팟캐스트 도전기
그런 순간이 있다. 대체로 안정적이면서도 지루하게 느껴지는 시간들.
이럴 땐 매일 생각 없이 보던 티브이도 그저 그렇고, 누군가를 만나도 마찬가지다. 친구를 만나도 그때뿐, 뒤돌아서 집으로 가는 길엔 입꼬리가 축 쳐지고 만다. 분위기를 바꿔보려 인기 있는 영화를 봐도 별다른 감흥이 없다. 외부의 자극이 더 이상 내가 충족할 만한 즐거움이 주지 못했다. 왜일까...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이게 '진짜 재미'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만 생각하니 답은 금방 나왔다. 아무리 재밌는 영화나 책이라도 그 안에서 모험을 떠나는 주인공은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왁자지껄 웃음소리 가득한 예능 프로그램 속 영상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사람도, 이국적인 풍경 속에서 새로운 체험을 하며 들떠 있는 사람도 내가 아니었다. 감정은 전염되기에 그들의 표정과 말투와 눈빛을 통해 어느 정도의 느낌은 전달이 되었다. 그렇기에 하루 몇 시간씩 예능프로그램을 보면서 그 웃음에 감염된 듯 같이 웃으며 시간을 보냈던 나였다. 그러다가 한 순간 자각이 든 것일지도 모른다. '진짜 재밌는 거 하고 싶다.'
집에 앉아서 유튜브만 열면 몇 시간이 후딱 지날 만큼 재밌지만 그건 내 것이 아니다. 간접 체험으로 대리 만족하는 것은 실제 경험하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수십 번 영상으로 스카이다이빙을 보았다 한들, 내가 한번 뛰어내리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차이가 날 것이다. 화면 밖으로 벗어나서 작은 것이라도 새로운 일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그때 마침, 인도로 여행을 갈 기회가 생겼다. 불교 성지순례를 테마로 떠나는 패키지여행이었기에 용기를 내서 신청했다. 비행기로 8시간을 날아가 10일 동안 버스를 타고 인도의 동과 서를 가르며 이동하는 스케줄. 유적지를 다니며 여행자로 지내는 동안 인도 여행을 망설이게 했던, 인도에 대한 편견이 무너졌다. 워낙 기대치가 낮았던 탓인지 직접 피부로 느낀 그곳은 개성이 강하긴 했으나 매력이 차고 넘치는 곳이었다. '직접 해보지 않으면 절대 모르는 것들이 있다.'
이전까지 나는 여행에 대한 큰 열망이 없었다. 몇백만 원의 비행기표와 숙박비가 먼저 눈에 들어오곤 했는데, 인도를 계기로 달라졌다. 비교적 단기간에 생각의 영토를 넓힐 수 있는 몇 안 되는 수단이, 넓은 세상을 보고 부딪히는 여행이 아닐까, 싶었기 때문이다.
왠지 배낭을 메고 세계여행을 떠나야 할 것 같았지만, 내가 찾고 싶은 것은 일탈이 아니었다. 지속가능한 재미. 일상을 무너뜨리지 않고 그 안에서 내가 더 단단해질 수 있는 일이어야 한다. 그런 고민 속에서 나의 작은 창작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지금까지 가 봤던 곳 중에 딱 하나만 고르라면 어디예요?"
베스트 한 곳을 고르기 위해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기다렸다. 어림짐작으로는 하와이나 스위스 같은 곳이 떠올랐지만 언니의 대답은 의외로 '인도'였다. 인도? 내가 다녀온 그곳??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라고 생각하고 있던 차, 인도의 히말라야 마을을 꼭 집어 말해주었다. 히말라야 산맥 언저리, 해발 3000M 높이의 라다크에는 영화 '세 얼간이'에 나온 판공초 호수를 비롯하여 북인도의 대자연을 볼 수 있는 곳이란다. 고도가 높아 고산병에 시달릴 수 있고, 일 년에 두 달 남짓 눈이 녹아야만 비행기를 타고 갈 수 있는 험한 곳이지만, 그곳에서 보낸 휴식이 그 어느 곳보다 좋았다고 했다. 5월 북촌의 한 카페에 앉아 그 시간을 회상하는 언니의 표정과 눈빛에서, 내가 가본 적 없는 히말라야의 청량하고 맑은 바람이 불어오는 듯했다.
"언니, 우리 지금 한 얘기를 녹음해 봐요"
여행지 상담을 하다가 뜬금없지만 우리의 대화로 팟캐스트를 해 보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보통 해외여행은 일 년에 한, 두 번 정도인 연례행사다. 나 같은 직장인은 시간 내기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한정된 휴가를 쪼개서 쓰는 만큼 최대한 정보를 파악하는 것이 필수. 그러던 차에 가까이 있던 세계 여행자의 경험이 너무도 소중했다. 글이 아니라 목소리로, 책에서 얻을 수 없는 여행정보를 주는 채널이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에 녹음 스튜디오를 예약해 녹음을 시작했다. 한 명의 사회자로 질문을 던지고, 한 명은 해설자처럼 대화를 하는 방식이라 짧은 대본이면 충분했다.
첫 녹음본은 쓸 수 없었지만, 다시 녹음한 버전으로 에피소드 1화를 업로드. 공식 채널에서 클릭을 하니 정말 우리의 목소리가 라디오처럼 흘러나왔다. 투박하고 날것에 가까운 우리의 팟캐스트. 아무도 없는 스튜디오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끝나고 나올 땐 어찌나 재밌던지! 채널은 두 사람이 모두 좋아하는 '여행'과 '책'을 주제로 소소한 정보와 감상을 나누며 몇 년간 열심히 만들어 업로드를 했다.
우리가 만든 팟캐스트는 어설펐지만, 채널을 운영하며 배운 것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인가 하는 것이다. 내 생각으로 대본을 만들고, 대본대로 이야기를 끌어가고, 편집을 해서 결과물을 만드는 일련의 과정이 좋았다. 또 한 가지는 서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연결되어 누군가 우리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도 신기하고 신이 났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메시지가 있다. 그것을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있는 형태로 바꾸는 모든 것이 창작이었다. 생각으로 결과물을 만드는 창작 활동이 지금까지 내가 찾아낸 '지속가능한 재미'이다. 창작이 별 건가. 내 생각을 한 줄이라도 끄집어내어 쓰는 것이면 충분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콘텐츠를 구상하고 만드는 일이 재밌기도 했고, 내 목소리를 인정해 주는 것 같아 마음도 편했다.
무엇이 내 마음을 충족하는지 알 때 편해진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지루해 보일 수 있는 일이 나에겐 더없이 적합한 일이 되기도 한다. 여유 시간이 생기면 누군가는 헬스장으로, 누군가는 야구장으로, 또 누군가는 도서관으로 갈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재미라는 센서는 꽤 쓸만하다. 나에게 무엇이 의미 있는지를 알려주는 신호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