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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and Apr 28. 2019

도살의 도시(옥자 2017)

영화 속 '세상' 돋보기 

 도시는 아름답다. 도심 속 줄지은 빌딩이 밤늦도록 발하는 찬란한 빛들의 향연. 깜깜한 도시를 밝히고, 보는 이들의 탄성을 자아낸다. 그 안에 갇혀 무참히 도륙되는 이들의 피는 어둠보다 탁한 빛으로 가려진다.


 인간이 종교나 신의 권능이 아닌 스스로의 주체성을 찾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1차 세계대전이라는 엄청난 참상을 겪은 뒤에야 종교의 허위성과 모순을 발견했고, 그 허무함이 곧 자신을 올바로 인식하고 희망을 발견하는 첫걸음이 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간은 어렵게 시작한 인간 주체로서의 권리를 새로운 신에게 넘겨주고 만다. 


 마르크스가 말한 대로, 세상은 자본주의라는 교리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 속에 주체로 보이는 세력은 소수의 자본가 계급이다. 그러나 이들 역시 주체로 보이는 것일 뿐, 실질적인 주체는 그 어떤 유기체도 아닌, 무형의 돈과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이다. 


 옥자는 이런 시스템을 유전자 조작의 산물을 통해 우회적으로, 그러나 분명하게 드러낸다. 옥자는 분명하게 본질을 부여받은 존재다. ‘버릴 데가 없는’ 우월한 돼지가 바로 옥자의 본질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버릴 데가 없다. 그런 옥자는 살아서는 ‘베스트’라는 말로 수식되고 죽어서까지 ‘딜리셔스’라는 말로 추앙된다. 


 우리는 모두 옥자다. 기형적인 유전자 조작의 산물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본질을 강요당한다. 자본주의가 교리 아래 우리의 본질은 좋은 말로, ‘쓰임’이다. 비슷한 다른 말로, ‘착취'다. 이때 자본주의는 '천박'해진다.


 천박한 자본주의의 논리에 영합한 학교와 사회는 인간 본연의 실존을 지우고 사회를 위한 착취에 적합한 개체로 ‘조작’ 한다. 그렇기에 자본주의 아래 인간은 불안하지 않다. ‘쓰임’이라는 거룩한 이름하에 인간은 스스로 ‘착취’의 굴레로 뛰어든다. 


 옥자에서 유전자 변형으로 태어난 돼지들은 이런 인간들보다 영리하다. 적어도 자기가 불행하다는 건 안다. 기계적인 사육과 죽음의 관문에서, 그들은 본능적으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흐느낀다. 


 인간은 계속되는 굴레에서 전혀 행복하지 않지만, 본질에 대한 합리화와 안정을 담보로,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한다. 죽어서까지 웃음을 짓고 있는 소시지에 붙어 있는 돼지 얼굴의 모순처럼, 인간은 죽어서까지 미소를 지으며 자본주의를 떠받든다. 먹기 좋게 잘 자라준 ‘딜리셔스’한 ‘베스트’ 돼지들. 그러다가 어떤 확실한 계기나 절체절명의 순간에 깨닫는다. ‘웃고 있는 스티커는 조작이었구나.’    


 옥자와 미자가 살던 곳은 인적이 드문 강원도 산속이다. 사람이 발 길이 닿지 않은 그곳에서 옥자와 미자는 더없이 행복하다. 아니 정확히는 행복했던 적이 없다. 불행한 적도 없기에. 


 도시 속 인간은 끊임없이 ‘행복’을 갈구한다. 도시에서 그들은 수많은 종류의 행복을 경험한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아름다운 물건을 소비하며, 환락을 밤을 보내며 시골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정도의 쾌락과 행복을 경험한다. 아주 단순한 방식으로.


 돈이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간결한 도시의 논리. 옥자와 미자가 시간과 추억을 공유하며 얻어냈던 ‘물고기와 감’은 시장 논리가 지배하는 곳에서는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자본주의 체제의 전리품일 뿐이다. 그 속에 담긴 기억과 추억, 과정은 철저히 도살된다. 


 돈을 쥔 개인과 결과만이 존재한다. 자본주의는 객체와 주체의 관계를 철저히 도살한다. 어린 물고기를 풀어주는 미자의 도덕적인 행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치기 어린, 비합리적인 행동이다. 


 사물과 추억, 인간성을 도살당한 자본주의 속 개인은 스스로를 올바로 인지하지 못한다. 설령 반자본주에 앞장서는 인물이라도 도살당한 개인은 자본주의적 도살자로서 존재한다. 옥자에 등장하는 ALF(Animal Liberation Front)는 이를 대변한다.


 동물의 권리와 해방을 표방하는 이들은 비폭력과 평화를 주장하면서도 공공연히 폭력과 비인간적인 행태를 저지른다. 동물을 위한다는 미명 아래 동물의 학대를 방관하며 이를 이용하는 것에서 이들이 자기모순에 빠져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 겉으로는 자본주의에 반하는 논리를 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자본주의의 논리를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심지어 자본주의 자체를 조롱하는 웃음과 유머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웃음과 행복은 자본주의 체계를 공고히 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 중 하나다. 과도한 긍정성과 웃음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배태된 모순과 허위성을 감추기에 좋은 도구다. 웃음과 행복은 자본주의 속에서 착취당하며 인간성을 상실한 개인에게 주는 마취제이며 그 굴레를 이어갈 수 있게 해주는 동력이다. 


 도시는 자본주의가 성장하기 가장 좋은 환경이다. 모든 움직임은 활동은 생산으로 일축되고, 다양한 관계 양상은 증발해 버리고 ‘거래’라는 말로 치환되는 도시의 생리. 이 비옥한 도시의 토양에 자본주의는 공고히 뿌리를 내렸다. '천박하게' 


 천박한 자본주의가 깊숙이 뿌리내린 도시에는 합법화된 도살이 자행된다. 개인의 추억이, 군중들의 기억이, 서로의 관계가 토막 나고 해체된다. 거래관계가 아닌, 다른 관계망은 철저히 분쇄된다. 공동체가 무너지고 유대감이 소멸한다. 자본주의와 무관한 조직과 관계가 해체된 도시에는 공하 한 개인들만이 각자도생 한다. 


 이제 도시는 무력하게 남은 개인들을 학살한다. 서두르는 법 없이 천천히, 효율적인 방식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버릴 데가 없는 성실한 노동자의 뼈와 살을 바른다. 


 밤낮없이 찬란한 도살의 도시. 그 현란한 빛에 눈이 멀어가는 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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