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벽별 Jan 11. 2024

내 숨 쉴 구멍은 내가 알아서 찾을게요.

“언니, 이번 명절 때 어머님이 새벽에 오지 말고 그냥 식사 시간 맞춰서 오라시는데, 어떡하죠?”

아, 또 시작이다. 명절만 되면 네버엔딩으로 반복되는 이 불편한 대화 내용.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만드는,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그 굴레에 또 걸려버렸다.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일 년 중 부모님을 뵈러 가는 날은 딱 세 번이다. 설날, 추석, 부모님 생신.(다행히 두 분 모두 같은 달에 생일이 있어서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다)

두 분 생신 식사 준비, 용돈 준비 등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것들은 내 손에 달려있다. 따라서 

그때는 눈치 보지 않고 개선장군 마냥 당당하고 꼿꼿한 자세를 유지할 수 있다. 나의 계획대로 잘 따라오시기만 하면 맛있는 식사는 기본에 십 원 한 장 쓰지 않으시고 오히려 (두둑까지는 아니지만) 주머니를 채워 가실 수 있으시니까. 하지만 명절은 다르다. 모든 주도권은 집주인인 새어머니께 있기에 그분의 기분을 살펴야 하고, 눈치껏 행동해야 한다.     



명절마다 대장님과 여왕님의 의견이 달라 그 사이에서 새우등이 터지는 건 딸이라 부르지만 큰며느리라 쓰는 나와 진짜 며느리인 올케다. 넓은 집은 아니지만 명절 전날 온 가족이 모여 함께 시간을 보내다 하룻밤 자고 다음날 둘러앉아 식사를 하고 싶은 게 대장의 마음. 가족들이 다 모이면 들고뛰는 우리 아이들이 성가시고 가족의 식사를 챙기기가 마냥 힘든 게 대장 위에 군림하는 여왕님의 마음. 그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여왕님의 눈치를 보는 일이 반복되다 보니 이내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아니, 결혼하신 지 10년이 넘어가는데 언제까지 이렇게 불편한 관계로 지내야 한단 말인가.     


“언니, 명절 때 어머님이 밥 할 때 오지 말래요. 제가 이것저것 물어보는 게 귀찮다고 하시네요.”

아니, 가만히 앉아 얻어먹고만 간다는 것도 아니고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살림에 익숙하지 않은 며느리가, 음식 준비 돕겠다고 시어머니 마음에 맞게 음식하고 싶어 이것저것 물어보는 게 귀찮을 일인가. 오히려 기특하게 여겨야 하는 게 아닌가. 도통 그 머릿속의 생각을 알 수가 없다.      

할아버지 집에 가는 걸 기대하고 기다리는 우리 아이들. 할아버지와 레슬링을 할 때도, 할아버지와 공놀이를 할 때도 정신없으니 그만하라고, 밑에 집에서 올라온다며 쓴소리를 날리시곤 본인 방으로 휙 들어가시는 새어머니의 눈치를 열심히 살펴야 했고 그런 외할머니의 심기 불편함을 아이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마음을 졸여야 했다. (아직 할머니의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 눈치 없는 아이들이 이렇게 대견할 줄이야.)     

이런 생활을 몇 년 하다 보니 이제 될 대로 되라는 식이 되어버린다. 친정집에 들어서면 반갑게 인사해 주는 아빠와는 달리 인사만 틱 날리시곤 방으로 들어가는 새어머니의 뒷모습은 이제 예상이 된다. 우리가 도착하고 몇 분 있다 들어가시나 시간을 재고 있는 나를 발견하는 순간 풉 하는 실소를 금치 않을 수 없었다. 아이들의 변화된 모습을 관찰하고 이야기해 주시는 아빠와는 달리 부족한 부분 숨은 그림 찾기 하듯 찾아 말씀하시는 것도 이제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긴다.(가장 많이 타깃이 되는 건 나와 닮은 구석이 많은 딸이다.)



밥을 먹고 난 뒤 항상 다과를 내주시는데, 그때도 과일만 깎아 주시고는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러 또 들어가신다. 아이들을 시켜 과일 한 조각 들려 보내면 그제야 잠깐 얼굴을 비치시는 몸값이 아주 비싼 새어머니. 

네, 우리 서로 각자 알아서 시간 보내자고요. 저는 저대로 신경 끄고 제 할 일이나 하렵니다.     



명절 음식하는 데 힘들어하시는 장모님을 보고 남편은 저녁은 배달음식을 시켜 먹는 것으로 암묵적인 룰을 만들었다. 동생가족, 우리 가족, 부모님 이렇게 세 팀으로 나눠서 윷놀이를 한 뒤 꼴등은 밥값을, 2등은 커피값을 내는 걸로. 아이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시간이 되었고, 1등을 하기 위해 온 맘과 정성을 다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는 것이 명절의 또 다른 재미가 되었다.     


“장모님, 이번에도 저녁 내기 윷놀이 한 판 하시죠.(싱글벙글)”

“됐네, 난 안 해. 내가 그냥 밥 살 테니까 윷놀이 그거 하지 마.”

하여튼 뭔 일을 하던 초 치는데 뭐 있으시다. 그러면서 윷은 얼마나 잘 던지시는지 항상 1등은 따 놓은 당상이다.


추석 당일, 후다닥 저녁을 시켜 먹고 동생 가족과 우리는 서둘러 집에서 나온다. 비밀 작전을 수행하듯 접선할 장소를 정하고, 들키지 않기 위해 아이들에게는 비밀로 한 채로. 짧은 만남에 아쉬워하며 배웅해 주는 대장님 모습이 너무 짠해 순간 우리의 작전명을 밝힐 뻔하는 위기를 이번에도 잘 넘겼다.     



아빠, 아빠에겐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지 뭐. 우리도 숨 쉴 구멍은 있어야 하잖아. 이제 더 이상 아빠 속상하게 하지 않고 우리끼리 잘 풀어볼게요. 몇 번 해봤더니 이 방법도 괜찮네.

작가의 이전글 따끈따근한 추억이 배송되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