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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and Sep 03. 2020

가해자(可解者)의 비극 (파수꾼)

영화 속 ‘인물’ 돋보기

 거칠어진 피부가 남자의 심리를 말해주는 듯하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다. 아들은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는 아들이 왜 그렇게 됐는지 알고 싶다.  


 영화 <파수꾼>은 아들을 잃은 아버지가 아들의 죽음을 쫓으며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는 이야기다. 특이한 것은 극단적 선택을 한 인물 기태가 학교폭력의 피해자라거나 어떤 방식으로든 괴롭힘을 당하는 학생이 아니라, 괴롭히고 폭력을 행사한 학생이라는 점이다. 특정 인물의 죽음을 쫒는 영화에서 희생자는 보통 무해한 인물로 설정된다. 영화 외부에 위치한 관객은 영화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무해하고 무기력한 존재다. 따라서 관객은 자연스레 무해한 인물에게 쉽게 동화된다. 때문에 영화에서는 관객이 쉽게 동일시할 수 있는 인물이 희생되기 마련이다.  


 그에 반해, 기태는 극 중에서 영향력이 강한 인물이다. 소위 ‘짱’ 행세를 하며 마음에 들지 않는 친구를 때리고 괴롭힌다. 영화는 기태가 죽기 전인 1년 전인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기태의 죽음을 파헤친다. 처음에 관객은 기태에게 동정이나 연민을 느껴서가 아니라 괴롭힘을 당하지도 않고 오히려 괴롭히는 기태가 왜 극단적 선택을 했을까 하는 호기심을 바탕으로 영화에 몰입하게 된다. 감정적 몰입이 아닌, 객관적 진실에 관한 궁금증이다. 

 영화 말미에는 사건에 대한 사실적 궁금증은 같은 인물에 대한 감정의 동화로 전환된다. 영향력 있는 인물이자 가해자였던 기태는 나중에는 무기력한 희생양으로 비친다. 관객과 가장 거리가 있는 극 중 인물로 보였던 기태가 관객이 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관객은 기태와 가까워지고 그를 이해하고 먹먹함을 느낀다. 불가해(不可解)한 세상을 이해하게 됨으로써 생기는, 가해자(可解者)의 비극이다.

   

 “미친놈” 


 고등학교 남자아이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영화에는 그 또래 아이들의 언어가 나온다. 조직폭력배가 쓰는 욕설과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상대를 겁주거나 화를 참지 못해서 하는 욕설만은 아니다. 어울려 놀면서 욕을 하기도 하고, 습관적으로 하기도 하고, 그야말로 별 뜻 없이 욕을 하기도 한다. 그만큼 이들의 세계는 복잡하며 이해하기 힘들다. 또한 이맘때 아이 과잉되어 있다. 사랑, 분노와 열등감의 감정이 그렇다. 기태는 이런 분노를 여과 없이 표출한다. 배출된 감정은 주변에 영향을 미치고 현실을 왜곡한다. 친구들은 기태의 성질을 돋우지 않으려 기태에게 맞춰준다. 때문에 기태에게 진짜 현실은 파악될 수 없는 불가해한 세상이다. 


 불가해한 세상이 어렴풋이 이해되기 시작할 때, 기태는 비극을 맞는다. 믿었던 친구에게 나온 진심이 자신이 굳게 믿었던 사실과 달랐을 때 기태의 세상은 무너진다. 영화는 기태의 죽음을 극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기태의 마지막 순간을 묘사하지도 않고, 기태가 느꼈을 슬픔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혼란스럽고, 무기력한 표정. 그것이 기태가 한 극단적 선택 바로 전에 나타난 것이다. 동시에 이는, 관객의 감정, 그리고 역시 본질적으로 불가해한 세상을 살아가는 모두의 감정이기도 하다.   


 기태는 분명 폭력을 행사한 가해자다. 동시에 감정의 과잉과 불안정한 시기에 불가해한 세상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한편 기태에게 모진 말을 해 기태를 죽음으로 몰았던 희준이나 동윤, 다른 친구들 역시 불가해(不可解)한 세상에 산다. 시시각각 변하는 감정의 과잉 속에서 그때 그때 표현하고 살아갈 뿐 진짜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파악하지 못한다.


 “가식 떠는 새끼들이 제일 싫어” 기태의 이 말은 단순히 특정 상황이나 인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과잉되어 똑바로 이해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분노다. 기태의 이 말은 파악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극 중 인물들, 그리고 관객이 느끼고 있을 응어리를 대변한다. 저마다의 현실에 속해 있는 관객 역시 불가해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사건이든 사람의 마음이든 완벽히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은 본질적으로 불가해하며 불안을 유발한다. 관객이 사건의 진실에 초점을 맞춰 따라가다가 감정적으로 기태에게 동화되는 이유다. 이때, 관객은 마음 편히 미워할 사람이 없어진다. 모든 인물과 상황의 진실을 마주하고 이해하게 될 때 역설적으로 혼란은 가중되고 또 다른 비극이 시작된다. 기태의 비극은 가해자(加害者) 여서가 아니라 어떤 진실을 파악한 가해자(可解者)였기 때문에 벌어졌다. 


 기태의 죽음에 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희준과 동윤은 기태의 죽음과 관련해 계속해서 고통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가해와 불가해 사이에서 겪는 고통이다. 영화는 말미에 현실과 과거, 실재와 상상이 교차하는 장면들을 통해 가해와 불가해의 모순적인 관계 양상을 나타낸다. 기태가 죽기까지 이야기들이 드러난 뒤, 동윤의 집에서 동윤과 기태가 이야기를 나누는 과거 장면이 나온다. 과거의 이야기로 넘어온 것처럼 보이지만 이내 울린 휴대폰을 받으러 동윤은 일어나 방으로 간다. 명백히 과거로 보였던 장면이 현실로 이어진다. 거울 속에 잡힌 기태는 동윤을 바라보지만 카메라를 통해 비친 동윤과 기태의 시선은 서로에게 닿지 못한다. 


 이어지는 마지막 장면 역시 과거와 현재가 병치되는 모순적인 효과를 통해 가해와 불가해의 간극에서 오는 비극을 암시한다. 과거 기태와 야구를 하던 장소에서 동윤은 기태와 이야기를 나눈다. 과거에 있었을 법한 대화를 나누다 동윤은 갑자기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이 장면에서 역시 동윤은 과거에서 현재로 넘어온다. 불가해한 현실이었던 과거에서 가해자(可解者)가 된 현실을 사는 동윤의 비극이다.   


 관객의 비극은 더 나아간다. 관객은 극 중 인물인 기태보다 냉정하게 사태를 파악한다. 기태에게 했던 희준과 동윤의 말이 기태가 느낀 그대로의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또 모든 것이 과잉된 그 시기에 기태가 느꼈을 절망감 역시 부풀려졌음을 안다. 관객이 느끼는 안타까움과 먹먹함은 영화를 밖에서 더 잘 파악할 수 있는 가해자(可解者)의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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