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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and Sep 01. 2020

주체의 사연 (작은 아씨들)

영화 속 ‘존재’ 돋보기

 주체와 객체는 호명 관계에서 나타낸다. 흔히 권력이 있는 사람은 대상을 자유롭게 부를 권리가 있는 반면, 권력이 없는 사람은 불리는 대로 부름을 당한다. 영화 <작은 아씨들>에선 전쟁터에서 부상을 입고 돌아온 아버지는 작품 중 후반부에 등장한다. 그리고는 네 딸들을 ‘작은아씨들’이라 부른다. 영화의 주인공이자 화자 역할을 하는 ‘조’는 영화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작가이기도 하다. 이 부분에서 조가 자신의 소설 제목으로 ‘작은 아씨들’이라고 한 것을 아는 관객은 불편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때까지 관객은 이 모든 서사의 주체를 ‘조’라고 믿었고, ‘작은 아씨들’이란 제목도 그녀에게서 나온 줄 알았다. 그런데, 이야기가 전개되는 동안 코빼기도 안 비치던 전쟁터에 나간 아버지가 돌아와서는 영화 제목이자, 이야기가 전개되는 영화 속 소설의 제목을 언급한 것이다. 하고 싶은 것을 다하고 주체적인 인물로 보이던 조는 단순히 소설 속 인물이라기보다는 과감히 이야기를 전개하는 작가에 어울린다. 그런데 엑스트라에 가까운 사람이 나와 전체 작품 제목을 좌지우지하다니. 그 순간 관객은 묘한 배신감과 무력감을 느낀다. 영화는 관객이 느꼈을 무력감에 대해 극복하고 결국엔 조에 동화된 관객에게 주체의 느낌을 선물한다.


 <작은 아씨들>은 액자 구조를 취한다. 흥미로운 것은 액자틀과 내용물이 정확히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순적이게도 이 불일치는 영화의 주제와 합일을 이뤄낸다. 교묘하게 의도된 부조화다. 영화는 7년 전과 현재를 오가며 진행된다. 네 자매들과 엄마가 모여 살던 7년 전과 자매 모두 떨어져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현재는 많은 것들이 변해있다. 자매들은 7년 전 다 같이 즐겼던 파티를 이제는 각자의 장소에서 즐기며, 사소한 고민거리를 서로 나누던 과거와는 달리, 혼자 고민하고 방법을 찾고 스스로 결단한다. 


 하지만 조건과 상황이 달라진 것일 뿐, 자매들은 과거나 지금이나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예전에 치마를 태워먹은 조가 7년 후에도 치마를 태워 먹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7년 전, 무리에서 자유롭고 호탕한 조와 조용히 글을 쓰며 몰두하는 조를 바라보는 시선은 다르다. 과거, 자매와 엄마 무리에 있을 때의 조는 ‘주어진’ 세계에 살았다면, 7년 후 조는 ‘주어진’ 세계를 넘어 스스로 개척한 세계에 산다.       


 7년 전 조를 둘러싼 세상은 행복했고 화목했다. 7년이 지난 현재, 조는 외롭고 슬프다. 영화 후반부에 이를 보여주는 극명한 대비가 있다. 7년 전 조의 동생 베스는 심하게 앓아누웠지만 기적적으로 회복한다. 덩달아 전쟁터에서 아버지가 돌아온다. 로리는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한다. 분명 선물은 반갑고 좋은 것이지만, 빌고 빌어도 결과는 어찌할 수 없는 무력함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7년 후 베스는 또 심하게 앓고 조는 예전처럼 극진히 간호한다. 하지만 베스는 세상을 떠나고, 조는 로리를 거절했던 걸 후회한다. 글쓰기로도 성공하지 못했다. 7년 전에 비해 피폐해 보이는 현실이다.   

   

 영화는 이 극명한 대비를 정점으로 삼았다. 즐거운 추억이 가득했고, 선물과도 같은 일들이 일어났던 과거와는 달리, 꿈도 사랑도 생과 사의 운명도 마음처럼 되지 않는 현재는 냉혹해 보인다. 조는 남아있던 원고를 태운다. 그 절망의 끝에서 조는 다시 시작한다. 지금껏 주어진 것이나 운명을 태우고 다시 시작하는 강인한 주체의 모습이다. 이는 흡사 <버닝>에서 종수를 마음대로 가지고 놀았던 벤의 존재를 없애고 자신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종수의 모습과도 닮았다. 


 <버닝>과는 달리 <작은 아씨들>은 꽤 분명하고 현실적인 이야기를 다룬다. 때문에 주인공이 슬픔을 딛고 일어나는 후반부가 지루하거나 전형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더구나 많은 사람들이 ‘제목’ 정도는 들어봤을 법한 원작일 경우엔 더욱 그렇다. 이 때, <작은 아씨들>의 교묘히 뒤틀린 액자 구조가 영화의 메시지에 힘을 실어준다. 주제와의 일관성일 뿐 아니라 실재하는 현실을 활용한 연출이다. 주어진 원작에서 나온 자식뻘 되는 작품이 원작에 가하는 도발이기도 하다.


 영화는 유명한 원작을 바탕으로 한다. 때문에 단순히 원작을 답습하거나 새로운 의미 없이 단지 ‘영상’으로 책의 내용을 전달하는 볼거리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위험이 있다. 그 우려와 위험을 가뿐히 탈피하며 주체와 객체를 분명히 한다. 순서의 차이, 혹은 영감을 받은 것일 뿐, 영화는 원작의 아류가 아니라 새롭고 독보적인 주체임을 분명히 한다. 


  그 도발은 당돌한 형식을 취한다. 조는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작은 아씨들>의 몇 챕터를 출판사에 보낸다. 재밌는 것은 편집장에게 보내면서 쓴 편지를 카메라 렌즈를 응시하며 직접 말한다는 것이다. 영화 속 이야기와 인물을 엿보는 위치에 있는 관객에게 예고도 없이 인물과 눈을 마주치는 것은 꽤 당황스러운 일이다. 편지를 받은 편집장 역시 조에게 카메라를 보고 영상편지를 보내듯 화답한다. 일부러 관객의 몰입을 깨려는 의도처럼 보인다. 동시에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가 품고 있는 자기모순을 깨려는 파격적인 시도다. 

카메라를 응시하며 편집장에게 쓴 편지를 읽는 조


카메라를 응시하며 편지에 답하는 편집장


 <작은 아씨들>의 제목은 영화 속에서도, 실제로도 저자의 아버지의 호칭에서 나온 말이다.  영화 속에서 조는 아버지가 딸들을 부르는 그 호칭을 책의 제목으로 사용했고, 실제로 <작은 아씨들>의 원작이 되는 소설을 쓴 루이자 메이 올콧 역시 자신의 아버지가 젊은 여자들을 부르는 말에서 제목을 착안했다고 한다. 언뜻 보면 무임승차 혹은 썩 맘에 들지 않는 오마주 일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있는 말을 자신의 이야기와 느낌으로 다시 사용하는 것은 오히려 창조보다 더 새로운 것이다.  


  태어날 때 이름을 스스로 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처럼 호명은 시작은 어쩔 수 없다.  이름이든 별명이든 호명은 부르는 사람의 주체적인 의도에 의한 것이다. 때문에 새로운 이름을 만드는 것은 쉬워도 본래 있던 의미를 갈음하는 것은 어렵다. 영화 <작은 아씨들>의 인물들은 주어진 유년기를 넘어 자신들만의 세상을 만들어 나간다. 소소한 일상을 다룬 이야기면서도, 흡사 위인전 같은 인상을 주는 이유다.   


 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오고 가는 구성에 액자 구조를 더한다. 이 액자 구조는 특이하게도 책이나 이야기를 시작함과 동시에 액자밖에 분류되지 않는다. 이야기 속 안의 현재 시점은 액자 밖의 시점이기도 하다. 액자 밖에서 조는 액자 안 이야기를 쓴 주체다. 동시에 액자 안에서는 이야기의 등장인물인 객체다. 액자 안에 객체는 액자 밖의 조의 의지라는 점에서 모순적인 만큼 더 강하게 조의 주체성을 부각한다. 


 비슷한 방식으로 영화는 원작의 아우라를 자신만의 주체성과 의지로 탈피한다. 또 그 증거를 소극적이지만 확실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처음 영화의 본 내용이 시작할 때 책 한 권이 나온다. 책 제목 밑에는 작은아씨들의 원작자인 ‘루이자 메이 올콧’의 이름이 적혀있다. 한편 마지막 장면에 조가 <작은아씨들>의 집필을 마치고 책을 완성할 때 나오는 책의 제목 밑에는 ‘조 마치’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루이자 메이 올콧’으로 시작해 ‘조 마치’로 끝난 것이다. 영화는 어린 시절 이야기가 주가 되는 원작과는 달리 그 이후의 이야기를 과거와 병치에 인물이 주어진 것에서 나아가 주체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명시적으로 보여준다. 이로써 영화는 원작에서 시작해 그 자체로 독립된 이야기와 가치를 지닌 작품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객체, 또는 아류일 수 있는 모든 존재의 주체성을 역설하며  내용뿐 아니라 스스로를 통해 모든 주체를 응원한다.     

영화 초반 등장하는 책 표지에는 원작자인 루이자 메이 올콧의 이름이 있다
영화 후반 등장하는 책 표지에는 영화 속 등장인물인 조 마치의 이름으로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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