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지도 않는 다이어리를 계속 사는 사람

by 쭈야씨



1.

우연을 가장해 또 한 권을 집어든다

이미 열두 권이 집에 있다는 걸 정확히 기억하면서 첫 장을 펼쳐본다

1월 1일이라고 쓰여진 날짜 혹은 텅 빈 월요일 아직 시작되지 않은 시간들



2.

깨끗한 종이는 미래형 동사만 아는 언어

'쓸 것이다' '기록할 것이다' '내일의 나는 다를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가방 속 다이어리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날들처럼 묵직하다



3.

서랍을 연다

작년에 산 민트색 양장본, 재작년의 가죽 커버, 그 전 해의 모나미 볼펜과 함께 산 검은 수첩

모두 첫 페이지를 채웠거나 뜯었거나 혹은 1월 3일까지만 채워진 채 겹겹이 쌓여있다

- 1월 3일, 모든 결심이 죽는 날



4.

빈 다이어리에는

언젠가 피어날 기록되지 않은 삶들

써지지 않은 고백들

그려지지 않은 날씨들



5.

오늘도 나는 '언젠가'라는 이름의 가게에서 '아직'이라는 제목의 다이어리를 산다

빈 공간을 수집하는 사람 가능성의 도서관을 짓는 사람

집에 돌아와 새 다이어리를 다른 다이어리들 옆에 나란히 꽂는다

포장지도 뜯지 않은 채

그것이 가장 완벽한 일기다

쓰는 순간 망가질 오늘의 기록




화,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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