠는 주로 검은색으로 편한 것을 골라 입는다. 마지막으로 단정하게 머리를 묶으면 연습할 준비가 끝난다.
복장 외에도 소고, 부채, 장구, 북 등 배우는 작품에 따라 소품이 필요할 때도 있다. 특히 공연을 준비하면 기본 치마 대신 한복치마를 입어야 해서 가방의 짐이 두 배로 늘어난다. 실제 공연을 할 때처럼 풍성한 한복을 입어야 연습에서 치마 잡는 법이나 모양새를 익힐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의상에 소품까지 하나씩 챙겨 넣다 보면 가방이 한가득이다. 출근하는 가방에다 무용 가방까지 들고 출근하는 날은 평소보다 짐이 많아 대중교통을 타고 다니기 불편하기도 하지만, 퇴근 후 연습복을 들쳐 매고 연습실로 향하는 길은 반가운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듯 종종 설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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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무용을 시작했던 시기는 서른 즈음. 한창 사회생활에 분주하던 시절이다.
한창 의욕도 앞서도 체력도 좋았던 나이라 열정적으로 일했고, 크고 작은 사회생활의 부침들을 겪고 있었다. 이직하고 적응하느라 고생도 하고, 개인적으로는 연애와 이별을 하면서 다이내믹하게 보낸 나의 30대. 지금 돌아보면 언제 다 그런 일이 있었나 싶을 만큼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 와중에 무용은 꾸준히 손을 놓지 않았다.
"무용은 얼마나 오래 하셨어요?"
질문을 받고 생각해 보니, 처음엔 가벼운 마음으로 '삼 개월만 해봐야지' 했던 게 벌써 삼 년을 훌쩍 넘었다. 지금까지 나는 운동과는 큰 연관이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고, 실제로 운동이라면 수영이나 헬스, 요가, 등산 등 여러 가지를 시도해 봤지만 이만큼 오래 한 것도 드물다. 운동은 어렵다는 생각과 땀 흘리는 것을 좋아하는 않는 탓이다. 그나마 무용은 '음악'이라는 재미 요소가 있어서 그런지 자연스럽게 빠져들었고, 우연한 계기에 발견한 운명의 상대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종종 호기심을 갖고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나를 끌어당긴 무용의 매련 무용은 무엇인지 설명해주고 싶었다. 일단 무용은 거칠지 않아서 좋다. (러닝이나 헬스, 격투기처럼 한 번에 에너지를 확 쏟아내야 하는 운동은 내게 버겁고 거칠게 느껴진다.) 요가처럼 깊은 호흡이 필요하고, 바른 자세로 춤을 추려면 적당한 근육도 필요하다. 선생님이 장구를 치면 그 장단에 맞춰 기본이 되는 스텝을 반복하는데, 발 디딤과 턴, 다양한 스텝을 위해서는 특히 하체가 튼튼하게 잡아주어야 해서 웬만한 운동만큼 효과가 있다. 작품을 배울 때는 손끝과 발끝, 시선, 호흡까지 집중하지 않으면 정교하게 따라 하기가 어려워 수업에 집중하다 보면 정신도 어느 순간 또렷해진다. 이렇게 한 껏 집중하는 일이 있다는 게 밋밋한 삶의 활력소가 되었다.
회사에서 어떤 일이 있었더라도, 음악이 시작되면 거기에 집중해야 한다.
거울을 보며 내 동작을 바로잡으며 몇 번 반복하다 보면 어느덧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다. 한겨울에도 땀이 살짝 나는 정도의 강도로 활동하다 보면 오히려 퇴근 후 피곤했던 신체에 활력이 생기고 기운이 솟는다. 하루 내 모니터 앞에 구겨져 있던 몸이었는데 한 시간의 춤으로 '살아있다'는 감각이 깨어난다.
삭막한 사회생활에서 나만의 '딴짓'이 있다는 게 숨통이 트였나 보다.
색다른 성취감, 조금씩 발전하는 모습을 마주할 수 있어서 인간으로서 내가 살아있다는 감각을 즉각 느낄 수 있었다. 물론 무용뿐만이 아닐 것이다. 노래를 부르거나 글 쓰기, 그림 그리기, 악기 연주하기 등 어떤 형태이든 예술 활동은 인간에게 아름다움을 상기시킨다.
가방을 챙기며.
보통은 집에 들어오면 한 없이 게을러진다. 가만히 누워서 움직이기 싫은 저녁 시간, 무용 수업이 아니었으면 그저 누워서 시간을 보냈을 텐데 날 일으켜 세워 나가게 해 줘서 그나마 지금의 체력을 유지할 수 있기도 하다. 비록 바리바리 챙겨야 할 짐은 한 가득이지만 날 끌고 나가준 덕분에 평일의 저녁 시간이 춤추는 즐거움으로 채워졌다. 당장의 돈 벌이는 아니지만 마음 설레게 하는 딴짓이 있다면, 취미생활로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