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폭포

안녕 나의 십대

by 해적왕꿈나무


지난 겨울에 이어 이번 여름에도 히사이시 조 연주회에 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 ‘인생의 회전목마’는 마지막 순서에 있다. 제목과 꼭 맞는 선율이 흐르기 시작하면 나는 이미 턱 끝에 닿아버린 눈물을 닦았다. 아련한 연주를 배경음악 삼아 재생된 오래된 기억이 영화처럼 스쳐 지나가면, 나의 짧고도 길었던 삶이 회전목마라기보다는 폭포였음을 깨닫는다. 나이아가라와 같은 웅장하고 아름다운 폭포는 못 되었고 누구도 찾지 않는 산골짜기의 어둡고 축축한, 초라할 정도로 작은 폭포…….


다섯 살, 도시에서 살게 되었다. 맞벌이셨던 부모님이 시골 할머니 댁에 맡겨두었던 오빠와 나를 드디어 데려오기로 하셨다. 유치원이라는 곳에서 나는 내 또래의 아이들을 처음 만났다. 가족들, 친척들, 그리고 시골의 마을회관 할머니들 외의 사람과 접점을 가져본 적 없던 나는 내가 남들과 생각보다 많이 다름을 알게 되었다. 적의 어린 눈빛이 낯설었다. 애써 외면하며 행복하게 지내려고 애썼다. 그러면 괜찮아질 줄 알았던 거 같다. 하지만 새침한 도시 여자아이들은 아직 ‘다르다’와 ‘틀리다’를 오래도록 구분하지 못했다. 아이들이 나를 구석에 가둬놓고 이십 대가 되어서도 비수로 날아오는 그 모든 단어를 퍼부을 때에서야 나는 눈물을 보였다. 창피했고, 엄마에게 미안했다. 나의 작은 수호천사였던 오빠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한 살 터울의 잘생긴 내 오빠는 든든하게 날 지켜주었지만, 오빠가 슬퍼하는 건 싫었다. 낡은 삼류소설 같은 기억 속에서 나는 누구와도 함께 있지 않았다. 작은 시야는 걷히지 않는 안개가 낀 듯 흐렸다. 시월이 생일인 아이들을 모아두고 생일잔치를 할 때, 내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야 할 타이밍에 아이들은 노래 가사를 개사해서 불렀다. “예쁜”이 “못난”으로 바뀐 거, 그게 다였다. 그때 나는 어땠더라. 생크림 케이크가 아니어서 창피하다고 생각했던 엄마가 보내준 떡 케이크를 방패 삼아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던가?


“너는 아토피가 아니야. 오빠 등에 있는 파란 점처럼, 너도 그냥 점이 있는 거야.”

“오빠는 남자라 파랗고 나는 여자라 빨간 거야?”

엄마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쓰게 웃으셨다. 정말로 궁금했던 건 입 밖으로 내지도 못하게 하는 처연한 미소였다.

‘근데 왜 오빠는 등이고 나는 얼굴이야? 왜 오빠 건 사라지는데 내 건 더 커져?’

사랑해 마지않는 동그란 얼굴이 슬픔으로 일그러질까 두려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꼬마의 마음을, 엄마도 아셨을까.


열한 살, 좀 더 나은 학군으로 가자는 부모님 말씀에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는 감정을 숨기는 게 익숙한 아이로 자라 있었다. 누군가 못살게 굴면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때 나는 그게 쿨한 줄 알았다. 속이 썩어 문드러진 채로 1등 성적표를 부모님께 보여드리며 두 분의 웃는 얼굴을 보는 게 낙이었다. 새 학교 첫날에는 심장이 너무 아프게 뛰어서 새 짝꿍에게 들릴 것 같았다. 들키기 싫은데,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걸 들킬 것 같았다. 동물원 원숭이 보듯이 맨 뒷자리에 앉은 나를 반 아이들 모두가 허리와 목을 있는 대로 꺾어서 쳐다보니 왼쪽 얼굴을 새빨갛게 뒤덮은 화염상모반이 뜨겁게 번져 온 얼굴에 다 퍼진 것만 같았다. 어렸던 나에게 어렸던 친구들이 무심코 던지는 시선 하나, 말 하나가 나를 천천히 무너져 내리게 했다. 이따금 노골적인 적의를 마주할 때면 질식할 것 같았다.


“나 너 처음 봤을 때 장애인인 줄 알았어.”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도, 이것저것 캐묻는 것도, 이모저모 챙겨주려고 하는 것도 다 싫었다. 너에겐 관심 없다는 듯 아예 쳐다도 보지 않거나 무표정하게 소 닭 보듯 바라봐 주는 사람이 제일 편하고 좋았다.

열여섯 살, 그 아이와 그 친구를 만났다. 엄마가 익숙한 미소를 띠고 나를 보며 아빠가 내 사춘기를 걱정하고 있더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나는 익숙하게 말을 삼켰다.


‘반찬이 하나도 없는데 반찬 투정을 할 리가요.’


부모님이라 해도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건가 보다, 했다. 두 분을 원망할 생각은 없었다. 생일 케이크를 제대로 먹어 본 적은 없어도 그보다 몇십 배는 비싼 내 수술비는 한 번도 아끼지 않으셨던 분들이다. 애초에 부모님의 잘못도 아니었거니와 설령 부모님 탓이었다 해도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단 하나도 없었다. 부모님도, 나도 그냥 재수가 없었던 거다. 질풍노도 소녀의 머릿속에는 스스로를 좀먹는 생각만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자존감 높은 친구들을 보면 번쩍번쩍 후광이 보이는 것 같았다. 부럽다 못해 미운 아이도 있었다. 그 아이는 잘못한 게 하나도 없었는데. 함께 선도부 활동을 했던 그 아이는 정말 예쁘고 밝았다. 가족관계도 화목하고 운동을 꾸준히 해서 몸매도 예뻤다. 완벽한 우등생이었던 오빠가 게임에 재미를 느끼게 되면서 오빠의 고등학교 진학이 부모님 맘대로 되지 않자 집안 분위기는 살얼음판이 되어 있었다. 학교에 있으면 집에 가고 싶었고, 집에 있으면 집을 나가고 싶었다. 현관 비밀번호 누르기를 망설이는 내가 싫었다. 늘 화가 나 있는 아빠, 동조하는 엄마, 반항하는 오빠. 세 사람의 싸움에 나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나 하나의 문제로도 이미 버거웠던 나는 한계까지 몰려 있었다. 숨기기 하나만큼은 타고나 아무도 모르게 절벽에 다다랐다. 바닥을 기고 있던 나를 지하로 처박았던 건, 그 아이와 내가 금요일마다 등교하는 학생들의 복장을 하나하나 검열할 때 우리 둘을 쳐다보는 전교생의 시선이었다. 그 아이는 학교 익명 게시판에 ‘금요일 선도부 ○○○ 예뻐요.’라는 글을 보고도 그저 살짝 웃고 넘겼다. 나라면 감격해서 철퍽 엎어져 꼴사나운 눈물을 흘렸을 텐데. 전교생이 우리를 보고 지나가는 한 시간 반 동안 나는 오물을 뒤집어쓰고 무도회에 입장한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도 몰랐다. 오빠라도 있었으면 나았을까. 얄궂게도 하필이면 가족 모두가 나를 돌아볼 여유가 없던 때였다. 그 와중에 나까지 공부를 손 놓아 버리면 우리 가족이 정말로 풍비박산 날 것 같아서 잠을 아껴가며 공부했다. 원인을 알 수 없이 많이 아팠던 날 부모님이 병원비를 아끼려는 게 보였을 때는 모든 걸 다 털어놓고 가벼워지고 싶었다. 나는 왜 가난도 견뎌야 하는 건지, 모든 게 다 억울했다. 새삼스럽게. 하지만 ‘나까지 이러면 안 돼.’가 또 이겼다. 가족마저 없으면 난 정말 혼자였다. 이미 사무치게 외로웠다.


내가 다녔던 중학교에서 졸업을 앞둔 삼학년 학생들의 남녀 합동 공연은 암묵적인 전통이었다. 모범생이라는 이유로 선도부에 학생회 임원까지 해야 했던 나는 또 필참이나 마찬가지였고, 싫다는 말을 거의 해본 적이 없던 나는 그까짓 것 얼른 해치우고 학업에 집중하고 싶었다. 그 친구는 공연 준비팀에서 만났다. 준수한 외모에 밝은 성격이었던 그 친구는 내가 부담을 느끼지 않게끔 천천히 다가와 주었다. 나도 그 친구가 좋았다. 친구로도, 이성으로도. 학교 밖에서 둘만의 시간을 보내다가 친구를 만났을 때 우린 당황하지 않았다.


“어, 뭐야! 둘이 사귀어?!”


깜짝 놀라서 동네가 떠나가도록 소리 지르는 친구의 모습에도 우리는 그저 미소 지었다. 그때 내가 나를 수치스러워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아직도 놀랍다. 만난 지 며칠이나 되었느냐는 질문에는 조금 당황했다. 모든 게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서 정확히 언제부터 사귄다는 그런 개념이 우리에겐 없었다. 별로 개의치 않았는데, 그 친구는 썩 미안해하며 그날 밤 자신이 지금 말할 테니 오늘부터 우리 1일을 하자고 퍽 호기롭게 말했다. 나는 숨기기를 잘했고, 숨기는 걸 알아보기도 잘했다. 수줍어하는 깨끗한 얼굴이 예뻐서 하얀 손을 마주 잡고 하나, 둘, 셋 하면 같이 말하자고 했다. 빨개진 얼굴까지는 나도 어떻게 갈무리하지 못했으나 놀이터의 어둑한 배경이 십육 년 묵은 용기를 끄집어내 주었다.


“하나, 둘, 셋.”


“사귀자.”

“사귀자.”


첫사랑이었다. 바스러져 가는 내 세상을 일으켜준 단 하나의 버팀목이었다. 하지만 나는 공부를 놓을 수 없는 아이였다. 이것마저 버리면 마이너스로 태어난 내가 영점에도 도달하지 못할 거라며 공부에 집착했다. 공부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그 친구를 놓아버렸다. 내 손으로 놓아버렸고, 우는 얼굴을 외면했다. 하지만 나는 고등학교, 재수, 삼수 내내 네 이름을 불렀다. 염치없게도.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 유수처럼 흘렀으나 내 기억은 회전목마를 타고 그해 겨울로 돌아갔다. 입시가 끝나고 연락이 닿았을 때, 너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반갑게 인사했다.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고, 응원해 주었다. 나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고마웠다는 말을 전했다. 그때의 나를 좋아해 주어서 고마웠다고, 아주 담백하게.


있잖아, 사실 더 많은 말을 하고 싶었어. 고마웠어. 정말로 고마워. 너를 만나고 하잘것없는 나도 사랑받을 수 있다는 걸 알았어. 너를 만났던 그때, 너 하나만이 나를 보듬어주었어. 시험하듯이 굴었던 거, 정말 미안해.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너를 보면서 나도 조금씩 마음을 열 수 있었어. 무도회에 근사한 드레스를 입고 깨끗한 얼굴로 너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들어선 것 같았어. 근데 멋진 꿈을 깨어보니 현실이 더 비참하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더라. 너와 난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어. 네가 나를 아끼는 걸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어. 너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 다 내 핑계였고 허울 좋은 말일뿐이었어. 내가 나를 싫어해서 그랬던 거야. 제발, 나 같은 거한테 사과하지 말아, 환아.


열아홉 살, 대학에 낙방했고 좌절했다. 모든 걸 포기하고 이 하나에만 매달렸는데, 이래도 되는 건가. 얼굴 수술도 미뤄가며 내 모든 걸 쏟아부었는데. 몇 년째 나아지지 않던 우리 집 분위기는 오빠가 스무 살이 되자마자 군대로 떠나버리면서 휴전 상태였으나, 나로 인해 다시 살얼음판이 되었다. 내가 그렇게 만신창이였는데도. 싫다고 말해야 할 때마다 벙어리처럼 말을 못 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그럴 만하니 그런 거라고 체념하고, 가족들 눈치를 보며 성적에 집착하다가 사람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는 병신이 되어 있었다. 누군가 내게 일말의 관심을 가진다는 사실이 미치도록 무서웠다. 다 쓰러져 가는 지경에야 시골에서 도시로 온 뒤 처음으로 여유를 느낄 수 있었다. 장장 팔 년을 맴돌았던 학원가를 그냥 지나가는 게 영 어색했다. 언제부터 뿌리내렸는지 모를 뜀박질하듯 걷는 버릇이 불필요했다. 기이한 여유였다. 뭘 하고 쉬어야 할지 몰라 인터넷에 검색해 봤다. 해보지 못한 것을 해보라는 조언을 보고 처음으로 만화방에 가봤다. 노래방에서는 좋아하는 노래들을 모두 다 부르고 나왔다. 부모님은 내가 어지간히 답답했는지 이제 어떻게 할 거냐고 따지듯 물으셨다. 원망스러웠다. 모든 버팀이 허무해졌고, 그 원인을 다 두 분에게 떠넘기고 있었다.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다. 아니면 견딜 수 없었을 거다. 가족의 기역 자도 꼴 보기가 싫어서 재수생의 감옥이라 불리는 기숙 학원으로 내 발로 떠나버렸다. 기숙 학원으로 갈 수 있었던 건 정말 불행 중 다행이었다. 고등학교 입학 즈음부터 형편이 조금씩 나아져서 감당할 만한 학원을 고를 수 있었다. 사람이 싫어서 졸업식도 불참하고 혼자 기차에 올랐다. 옷을 아무리 껴입어도 시린 겨울이었다.


스무 살, 또 한 번 낙방했다. 부모님께는 횡설수설 변명하며 딱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했지만 사실 난 내가 떨어질 거란 걸 알고 있었다. 경기도 산골의 기숙 학원, 서울 중심지의 대형 입시학원에서 나는 책상에 가만히 앉아 생각을 했다. 계속, 생각을 했다. 나에 대해서, 우리 가족에 대해서, 그리고 나를 지하 시궁창까지 처박아버린 모든 것에 대해서. 자주 화가 치밀어 올랐고, 몇 년을 제대로 울어본 적이 없었는데 자꾸 눈물이 왈칵 쏟아져 의자를 박차고 화장실에 가야 했다.


'나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 정말로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


끓어오르는 억울함이, 서러움이 나를 잠식했다. 아주 조금만 사색할 여유를 가졌다면 알 수 있지 않았을까. 십 대가 아픔으로 얼룩지지 않을 방법이 하나쯤은 보이지 않았을까. 방황으로 가득 찬 스무 살에 나는 차곡차곡 알뜰히도 쌓아왔던 슬픔을 콸콸 쏟아내는 작은 폭포였다.


스물한 살, 잔병치레와 싸워가며 혼자 독서실에서 공부했다. 한 끼 먹었다 하면 삼켜야 하는 약이 서른한 알이었다. 제정신이 아니었던 어느 날에는 초등학교 때부터 가깝게 지낸 친구에게 가족들이 힘들다고 눈물 콧물 줄줄 흘리며 털어놓았다. 같이 있으면 세상 시름이 다 잊히는 재미있는 친구였다. 부유하고 화목한 집안에서 자라서 그런지, 나와는 달리 반짝거리는 무언가가 있는 애였다. 그 애의 어머니는 내가 놀러 가면 늘 비싼 음식을 내어 주셨었다. 체리, 엽기 떡볶이, 탕수육. 이모는 늘 반겨 주셨고 숨 쉴 구멍을 내어 주셨었다. 함께 맞는 그 애의 아홉 번째 생일날, 모의고사를 치고 녹초가 된 몸에 때아닌 더위가 덮쳐 현기증이 일었다. 변변찮은 선물을 들고 집 앞에서 오래 기다렸지만, 나는 그 애를 다시는 볼 수 없었다. 내 이야기를 처음으로 털어놓은 사람이 아프게 떠났다. 꽤 오래 헤매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나에 대해 궁금해하는 이에게 날을 세우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스물두 살, 1월 3일 오후 4시 16분에 전화가 왔다. 아버지 생신이었다. 집을 뒤덮은 초상집 분위기가 대번에 축제 분위기로 바뀌어서 속으로 실소했다. 독립할 준비를 하려고 요리를 배웠다. 혼자서 살아갈 체력을 기르려고 운동도 시작했다. 안 해본 것들 리스트를 만들어서 하나씩 해보기도 했다. 수술을 꾸준히 받고, 살을 빼고, 화장도 하니 나도 꽤 봐줄 만한 것 같았다. 내 인생도 좀 달라지려나 하는 기대감이 살포시 자라났지만, 꾹 눌러 담았다. 학력을 내세워서 급하게 알바를 구해 번 돈은 그 애 동생에게 용돈으로 쓰라고 다 갖다주었다. 뭣도 모르고 주는 족족 받은 게 많아 그게 다 얼마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시세에 맞춰서 대충 그에 웃도는 돈을 쥐여주었다. 훌륭한 어른이 되면 갚으려고 하긴 했는데, 생각보다 일찍 갚게 되었음이 묘했다. 이모가 쏟아주신 정성까지 갚을 아량은 없었다. 그저 좋다고 넙죽 받는 철없는 얼굴이 두 사람을 너무 닮아서 잠깐 어지러웠을 뿐.


예민한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뾰족하게 세우고 입학했다. 더 이상 사람에 휘둘리기 싫었다. 내가 먼저 할퀴고 무시했다. 내가 당한 세월이 있는데 이 정도쯤은 나도 해도 된다고 오만하게 생각했다. SNS도 만들지 않았다. 오프라인에서의 인간관계도 넌덜머리 날 게 뻔한데 온라인까지 신경 쓰기 싫었다. 가족들 눈을 마주 보기 힘들었는데, 학교 사람들 눈은 잘 마주칠 수 있게 되었다.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10월 25일에는 굳건했던 나의 작은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 친한 사람들에게만 축하받으려고 켜두었던 생일 알림에 많은 사람이 연락을 주었다. 중간고사 마지막 시험을 치르고 쓰러지듯 누워 있다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따뜻한 호의가 낯설어서 잠을 설치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놀람 다음엔 미안함과 의문이었다. 내가 그렇게 벽을 쳤는데 다정한 말을 건네주는 게 이상했다. 결국 한숨도 못 자고 술자리에 불려 나가 멍하니 앉아 있는데 시험 끝 축하주를 마시던 동기들과 마주쳤다. 한 명 한 명 맑게 웃으며 나라는 사람이 세상에 나온 걸 축하해 주었다. 쏟아지는 수많은 인사를 평범하게 받으려고 무던히 애썼다. 고맙다고 말하며 살짝 웃고 술잔을 부딪치는 거, 꽤 괜찮았겠지? 기숙사 침대에 누워서 축하해 준 모두에게 고맙다고 문자를 보냈다. 감사 인사 두 번은 좀 오버하는 거였겠지만 고마움이 민망함보다 컸다. 케이크를 먹으며 왁자지껄한 축하 속에서 생일을 보낸 게 처음이라 얼떨떨하고 행복했다. 양력 생일은 의미 없다며 음력 생일을 챙기자던 가족은 음력 생일에도 안부 인사 하나 물어주지 않는다. 나는 근 일주일을 어색함에, 설렘에 허우적거렸다. 어색함이 조금 가라앉았을 때, 설렘이 나를 빈틈없이 안아주었다. SNS를 개설했다. 사랑받고 싶었다.


스물세 살, 오빠가 군대를 다녀와도 아버지만큼은 오빠에 대한 집착을 단 하나도 내려놓지 못하셨다. 아버지가 예민하셨던 날 나는 난데없는 폭언을 들었다. 나도 독한 말을 퍼부었다. 하지만 심장이 너무 뛰고 손이 벌벌 떨려서 아버지만큼 빠르게 카톡을 날릴 수 없었다. 못된 짓을 한 것 같은 죄책감이 스멀스멀 몸 위를 기어 다녔다. 최악의 연시였다. 부모님과도 다시 잘해보고 싶었는데, 떨어져 지내며 서로 건드리지 않는 게 최선이라는 게 기가 막혔다. 아버지의 폭언이 뇌리에 박혔다. 첫 MT가 다가왔다. 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조금이나마 웃을 일이 있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안고 버스에 올라 버렸다. 그곳에서 나는 나에게 호감을 보이는 남학생을 만났다. 열렬한 관심에 폐부가 타들어 갔다. 무섭고 서러웠다. 불쌍한 나를 들킬까 봐. 당신 같은 당당하고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 왜 나 같은 사람을 그런 눈으로 보나요, 왜 하필 지금인가요. 결국 첫 MT도 최악이었다. 다정하게 말 걸어주는 사람들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 내가 다 망쳐버렸다. 그는 나를 속상함과 원망을 담은 눈으로 보며 잘 들어가라고 했다. 내가 얼마나 최악인지 알게 해주는 또 하나의 기억이 뇌리에 박히는 순간이었다. 자취방에서 엉엉 울며 부모님을 원망했다. 본가에서 아버지는 사과는 않고 사람 말 모르는 개새끼마냥 내 주위를 맴돌며 눈치만 살폈다. 그게 얄미워서 식탁을 박차고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음습한 산골짜기에 드물게 볕이 들어 기적처럼 핀 꽃 봉오리가 때아닌 폭우에 꽃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송두리째 뽑혀 폭포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나만 빼고 모든 게 완벽해 보였던 햇살 좋은 봄날, 친한 동기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볼 수가 없었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병원에 갔다. 진즉 갔어야 했는데, 잘 사는 척하느라 아둔하게 굴었다. 끅끅 울며 비루한 삶을 반추해 털어놓았다. 선생님은 두서없이 쏟아내는 케케묵은 이야기를 참을성 있게 들어주셨다. 돈을 내니까 선생님이 베푸는 호의가 편히 받아도 되는 거라고 느껴졌다. 습관적으로 나를 포장하는 거짓말이 나와서 애는 좀 먹었다만, 온전한 정신으로 가족들 이야기도 할 수 있었다. 따듯한 눈빛과 이지적인 조언이 좋아서 월요일 상담 시간을 손꼽아 기다렸다. 약을 먹으면 졸렸지만 자고 나면 개운해져서 꾸준히 먹었다. 수업 시간에는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졸기 바빴고 등수는 딱 열 배가 되었다.


학기의 끝자락에서야 나는 안정궤도에 진입했다. 긴 상담의 결과로 알아낸 건, 내가 너무 집착했다는 거다. 사랑받으려고, 미움받지 않으려고. 모두가 나를 좋아할 순 없다. 호의가 익숙지 않은 나라서 일말의 애정이라도 주는 이가 있으면 부담스러울 정도로 그의 사랑을 갈구했다. 정떨어져서 떠나가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멍청하게 굴었다. 나는 지금을 과도기라고 정의 내렸다. 사랑받는 느낌에 익숙해지고, 미움받더라도 놀라지 않으려고 연습하고 있다. 병원에서는 그만 와도 되겠다고 해주셨다. 상담에 이어 약물치료도 마무리되었을 때, 두 번째 MT를 떠났다. 그곳에서 나는 꽤 자연스러웠다. 꽤 평범했다. 호의적으로 다가오면 반갑게 맞았고, 부담스럽게 다가오면 부담스럽다는 티를 냈다. 휴학하지 않아도 되겠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랑받는 것도, 사랑을 주는 것도, 미움받는 것도, 싫다고 말하는 것도.


못 먹고 못 입어서 서러워도, 말로 해도 되었을 일에 개 맞듯이 맞아도 엄마, 아빠가 좋았던 때가 있었다. 가족이라는 동아줄을 놓을 수 없어 맹목적이었던 때, 좁은 방에서 네 식구가 헐벗고 지냈었지. 가족 일에 꽤 이성적이게 되었고, 집안 형편도 많이 좋아졌는데 더운 여름날 에어컨 없이 우리 네 식구가 뒤엉켜서 살던 게 문득문득 떠올랐다. 밉고 짜증 나는데, 불쌍하고 미안했다. 양가적인 감정의 폭포에 이대로는 내가 미칠 것 같아서 툭 털어놓았다. 한 번 입을 떼니 봇물 터지듯이 쏟아졌다. 가족들은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받았지만, 그 뒤로도 가끔 욱하는 감정을 가감 없이 표출했다. 가족들은 덤덤하게 받아주었다. 엄마는 오징어 내장을 잡아 뜯으면서 말씀하셨다.


“세상에 좋은 사람들도 많고 이상한 사람들도 많지만, 미리 겁낼 필요는 없어.”


가족들에게는 가족들 이야기만 했다. 순간 내 기억이 잘못된 건지, 또 정신을 놓고 혼자 간직하자고 다짐한 것까지 다 지껄여댄 건지 의심했다. 분명 아닌데, 타이밍이 묘했다.

“알아요.”

저도 이제는 알아요.


SNS를 개설하고, 친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몇몇 친구들로부터 연락이 왔었다.


‘나 중학교에서 왕따당할 때 잘 챙겨줘서 정말 고마웠어. 늘 행복하길 바라.’

‘지원아, 너무 오랜만이다! 옛날에도 멋있었는데 훨씬 더 멋있어졌네!’

‘늘 뒤에서 응원했었어. 잘 돼서 보기 좋다. 좀 울컥하네, 우리 그때 진짜 힘들었잖아.’


난 아무 근심 없이 오빠와 시골의 비포장도로를 내달리던 점박이 똥강아지였는데. 비틀거려도 꽤 멀리 왔네. 아팠던 순간들은 한 번에 하나씩 놓아주고 있다. 최악이라고 생각했던 순간에도 나 꽤 괜찮게 잘 살아왔을지도 몰라. 증인들이 있으니까 그렇게 착각해도 괜찮을 것만 같다. 그때 나는 너무 비관적이라서 나를 제대로 못 돌아봤을지도, 어쩌면 나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맑은 물이 고요히 흐르는 앙증맞은 폭포였을지도 모른다. 어둡고 침침할 때도 있지만 간간이 볕이 들 때면 눈부신 햇살이 물살에 찬란하게 부딪혀 코끝이 아릴 정도로 아름답진 않았을까. 손때 묻지 않은 이끼 사이사이에 세잎 클로버들이 수놓아져 있진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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