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닿는 소중한 만남
아침 7시. 알람이 울린다. 평소 같으면 10분만 더, 5분만 더를 외치며 이불속에서 미적거리고 있다가 더 이상 미루면 안 되는 순간까지 버티다 따뜻한 동굴을 빠져나오기 일쑤였으나 오늘만큼은 알람소리 듣자마자 벌떡 일어나 이불을 박차고 나온다.
남편과 첫 데이트를 할 때도 이렇게 설레었던가, 이렇게 기다려지고 두근거렸던가. 20년이 넘어 기억도 나질 않는다. 드라마 ‘눈물의 여왕’에서 그랬다. 남편을 보고 설레고 떨리면 병원에 가봐야 한다고. 설렘이 뭔지, 떨림이 뭔지 근 20년 만에 느껴볼 수 있게 해 주는 오늘의 만남.
날씨도 뭘 아는지 화창한 하늘은 오늘의 이 만남에 행복한 미소 한 스푼을 추가해 준다.
아침 8시. 가볍다 못해 무중력상태로 걷는 듯한 걸음으로 집을 나선다.
몇 달 전부터 예정되어 있던 이 만남. 바로 함께 글 쓰는 동기작가님들을 만나는 날이다. 날짜가 정해지자마자 남편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가야 한다고, 거듭 말해 놓았다. 하지만 기차표를 예매하면서까지도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수 십, 수백 번 고민을 하긴 했다.
단톡방에서 활발히 활동하지도 않았고, 말주변이 없어 그들의 유쾌한 대화에 끼지도 못했고, 이것저것 해 보겠다고 발 담그고 있는 건 참 많은데 제대로 하고 있는 건 없고.
“오빠. 여기 작가님들 엄청 대단한 분들 많다. 대학교수, 중고등학교 선생님. 초등학교 선생님까지. 대치동에서 영어 가르치는 분도 있고, 영어를 무슨 모국어 말하듯 사용하는 분들도 있고, 전문직은 물론이고 이미 책 출간한 분들도 있고, 내 주변에 유학 다녀온 사람은 손에 꼽는데 여기는 유학하신 분들만 다 모아놓은 것 같아. 글은 썼다 하면 죄다 다음 메인에 걸리고. 내가 너무 작아 보여서 자꾸 기가 죽어.”
“다르게 생각해 봐. 그렇게 대단한 사람들이랑 당신은 글쓰기 시작이라는 출발선에 함께 서 있잖아. 대단한 분들이랑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는 거야. 기죽을 필요 없어”
아내의 기를 살려주기 위한 남편의 말이 고맙긴 했지만 사실 크게 위로가 되진 않았다. 나는 항상 부족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갇혀 지내길 수십 년. 잘하는 거 하나 없고 남보다 뛰어난 재주 하나 지닌 것 없는 나라는 사람이 감히 그들 사이에 끼어 있어도 되나 싶은 마음에 덜컹이는 기차를 따라 내 마음까지 요동친다.
약속된 시간보다 일찍 도착은 했는데, 이제 어찌해야 하나 천만번 고민을 했다. 거진 처음 보다시피 하는 분들인 데다, 단톡방에서도 몇 마디 나누지 않아서 나의 존재에 대해 잘 모르시는 분들이 대부분일 텐데, 꿔다 놓은 보릿자루 마냥 눈만 꿈벅이다 오면 어쩌지. 일찍 도착한 분들이 모이기로 했다는 스타벅스 앞에 도착했지만 쉬 들어갈 수가 없었다. 서성이길 수분 후. 에라, 모르겠다 하는 마음으로 일단 들어갔고 걱정과는 달리 따뜻한 미소로 맞아주시는 작가님이 계셨다. 한 분 한 분 오실 때마다 환한 웃음을 지어주셨고 늘 따뜻한 말을 해 주셨던 작가님은 어느새 나의 장 건강까지 챙겨주고 계셨다. 긴장했던 마음이 조금씩 녹아내렸다. 하지만 이내 친분이 쌓인 그들 사이에 온전히 끼지 못해 지금이라도 그냥 도망갈까, 어차피 사라져도 아무도 모를 테니 조용히 빠져나갈까 고민하는 사이 도착한 약속장소. 이젠 도망갈 길마저 사라졌다.
궁금했던 분들께 먼저 다가가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그걸 쉽게 하면 내가 아니지. 말주변이 없어 말을 재미있게 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성격 자체가 유쾌한 성격도 아니고. 그러고 보니 작년 첫 만남 때도 그냥 조용히 있다 나온 기억이 같은 장소에 도착하니 스멀스멀 올라온다. 아침도 안 먹고 와서 배고픈데 김밥 한 줄만 가지고 튈까 하는 순간. 따뜻한 미소로 말을 걸어주신 내 옆자리의 작가님. 그 작가님 말 한마디가 내 가슴을 틀어막고 있었던 어색함이라는 감정 덩어리를 토해내 버릴 수 있는 하임리히법이 되어주었음을 이제와 밝힌다. 쭈그리처럼 있다 올 뻔한 나에게 먼저 눈인사해주시고 다가와 따뜻한 말을 건네주신 그녀들에게 엎드려 절이라도 하고 싶었음 역시 함께 고백해 본다.
장장 5시간이나 함께 했고, 저녁까지 함께 먹으며 시간을 보냈지만 아직도 뭔가 조심스러운, 행여 내가 실수라도 했으면 어쩌나, 말은 제대로 했나, 어리석은 대답을 하지는 않았나 다른 사람에게 본이 되지 않는 행동을 했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서 자유로워지지는 않았다. 그런데 왜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사모하고, 그렇게도 만나기를 소망했을까.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을수록 인간관계가 참 어렵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냥 다 좋았던 순수했던 학창 시절의 친구같은 사람들을 이제는 만나기가 참 힘들다. 이것저것 재고 따지고, 나에게 조금이라도 해가 된다면 거리를 두고 이해관계를 따지는 인간관계에 조금은 지쳐있었나 보다. 하지만 그녀들은 다르다. 진심 어린 마음으로 서로 축하해 주고 공감해 주고 내 일처럼 아파해주는 관계. 이 모임을 위해 며칠부터 30명이 넘는 사람들을 위해 손수 식혜를 만들어 오고 새벽을 깨우며 그린 책갈피를 준비하고, 직접 뜬 티코스터를 준비해 온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금전적인 이익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잠을 자지 못해 힘들어하는 동기들을 생각하며 건강한 약을 준비해 오고, 함께 하는 사람들의 입이 심심하지 않도록 마트를 몇 차례 왔다 갔다 하는 수고를 마다치 않는다.
조건 없이, 대가 없이 베풀고 나누고자 하는 그들의 마음에 스며들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녀들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나까지 좋은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밤 11시. 다시 나의 삶의 자리로 돌아온다. 하루가 마치 꿈인 것마냥, 모든 것이 내 손에서 스르륵 빠져나간 것 같지만 마음에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는 걸로 꿈이 아니었음을 되뇌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