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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별 Dec 18. 2023

계모와 살고 있습니다.

 엄마가 떠나고 3년 후, 아빠가 재혼을 했다. 왜 이렇게 서둘러 재혼을 했나 싶겠지만 3개월 전 나도 가정을 꾸렸고, 아빠와 남동생 둘만 지내기 힘들 것 같다는 주변 분들의 우려의 말들이 쏟아졌다.내 눈에도 아빠는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심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약해지고 있었다. 나와 동생은 아직 엄마의 자리를 누군가에게 넘겨주고 싶지 않았지만 아빠만 본다면 차마 나의 욕심만을 차릴 수는 없었다. 교회 목사님의 소개였다. 금요 예배 때마다 맨 앞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리시는 모습을 여러 번 봤던 그분. 아, 신앙이 좋은 분이구나, 목사님이 소개해 주신 분이니 좋은 분이시겠거니 생각했다. 무엇보다 나는 목회지가 생기면 어느 때고 떠날 수밖에 없는지라 약해져 가는 아빠 옆에 누군가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했었다. 물론 내 마음속 엄마의 빈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게 모든 것이 순조로운 듯 보였다. 새 가정을 이룬 아빠 역시 전보다 활기가 생겼고, 남자 혼자 밥 해 먹고, 집안 단도리 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구나, 나이가 들수록 옆에 의지할 사람이 필요하구나 라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는 시간들이었다. (아마 엄마가 혼자 남겨졌더라면 좀 달랐을 것 같기는 하다) 나와 동생은 이미 20대 중반을 넘긴 나이인지라 두 분께 큰 짐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난 이미 출가한 상태라 친정에 가는 날이 손에 꼽을 정도였고 동생도 집에서 잠만 자는 생활을 하고 있던 터라 두 분의 시간을 뺏는 일이 거의 없었으니까. 문제는 나의 임신이었다.      




시댁에서 시어머니와 사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그때 우린 아주버님 가정과 우리 부부까지, 넓지도 않은 집에 세 가정이 모여 산다는 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맞벌이하시는 아주버님의 금쪽같은 첫아이는 베이비시터의 도움을 받았지만 그분의 근무시간보다 늦게 퇴근하시는 날이면 그 금쪽이의 육아는 나에게까지 돌아오게 되었다.(믿는 구석이 있어서인지 점점 퇴근시간이 늦어졌던 기억이 난다) 워낙 아이를 예뻐하는 나인지라 어렵지 않게 조카를 돌볼 수 있었지만 나의 임신과 함께 그 모든 것들이 스트레스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시어머니는 뱃속에 있는 태아보다 활개치고 돌아다니는 첫 손주가 더 우선이었고, 착한 남편은 내 눈치와 시어머니 눈치를 보며 작은 아빠 노릇을 해내느라 진땀 빼는 날이 많았다.



임신과 동시에 나의 기간제 자리는 날아가버렸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친정에 가서 일주일만 편히 쉬다 오고 싶은 마음에 친정으로 향했다. 그땐 몰랐다. 그런 허락을 아빠가 아니라 새어머니께 받아야 한다는 것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마음 편하게 쉬고 싶었을 뿐이었다. 복작복작했던 집에서 벗어나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곳에 하루 종일 누워 책에 파묻혀 지내고 싶었다. 내가 먹고 싶은 음식도 아주버님 아이의 눈치 때문에 방에 몰래 숨어서 먹었던 곳, 아침 식사는 반드시 온 가족이 함께 먹어야 한다는 어머님의 명령에 따라 오전 7시면 꼭 식탁에 둘러앉아야 하는, ‘입덧’이라는 핑계는 씨알도 안 먹히는 곳으로부터 잠시나마 도망가고 싶었을 뿐이었다. 아빠는 임신한 딸이 집에 와서 며칠 지내도 되겠냐 묻는 말에 뭘 그런 걸 묻냐며 두 팔 벌려 환영해 주었지만 새어머니의 반응은 냉랭했다.

퇴근하고 돌아온 아빠는 나의 먹거리. 잠자리를 챙기느라 여념이 없었고 그럴수록 나는 새어머니의 눈치만 보게 됐다. 남들에게는 비빌언덕이라는 친정이 나에게는 없다는 것을 그때 제대로 알아차렸어야 했다.      


출처: pixabay

주말 아침. 아빠는 약속이 있어 나가시고, 동생과 새어머니와 함께 아침을 먹는 자리였다.  새어머니 눈치를 보며 밥을 먹는데 훅 들어온 한마디.

“니 아빠는 너라면 꼼짝을 못 해. 니 아빠가 너를 이렇게 싸고도는데, 내가 널 예뻐할 수 있겠니?”

눈물을 흘리지 않고 식사를 마치는 게 그 자리의 나의 미션이었고, 목이 막혀 넘어가지 않는 밥을 꾸역꾸역 삼키는 내 모습이 너무 량 맞았다. 이런 말을 들으려고 온 게 아니었는데...     

임신 소식에 곱지 않는 눈빛을 보냈던 시어머니를 보는 게 힘들었고, 금쪽같은 조카의 육아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고 싶었고, 내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진심 어린 축하와 축복해 주는 말을 듣고 싶어 찾아간 친정이었다. 시댁살이에 힘들었을 내가 발 뻗고 편하게 쉬고 싶어 찾아간 곳이었고 아빠에게만큼이라도 힘들다 어리광 부리고 싶었고 챙김 받고 싶어 찾아간 곳이었다.

시댁에서도 눈칫밥은 안 먹으면서 지냈는데, 친정에서 매끼마다 먹을 줄이야.     



일주일 동안 지낼 짐을 바리바리 싸왔던 나는 삼일 만에 시댁으로 돌아갔고, 시어머니와 아주버님 얼굴 보는 게 너무 창피했다. 소박맞고 돌아온 여인은 이런 마음이었을까. 말은 안 했지만  나를 바라보는 형님의 짠한 눈빛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새어머니는 자식이 있으나 없는 듯한, 신혼 같은 생활을 하고 싶으셨던 걸까? 두 분이 편하게 지내시다 나 때문에 방해받았다는 생각을 하셨던 걸까. 내 입장에선 고작 일주일이었지만 새어머니 입장에선 억만금과 같은 시간이었을까.     

 새어머니의 비수 같은 저 한마디는 시작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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